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한 점에서 관계와 경험으로 확장된 미술…소더비 홍콩 ‘PSYCHO’가 보여준 정체성·공간·서사·시장의 새로운 접점
[KtN 임민정기자]미술은 작품으로 남지만 시대는 전시에서 읽힌다. 어느 작가를 불러들이고, 무엇과 무엇을 나란히 놓으며, 관객을 어디에 세우는지가 당대의 감각을 드러낸다. 같은 작품도 미술관의 흰 벽과 경매장의 프리뷰, 사적인 방을 닮은 설치 안에서 전혀 다른 의미를 얻는다. 작품의 제작이 작가의 몫이라면 작품과 작품 사이의 관계를 만드는 일은 전시의 몫이다.
홍콩 소더비 메종(Sotheby’s Maison)의 ‘PSYCHO: Identity Alienation Shadow Duality’는 지금 미술을 둘러싼 변화가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는지를 압축한다. 마크 로스코(Mark Rothko), 요시토모 나라(Yoshitomo Nara), 테츠야 이시다(Tetsuya Ishida), 야요이 쿠사마(Yayoi Kusama), 한스 벨머(Hans Bellmer), 이불(Lee Bul), 프랭크 아우어바흐(Frank Auerbach), 폴라 레고(Paula Rego)의 작업이 한 공간에 들어왔다. 브렛 이스턴 엘리스(Bret Easton Ellis)의 ‘American Psycho’ 초판과 로버트 버턴(Robert Burton)의 ‘The Anatomy of Melancholy’ 17세기 판본도 함께 놓였다. 미술관급 대여작과 경매 출품작의 구분마저 전시 안에서는 뒤로 물러난다.
작품들을 이어주는 것은 시대도, 장르도, 조형 양식도 아니다. 정체성과 소외, 그림자와 이중성이다. 인간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층위가 서로 다른 작품을 한곳으로 불러들인다.
테츠야 이시다의 1996년작 ‘Can’t Fly Anymore’에는 녹슨 해적선 형태의 놀이기구와 인물이 결합돼 있다. 놀이와 움직임을 위해 존재하는 장치는 사람을 이동시키는 대신 붙잡고 있다. 일본 버블경제 붕괴 이후 노동과 사회 시스템 안에서 개인이 경험한 소외와 무력감을 반복해서 다뤘던 이시다의 작업에서 불안은 얼굴의 표정보다 신체가 처한 구조에서 읽힌다.
요시토모 나라의 인물은 정반대의 방식으로 내면에 접근한다. 어린아이를 연상시키는 작은 몸과 커다란 얼굴에는 친근함과 경계, 고독과 반항이 함께 머문다. 하나의 표정을 하나의 감정으로 번역하기 어려운 얼굴이다. ‘The Crated Room in Iceland / Drawing Room’에서는 내면의 범위가 인물에서 공간으로 넓어진다. 97점의 드로잉과 의자, CD 플레이어, 개인적인 물건, 대형 회화가 나무 구조물 안에 모이고, 한 사람의 감정은 생활의 흔적과 기억이 쌓인 방으로 바뀐다.
마크 로스코의 1964년작 ‘Untitled (Plum and Dark Brown)’에는 얼굴도 사물도 없다. 플럼과 짙은 브라운만으로 구성된 높이 2m의 색면이 관람자를 마주한다. 이시다가 사회 안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신체를 보여주고 나라가 개인의 사적 세계를 펼쳐놓는다면, 로스코는 형상이 사라진 자리에서 색의 깊이와 규모만으로 내면을 건드린다.
세 작업 사이에는 미술사적으로 큰 거리가 있다. 그러나 ‘PSYCHO’에서는 거리가 오히려 중요해진다. 닮은 작품을 모아 하나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대신 서로 다른 언어가 같은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여준다. 현대의 전시는 작품의 유사성보다 관계의 설계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정체성을 바라보는 방식도 달라졌다. 한 사람의 자아를 단단한 중심으로 놓고 설명하기보다 사회와 노동, 기억과 역사, 욕망과 타인의 시선이 끊임없이 개입하는 상태로 다룬다. 이시다의 인물 뒤에는 경제와 조직이 있고, 나라의 방에는 개인적인 기억이 쌓이며, 이불의 ‘Heaven and Earth’에서는 개인의 경험과 한국 현대사에 대한 참조가 교차한다.
