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V Asilomar로 기본 SV의 약 두 배 가격 받아…판매 감소·수익성 압박 속 초고가 주문제작 확대
[KtN 김상기기자]레인지로버 한 대가 55만달러에 팔렸다. 지난해 미국 몬터레이 카 위크에서 공개된 Range Rover SV Asilomar Edition이다. 기존 Range Rover SV를 바탕으로 전용 투톤 도장과 실내 소재, 맞춤 자수와 베니어 등을 적용했다. 판매가격은 일반적인 Range Rover SV의 약 두 배까지 올라갔다. 완전히 새로운 차체나 별도의 고성능 파워트레인보다 고객 한 사람을 위한 제작 과정이 가격 차이를 만들었다.
레인지로버는 55만달러에서 멈출 생각이 없다. 매니징 디렉터 마틴 림퍼트(Martin Limpert)는 최근 비스포크 사업을 확대하면서 개인화 가격에 사실상 정해진 상한을 두지 않는 방향을 밝혔다. 도장과 스티치, 자수에서 가족 문장과 개인적인 소재까지 주문 범위를 넓히고, 향후 1년 동안 맞춤 주문 상담을 위한 공간 12곳을 추가한다는 계획도 내놨다.
자동차 한 대가 55만달러에 팔렸다는 사실만으로 초고가 전략의 성공을 단정할 수는 없다. 단 한 대만 제작한 특별판과 반복적으로 수익을 내는 사업은 성격이 다르다. 레인지로버가 앞으로 보여줘야 할 성과도 최고 판매가격 자체보다 50만달러 안팎의 주문을 얼마나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가격을 높이는 배경에는 세계 자산시장의 변화뿐 아니라 JLR이 처한 경영환경도 자리하고 있다. JLR은 2025년 3월 마감한 FY25에서 매출 290억파운드와 8.5%의 EBIT 마진을 기록했다. 소매판매는 42만8854대였다. 1년 뒤 FY26에서는 소매판매가 35만2389대로 줄었고 매출은 229억1100만파운드, EBIT 마진은 0.7%까지 떨어졌다. 사이버 사고에 따른 생산 차질과 미국 관세, 중국 시장 부진, 기존 재규어 모델의 생산 종료 등이 겹쳤다.
판매량이 약 18% 감소한 상황에서 자동차를 더 많이 파는 방법만으로 수익성을 회복하기는 부담이 커졌다. JLR은 앞으로 2년 동안 17억파운드의 비용을 줄이고 손익분기 판매량을 약 30만대 수준으로 낮추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FY24부터 FY29까지 미래 기술과 차량 플랫폼, 사업 전환에 투입할 자금은 180억파운드다. 판매량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면서도 한 대를 팔아 확보하는 매출과 이익을 높여야 하는 구조다.
비스포크 사업은 바로 이 대목에서 의미가 생긴다. 자동차 회사는 플랫폼과 파워트레인, 전기·전자 시스템, 공장 설비에 먼저 막대한 자금을 투입한 뒤 가능한 한 많은 차량을 판매해 투자비를 회수해 왔다. 생산량을 늘리고 동일한 부품과 공정을 반복할수록 한 대에 돌아가는 고정비 부담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초고가 주문제작은 계산법이 다르다. 이미 개발한 Range Rover SV를 바탕으로 전용 도장과 가죽, 목재, 금속 장식, 자수와 고객 전용 디자인을 더해 판매가격의 상단을 크게 넓힐 수 있다. 새로운 플랫폼을 처음부터 개발하지 않더라도 자동차 한 대에 붙는 가격을 크게 높일 여지가 생긴다. 일반 자동차에서 수백만원 또는 수천만원짜리 선택사양으로 팔던 개인화 요소가 초고가 시장에서는 별도의 제작 서비스로 바뀌는 셈이다.
그렇다고 55만달러가 그대로 높은 이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Range Rover SV Asilomar의 판매가격 가운데 JLR에 실제로 얼마가 남았는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전용 소재와 수작업 공정, 설계 인력, 품질관리와 고객 대응에 들어가는 비용도 따로 발생한다. 비스포크 모델의 대당 수익성이 일반 Range Rover보다 어느 정도 높은지도 공개되지 않았다. ‘한 대를 팔아 두 대 몫을 번다’는 식의 단순한 계산은 성립하지 않는다.
JLR의 판매 구성은 이미 고가 모델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Range Rover와 Range Rover Sport, Defender가 전체 도매판매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FY25 67.8%에서 FY26 76.5%로 높아졌다. 전체 판매가 줄어드는 동안 상대적으로 가격과 수익성이 높은 모델의 비중은 오히려 커졌다. 비스포크 확대는 이런 흐름의 가장 높은 가격대에 자리한다.
10만달러대 자동차를 구입하려는 소비자를 억지로 50만달러 시장으로 끌어올리는 전략은 아니다. 이미 고급 자동차를 여러 대 살 수 있고 다른 사람과 같은 사양을 원하지 않는 고객에게 전혀 다른 가격표를 제시하는 방식에 가깝다. 판매 대상이 크게 늘지 않더라도 한 고객이 지불하는 금액을 높일 수 있다.
세계 자산시장에서도 이런 고객은 늘고 있다. 2025년 투자 가능 자산 3000만달러 이상을 보유한 초고액자산가 인구는 약 25만명으로 전년보다 9.4% 증가했다. 미국에서는 고액자산가가 한 해 동안 73만6000명 증가해 870만명에 달했다.
