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이후 전도연, ‘오아시스’ 이후 설경구가 다시 선 이창동 장편
해고 뒤에도 생활을 붙드는 미옥과 노동의 자리를 잃은 호석, 같은 부부 안에서 갈라지는 두 방향
해외 평단도 두 배우를 작품의 정서적 중심으로 주목…설명보다 표정과 침묵으로 쌓은 관계
[KtN 김동희기자]안미옥은 남편 최호석의 해고 이후에도 생활을 멈추지 않는다. 공장에서 일하고 아들을 돌보며 남편 곁에 남는다. 호석은 같은 시간을 다르게 견딘다. 직장을 잃은 뒤 술에 기대고, 파업과 진압 과정에서 남은 기억을 품은 채 일상으로 완전히 돌아오지 못한다. ‘가능한 사랑’에서 전도연과 설경구는 한집에 사는 부부를 연기하지만 두 사람이 향하는 방향은 처음부터 같지 않다.
미옥은 바깥으로 움직이고 호석은 안으로 가라앉는다.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가 인터뷰를 제안했을 때 호석은 카메라를 꺼리지만 미옥은 촬영을 받아들인다. 예지와 친해지고 상우를 만나면서 이전에는 가까이에서 볼 수 없었던 생활을 접한다. 경제적 어려움과 남편의 상처를 품은 채 살아온 미옥에게 다른 부부와의 만남은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바깥에서 바라보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호석에게 다큐멘터리 촬영은 다른 의미다. 이미 노동 현장에서 겪은 상처를 다시 말해야 하고, 자신의 삶을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설명해야 한다. 직장을 잃은 뒤 사회적 자리까지 흔들린 사람에게 카메라는 새로운 기회이면서 동시에 묻어둔 기억을 다시 꺼내는 압박이 된다.
두 배우의 연기는 같은 사건을 견딘 부부가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살아남는지를 벌려놓는다.
전도연은 2007년 ‘밀양’ 이후 19년 만에 이창동 감독의 장편영화에 다시 출연했다. ‘밀양’에서 전도연은 아들을 잃은 신애가 상실과 종교, 용서의 문제를 통과하는 과정을 맡았고 이 작품으로 제60회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가능한 사랑’의 미옥 역시 고통을 안고 있지만 신애와 같은 방식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생활을 계속하고 다른 사람에게 접근하며 자신의 욕망도 외면하지 않는 쪽으로 움직인다.
전도연은 앞서 제작보고회에서 긴 시간이 흘렀지만 이창동 감독과 다시 만났을 때 ‘밀양’이 엊그제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시나리오를 받은 뒤에는 마지막까지 읽고 남은 여운이 강했다고 설명했다. ‘밀양’ 때와 달리 이번 현장은 웃음이 많았고 촬영장에 빨리 가고 싶을 정도였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19년이라는 시간은 배우와 감독의 관계만 바꾼 것이 아니다. 전도연이 맡은 여성 인물의 위치도 달라졌다. ‘밀양’의 신애가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을 겪고 신앙과 용서의 언어에 부딪쳤다면, 미옥은 이미 오래 지속된 생활의 피로와 경제적 압박 안에서 자신의 욕망을 발견한다.
미옥에게 가장 중요한 변화는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 하나로 좁혀지지 않는다. 남편이 직장을 잃은 뒤에도 가족의 생활을 유지해야 했고, 다른 계급의 삶을 가까이에서 본 뒤에는 자신이 살아온 방식과 다른 선택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예지의 친절을 받아들이면서도 거리를 느끼고, 상우의 태도에 끌리면서도 상대가 가진 경제적 여유와 삶의 조건을 의식한다.
전도연은 미옥을 감정을 크게 표출하는 방식보다 여러 감정이 동시에 머무는 사람으로 만든다. 상대에게 마음을 열다가도 물러서고, 즐거워하다가도 경계하며, 남편에게 연민을 느끼면서도 호석의 상처에 자신의 삶 전체를 묶어두지는 않는다.