‘내면’은 더 이상 개인만의 영역이 아니다. 사회가 바뀌면 사람이 자신을 인식하는 방식도 달라지고, 노동의 구조가 흔들리면 미래를 바라보는 감각도 흔들린다. 역사적 기억 역시 개인의 몸과 감정에서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동시대 미술이 정체성을 반복해서 다루는 이유를 개인의 심리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다.
문학이 전시장 안으로 들어온 것도 같은 변화와 맞닿는다. ‘American Psycho’와 ‘The Anatomy of Melancholy’ 사이에는 수백 년의 시간이 놓여 있지만 욕망과 소외, 멜랑콜리와 분열된 자아를 바라본다는 점에서 연결된다. 회화와 설치 옆에 책을 놓으면서 전시는 인간의 내면을 특정 매체가 독점하는 영역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전시를 보는 행위도 달라진다. 작품 한 점 앞에서 의미를 찾고 다음 작품으로 이동하는 대신 앞서 본 이미지와 다음에 만날 텍스트 사이에서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로스코의 색면을 본 뒤 책의 제목을 읽고, 다시 나라의 드로잉 사이로 들어간다. 감상은 작품 하나에서 끝나지 않고 전시장 전체를 통과하면서 이어진다.
큐레이션의 역할도 여기에서 커진다. 작품을 잘 걸어놓는 기술을 넘어 서로 다른 시대와 매체 사이에 의미의 순서를 만드는 일로 확장된다. 무엇을 먼저 보여주고 어떤 작품을 가까이 놓을지에 따라 관객이 읽는 내용도 달라진다. 전시가 작품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해석의 구조가 되는 순간이다.
요시토모 나라의 ‘The Crated Room in Iceland / Drawing Room’은 공간이 어떻게 작품의 일부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관람객은 구조물의 외부를 돌아보고 내부를 들여다보며 수십 점의 드로잉과 사물을 차례로 마주한다. 정면 한곳에서 완성되는 작품이 아니다. 몸을 움직일수록 다른 관계가 나타난다.
최근 ‘몰입형 전시’가 대형 프로젝션과 디지털 기술을 중심으로 소비돼 왔지만 몰입의 본질은 기술의 규모에만 있지 않다. 작은 드로잉과 의자, 음악을 재생하는 기기, 좁은 방도 관람객의 위치와 동선을 바꾸면 강한 몰입을 만든다. 화려한 영상이 아니라 거리와 움직임, 내부와 외부의 차이가 관람의 밀도를 결정한다.
관람객 역시 작품 앞의 수동적인 시선에서 조금씩 벗어난다. 어느 방향에서 접근하고 얼마나 오래 머무르며 어떤 순서로 작품을 연결하는지에 따라 전시 경험이 달라진다. 작품을 해석하는 과정에 관람자의 이동이 들어오기 시작한 셈이다.
‘PSYCHO’가 소더비에서 열렸다는 사실은 미술의 또 다른 변화를 드러낸다. 전시는 9월 27일까지 이어지고, 현대·컨템퍼러리 이브닝 경매는 28일, 데이 경매는 29일 열린다. 로스코의 ‘Untitled (Plum and Dark Brown)’은 전시의 중심작이면서 7,800만~1억2,800만 홍콩달러의 추정가로 경매에 출품된다. 나라의 ‘The Crated Room in Iceland / Drawing Room’ 역시 15년 넘게 공개되지 않았다가 전시장에 다시 등장한 뒤 처음 경매에 나서며 4,500만~6,500만 홍콩달러의 추정가가 제시됐다.
