분쇄 대리석과 크로뮴 도금, 아크릴이 만든 회백색 마티에르와 내면의 경로
[KtN 박준식기자]회백색 입자들이 캔버스 아래쪽을 빽빽하게 채웠다. 잘게 부서진 덩어리들은 서로 맞물려 산맥처럼 솟고, 중앙과 좌우의 봉우리들은 검은 기류 사이로 불규칙하게 올라간다. 위쪽으로 번진 검정은 뒤로 물러난 배경이 아니다. 흰 입자와 흐릿한 빛을 품은 검은 공간은 회백색 지형을 누르면서도, 동시에 그 지형이 올라갈 자리를 열어준다. 임하나(Lim HaNa)의 2023년작 '신진경산수화/新 眞景山水畵'는 산수의 형식을 빌리지만 특정 산천을 옮겨놓은 회화가 아니다. 일상의 소란 속에서 잃어버린 내면의 경로를 분쇄된 물질과 상승하는 기류로 다시 세운 작품이다.
'신진경산수화/新 眞景山水畵'는 분쇄 대리석(Crushed Marbles), 크로뮴 도금(Chromium plating), 아크릴, 혼합매체를 캔버스 위에 올린 91x116.8x4cm 규모의 평면 회화다. 작품은 flat painting으로 분류되지만, 표면은 평면 안에 머물지 않는다. 분쇄 대리석의 입자는 암석과 지층의 촉감을 만들고, 크로뮴 도금의 차가운 반사는 검정과 회백색 사이에 빛의 긴장을 남긴다. 아크릴은 흩어진 입자를 붙잡고, 혼합매체의 두께는 산수를 바라보는 이미지가 아니라 몸앞에 놓인 물질의 지형으로 바꾼다.
신진경산수화라는 이름은 전통 진경산수를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부른다. 진경산수가 실제 산천을 바라보며 조선의 풍경을 회화의 언어로 세웠다면, 임하나의 산수는 현대인의 내면을 오늘의 진경으로 삼는다. ‘새로울 신(新)’이 붙은 산수는 옛 풍경의 반복이 아니다. 도시의 소음, 관계의 피로, 감정의 단절, 다시 연결되고자 하는 의지가 캔버스 안에서 산맥과 기류, 검정과 흰 입자로 바뀐다.
회백색 지형은 아래에서 위로 밀고 올라간다. 입자들은 서로 엉키고, 일부는 떨어져 나가며, 봉우리처럼 솟은 덩어리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흔들린다. 중앙의 높은 입자는 위쪽으로 치솟고, 양옆의 덩어리들은 넓게 퍼지며 산맥의 리듬을 만든다. 산은 멈춘 대상이 아니다. 캔버스 안에서 계속 밀려 올라오는 힘의 형태다. 풍경처럼 보이는 구조 안에 심리의 운동성이 들어 있다.
검은 기류는 산맥을 감싸고 밀어낸다. 깊은 검정은 개인이 홀로 통과해야 하는 침묵, 아직 말로 정리되지 않은 감정의 영역에 가깝다. 회백색 지형이 위로 솟을수록 검정은 더 넓게 열리고, 검은 공간 위의 흰 입자들은 멀리 남은 빛처럼 흩어진다. 흰 점과 흐릿한 빛무리는 효과를 위한 장식이 아니다. 단절된 감정 안에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미세한 신호다.
분쇄 대리석은 이 회화의 서사를 가장 강하게 붙잡는 재료다. 대리석은 본래 단단하고 차가운 물질이다. 캔버스 위에서는 잘게 부서진 입자로 흩어진 뒤 다시 산맥의 형태를 이룬다. 부서진 물질이 새로운 지형을 만든다는 구조는 임하나 작업에서 반복되는 회복의 감각과 맞닿아 있다. 상처와 단절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른 결로 쌓이고, 다른 표면으로 남으며, 내면의 경로를 다시 만든다.
크로뮴 도금의 반사성은 검은 기류 속에서 차가운 빛을 만든다. 회백색 표면은 빛을 균일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떤 부분은 번쩍이고, 어떤 부분은 검정 속으로 가라앉는다. 관람자의 위치와 조도에 따라 강조되는 입자도 달라진다. 산수는 정지된 풍경으로 굳지 않고, 보는 거리와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감각의 장이 된다. 내면의 길도 한 번에 드러나는 선이 아니라, 빛이 닿는 순간마다 다시 보이는 경로에 가깝다.
캔버스를 움직이는 방향은 아래에서 위로 흐른다. 회백색 입자들은 아래쪽에서 응축되고, 중앙의 봉우리를 지나 검은 공간 쪽으로 번진다. 상승은 폭발처럼 한순간에 터지지 않는다. 낮은 곳에서 천천히 밀려 올라오고, 거친 표면 사이를 지나며, 흩어진 감정의 입자들을 하나의 방향으로 모은다. 치유는 완성된 결말이 아니라, 안쪽에서 조금씩 방향을 회복하는 움직임으로 남는다.
거친 마티에르는 일상의 소란을 닮았다. 입자들은 매끈하게 정돈되지 않고 서로 부딪히며 쌓인다. 어떤 덩어리는 산의 능선처럼 이어지고, 어떤 입자는 검은 공간을 향해 떨어져 나간다. 삶의 소란 속에서 마음의 방향을 잃은 사람은 완전히 멈춰 있는 존재가 아니다. 흩어진 감정의 입자들은 다시 움직이고, 검은 침묵 안에서도 작은 빛은 남는다. 임하나의 산수는 바로 그 느린 움직임을 붙잡는다.