반면 럭셔리 자동차 시장 전체가 같은 속도로 성장한 것은 아니다. 2025년 세계 럭셔리 자동차 시장은 금액 기준으로 감소했고 판매량도 줄었다. 가격표에 ‘럭셔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소비자가 무조건 더 많은 돈을 지불하는 시장은 아니다. 일반적인 고급차 소비가 압박을 받는 가운데 가격에 상대적으로 덜 민감한 최상위 자산가 시장이 따로 움직이는 양극화가 강해졌다.
레인지로버가 겨냥하는 곳은 후자다. 자동차 자체의 성능이나 크기만으로 경쟁하기보다 색상과 소재, 제작 방식, 희소성까지 상품으로 묶어 판매하려 한다. 판매량을 크게 늘리지 않고 한 고객에게서 얻는 금액을 높이는 구조다.
롤스로이스(Rolls-Royce Motor Cars)는 이미 같은 방식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2024년 판매량은 5712대에 그쳤지만 자동차 한 대에 들어간 비스포크 콘텐츠의 평균 가치는 전년보다 10% 증가했다. 비스포크와 코치빌드 생산 능력을 확대하기 위해 영국 굿우드 시설에 3억파운드 이상을 투자하기로 했다. 자동차를 많이 만드는 대신 고객 한 명이 한 대에 지불하는 금액을 높이는 사업구조다.
레인지로버가 같은 가격 전략을 택한다고 곧바로 롤스로이스와 같은 위치에 올라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격이 높아질수록 소비자가 요구하는 기준도 함께 올라간다. 20만달러대 Range Rover SV를 판매할 때는 성능과 차체 크기, 승차감과 편의장비가 중요한 비교 요소가 될 수 있다. 가격이 50만달러를 넘어가면 주문 과정과 소재의 희소성, 수작업 품질, 고객 서비스와 브랜드 지위까지 가격을 설명해야 한다.
50만달러를 지불할 수 있는 고객에게 레인지로버만 선택지가 되는 것도 아니다. 같은 예산이면 롤스로이스와 벤틀리를 비롯한 초고가 자동차 브랜드까지 검토할 수 있다. 레인지로버가 가격표만 올린다고 경쟁 상대와 브랜드 위상이 자동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비스포크 사업을 장기적으로 키우려면 높은 가격을 받을 만한 제작 능력과 고객 경험을 함께 구축해야 한다.
생산 과정에서도 부담은 커진다. 고객 한 사람만을 위한 색상과 소재, 자수와 장식이 늘어날수록 공정은 복잡해진다. 표준화된 부품을 반복 생산하는 대량생산과 달리 주문마다 별도의 관리가 필요하고 제작 기간도 길어질 수 있다. 개인화를 지나치게 표준화하면 높은 가격을 받을 근거가 약해지고, 반대로 주문 범위를 무한정 넓히면 생산비용과 관리 부담이 커진다.
55만달러짜리 SV Asilomar가 팔렸다는 사실은 초고가 주문 수요가 존재한다는 근거는 된다. 같은 가격의 자동차를 지속적으로 판매할 시장이 이미 만들어졌다는 의미까지 담고 있지는 않다. 레인지로버가 앞으로 12곳의 커미셔닝 공간을 추가하려는 계획도 단발성 특별판을 넘어 반복적으로 주문을 확보할 판매망을 구축하려는 움직임으로 읽을 수 있다.
신차 전략도 함께 움직인다. Range Rover GT는 기존 Range Rover, Range Rover Sport, Velar, Evoque에 이어 다섯 번째 제품군으로 추가된다. EMA 플랫폼을 기반으로 영국 헤일우드에서 생산되며 초기에는 배터리 전기차로 출시될 예정이다. Evoque와 Velar를 없애고 모든 제품을 초고가로 바꾸는 방식이 아니라 기존 제품군을 유지하면서 가격의 상단을 더 넓히는 구조다.
레인지로버의 움직임을 ‘비싸게 만들면 더 잘 팔린다’는 공식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동차 시장 전체에서 가격을 계속 올려도 판매가 따라오는 시대는 아니다. JLR의 FY26 판매량은 실제로 감소했고 수익성도 크게 떨어졌다. 더 많은 소비자에게 비싼 자동차를 팔기보다 구매력이 가장 높은 소수의 고객에게 훨씬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는 상품을 추가하는 쪽에 가깝다.
자동차 가격에도 이제 두 종류가 겹치기 시작했다. 차체와 파워트레인, 기술과 장비에 붙는 가격이 있고, 그 위에 희소성과 개인화, 제작 과정에 붙는 가격이 올라간다. 레인지로버가 후자의 가격을 어디까지 높일 수 있는지를 시험하기 시작한 셈이다.
성과를 판단할 숫자는 55만달러라는 최고 판매가격 하나만으로 부족하다. 비스포크 주문이 얼마나 늘어나는지, Range Rover의 평균 판매가격이 실제로 상승하는지, 늘어난 제작비용을 감안하고도 JLR의 수익성 개선으로 이어지는지를 함께 봐야 한다.
JLR은 손익분기 판매량을 약 30만대까지 낮추면서 180억파운드 규모의 미래 투자를 이어갈 계획이다. Range Rover GT를 비롯한 신차도 투입한다. 55만달러짜리 자동차 한 대가 화제를 만드는 단계보다 중요한 시점은 이제부터다. 비슷한 가격을 지불할 고객을 반복적으로 확보하고, 높은 가격이 실제 이익으로 남는 사업을 만들 수 있는지가 향후 실적과 주문 규모에서 드러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