전시와 시장 사이의 시간적 간격은 거의 없다. 작품은 먼저 정체성과 소외라는 서사 안에서 관객을 만나고, 곧이어 응찰과 낙찰이라는 숫자의 언어로 이동한다. 문화적 의미와 시장 가치가 동일하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서로 다른 두 가치가 한 작품을 둘러싸고 연속해서 작동하는 구조가 중요하다.
경매사의 전시 방식도 이에 맞춰 달라지고 있다. 출품작의 실물을 확인하는 프리뷰에서 한발 더 나아가 독립적인 제목과 서사를 갖춘 기획전을 만든다. 대여작과 판매작을 섞고, 문학과 설치를 끌어들이며, 작품을 가격보다 먼저 하나의 문화적 경험으로 제시한다.
미술관과 경매장의 경계가 사라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미술관에는 연구와 보존, 수집과 공공성이라는 역할이 있고 경매사는 거래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다만 관객이 작품을 경험하는 형식에서는 서로의 영역이 이전보다 가까워졌다. 갤러리는 미술관 규모의 전시를 만들고, 아트페어는 판매 부스 밖에 대형 설치와 프로그램을 배치하며, 경매사는 큐레이션을 앞세운 전시를 연다.
우리 시대의 미술을 설명하는 변화는 바로 이런 경계의 이동에 있다.
회화와 설치의 경계만 흐려진 것이 아니다. 작품과 문학, 감상과 독서, 공간과 작품, 관람과 참여, 전시와 시장 사이의 구분도 이전보다 복잡해졌다. 하나의 작품만으로 완결되는 미술보다 무엇과 함께 놓였는지에 따라 새로운 의미가 발생하는 미술이 더 자주 등장한다.
작품의 가치도 제작 순간에 완전히 닫히지 않는다. 요시토모 나라의 인물은 단독으로 마주할 때와 ‘Alienation’이라는 단어 아래 테츠야 이시다의 인물과 함께 볼 때 다른 의미를 얻는다. 로스코의 색면도 거액의 추정가와 함께 접할 때와 인간의 그림자와 이중성을 다루는 전시 안에서 바라볼 때 경험의 방향이 달라진다.
전시는 바로 그 차이를 만든다.
미술을 둘러싼 제도가 복잡해질수록 전시의 역할은 오히려 선명해진다. 작품을 모아놓는 장소가 아니라 서로 다른 것 사이에 관계를 만드는 장소다. 개인과 사회, 기억과 역사, 미술과 문학, 작품과 관객, 문화와 시장이 한 공간에서 만나도록 배열한다.
‘PSYCHO’가 보여주는 우리 시대의 미술도 하나의 양식으로 정의하기 어렵다. 추상과 구상, 회화와 설치가 공존하고 17세기의 책과 현대 소설이 동시대 미술 옆에 놓인다. 오래 공개되지 않았던 설치가 다시 조립되고, 미술사적 작품은 전시를 거쳐 곧바로 경매로 이동한다. 작품보다 관계가 많아졌고, 관객에게 요구되는 해석의 층도 깊어졌다.
미술이 달라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복잡해졌다. 하나의 정체성으로 사람을 설명하기 어렵고, 개인의 불안을 사회와 분리하기 어려우며, 문화와 시장 역시 완전히 독립된 영역으로 남아 있지 않다. 미술은 언제나 시대보다 조금 먼저 이런 복잡성을 받아들여 왔다.
그래서 오늘의 전시를 본다는 것은 작품만 보는 일이 아니다. 어떤 시대가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무엇과 무엇의 경계를 다시 긋고 있는지를 함께 읽는 일이다. ‘PSYCHO’에서 로스코의 색면과 나라의 방, 이시다의 갇힌 신체가 한 공간에 놓인 이유도 서로 닮았기 때문이 아니다. 서로 다른 언어로 지금의 인간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미술은 하나의 답을 제시하기보다 관계를 만든다. 전시는 그 관계가 가장 밀도 높게 드러나는 장소다. 작품을 둘러싼 경계가 움직일수록 전시장에는 시대의 감각이 더 선명하게 남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