'신진경산수화/新 眞景山水畵'에서 산수는 치유의 배경이 아니다. 산수 자체가 치유의 과정이다. 전통 산수에서 자연은 인간이 바라보는 대상이었다. 임하나의 산수에서 자연은 마음 안쪽으로 들어온다. 산의 능선은 감정의 굴곡이 되고, 검은 공간은 고립과 침묵의 깊이가 되며, 흰 입자는 다시 연결되려는 신호가 된다. 자연은 바깥에 있는 풍경이 아니라 안쪽에서 다시 세워지는 지형이다.
가로형 구조는 지형의 확산을 더 강하게 만든다. 91x116.8cm의 비례 안에서 산맥은 좌우로 길게 퍼지고, 여러 봉우리는 각기 다른 높이로 검은 기류와 만난다. 중앙의 높은 덩어리만 작품을 끌고 가지 않는다. 왼쪽과 오른쪽의 작은 봉우리, 흩어진 입자, 빛무리들이 함께 관계의 방향을 만든다. 고립된 중심에서 넓은 주변으로, 닫힌 감정에서 다시 연결되는 경로로 나아가는 산수다.
회백색 지형은 산맥처럼 보이면서도 파동처럼 움직인다. 능선은 자연의 윤곽이고 동시에 감정의 진동이다. 임하나의 'Tea Therapy'에서 파동이 물결, 산수, 구름, 지형의 이미지로 열리듯, 이 산수의 질감도 고정된 풍경보다 움직이는 에너지에 가깝다. 산의 형태 안에 파동이 있고, 파동의 흐름 안에 내면의 방향이 있다. 물질의 표면은 정지된 풍경을 넘어 감정이 이동하는 통로가 된다.
검정과 흰 입자의 관계는 우주적 감각도 만든다. 아래에서 솟은 산수는 땅의 지형처럼 보이고, 위쪽의 검정은 밤하늘이나 마음의 깊이처럼 열린다. 흰 입자들은 별빛처럼 흩어지지만, 동시에 분쇄 대리석과 혼합매체가 남긴 물질적 흔적이다. 임하나의 회화에서는 우주와 지형, 물질과 감정이 분리되지 않는다. 작은 입자들이 모여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그 세계는 다시 개인의 내면으로 돌아온다.
동양 산수의 시선과 현대 회화의 물성도 한 캔버스 안에서 겹친다. 여백과 밀도, 산과 허공의 관계는 산수의 구조를 떠올리게 하고, 분쇄 대리석과 크로뮴 도금, 아크릴의 층은 현대 회화의 마티에르를 강하게 드러낸다. 임하나는 전통 산수를 장식적으로 차용하지 않는다. 산수의 구조를 빌려 현대인이 통과하는 감정의 지형을 만든다. 신진경산수의 새로움은 소재의 교체보다 시선의 이동에서 나온다.
임하나의 2023년 작업들과 놓으면 이 산수의 위치도 분명해진다. '마음의결1'과 '마음의결2'에서 감정은 검은 원형 안의 결로 응축됐고, 'SCORE:SONNET'에서는 원형과 검정, 빛과 마티에르가 우주관의 서사로 배열됐다. '신진경산수화/新 眞景山水畵'에서는 감정의 결과 우주적 검정이 산수의 지형으로 확장된다. 마음의 결은 산맥이 되고, 검정의 깊이는 하늘과 내면을 동시에 품으며, 흰 입자는 회복의 신호로 남는다.
작품 정보에 제시된 500만 원의 가격은 단순한 장식 회화의 값으로 읽기 어렵다. 분쇄 대리석과 크로뮴 도금, 아크릴은 표면 효과를 위한 재료가 아니라 부서진 것과 다시 솟는 것, 침잠하는 것과 빛을 되돌리는 것의 관계를 작품 안에 세우는 장치다. 시장의 숫자는 작품을 둘러싼 한 조건이지만, 이 회화의 밀도는 재료가 만든 시간과 감정의 서사에서 나온다.
회복은 밝은 결말로 제시되지 않는다. 거친 지형은 여전히 거칠고, 검정은 여전히 깊다. 그러나 회백색 산맥은 멈추지 않고 위로 솟는다. 흰 입자와 희미한 빛은 검은 공간 안에서도 흩어지며 살아남는다. 임하나는 상처를 지우지 않는다. 상처의 표면을 재료로 쌓고, 그 위에 빛을 얹으며, 잃어버린 경로가 다시 생길 수 있는 자리를 만든다.
'신진경산수화/新 眞景山水畵'는 산수를 다시 그린 작품이 아니라 산수의 방식을 통해 내면을 다시 조직한 작품이다. 일상의 소란 속에서 끊어진 감정의 경로, 고립된 개인이 다시 사회와 연결되기를 바라는 의지, 치유를 향해 천천히 솟는 상승기류가 캔버스의 물질적 표면에 응축돼 있다. 임하나의 산수는 밖에 있는 풍경이 아니라 안쪽에서 다시 세워지는 지형이다. 분쇄 대리석과 크로뮴의 차가운 빛, 검정과 회백색의 기류, 흩어진 흰 입자는 그 지형 위에서 내면의 길을 다시 찾는 회화적 서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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