해외 비평에서도 미옥은 작품의 중심으로 자주 언급됐다. 베니스 공개 뒤 나온 평론 가운데는 전도연과 설경구가 네 배우 가운데 영화의 정서적 중심을 이룬다고 평가한 글이 있었고, 미옥이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결혼생활, 다른 계급에 대한 호기심을 오가며 복합적인 감정을 드러낸다는 분석도 이어졌다.
전도연이 미옥을 연기하는 방식에는 눈에 띄는 과장이 많지 않다. 상대의 말을 듣고 있는 얼굴, 대답하기 전의 짧은 망설임, 편안한 듯하다가 순간 굳어지는 표정이 감정의 변화를 대신한다. 미옥에게 일어나는 변화가 한 번의 사건으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작은 차이가 누적될수록 인물이 달라진다.
예지와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친구가 되자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함께 웃는 시간과 상대의 생활수준을 의식하는 순간이 나란히 놓인다. 우정과 열등감, 호감과 불편함을 하나씩 분리하지 않고 한 사람 안에 남겨둔다.
상우 앞에서도 감정의 방향을 쉽게 정리하지 않는다. 친절한 남성에게 끌리는 마음만 보여주는 대신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삶에 대한 호기심까지 함께 드러낸다. 상우 개인을 향한 감정과 상우가 대표하는 생활조건을 향한 욕망이 포개진다.
전도연의 미옥은 ‘남편을 지키는 아내’에서 멈추지 않는다. 가족을 유지하면서도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삶을 바라보고, 남편을 이해하면서도 호석의 상처를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이창동 감독이 두 부부를 통해 계급과 사랑을 함께 다루는 과정에서 미옥이 가장 넓게 움직이는 인물이 되는 이유다.
설경구가 맡은 호석은 반대편에서 움직인다. 새롭게 열리는 세계보다 이미 잃어버린 세계를 붙잡고 있다.
호석에게 해고는 월급이 끊긴 사건이 아니다. 동료들과 일했던 시간, 노동자로 인정받았던 자리, 가족 앞에서 자신을 설명할 수 있었던 근거까지 함께 흔들렸다. 설경구는 호석을 죄책감과 분노, 수치심을 품고 하루하루를 버텨온 사람으로 설명했다. 21일 기자간담회에서도 해고 전에는 노동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으며 살아갔지만 해고 뒤 자아가 무너졌다는 해석을 내놨다.
호석의 상태를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면 ‘분노한 해고 노동자’가 될 수 있다. 설경구의 연기는 그런 요약에서 계속 벗어난다.
화를 내지 않을 때에도 몸에는 긴장이 남는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과거를 묻는 동안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고, 가족 앞에서도 자신의 상처를 모두 꺼내놓지 않는다. 술과 침묵, 갑작스러운 감정의 분출 사이에는 자신이 실패했다고 느끼는 사람이 타인 앞에서 취하는 여러 방어가 놓인다.
노동자들의 집단상담 과정에서 호석이 과거 파업과 진압의 기억을 다시 꺼내는 부분은 해외 비평에서도 설경구의 연기가 강하게 언급된 대목이다. 당시 동료들과의 기억과 진압 과정에서 받은 충격, 배신감이 한꺼번에 올라오는 흐름을 두고 설경구의 연기가 작품에서 가장 강한 순간 가운데 하나라는 평가가 나왔다.
설경구에게 호석은 이창동 감독과 함께했던 초기 경력까지 자연스럽게 불러오는 인물이다.
2000년 ‘박하사탕’에서 설경구가 맡은 김영호는 “나 다시 돌아갈래”를 외치며 기차 앞으로 걸어갔다. 영화는 한 인간의 파괴된 현재에서 출발해 시간을 거꾸로 돌리며 개인과 한국 현대사가 맞부딪친 과정을 따라갔다. 2002년 ‘오아시스’에서는 사회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종두를 맡았다.
‘가능한 사랑’에서 다시 만난 인물도 사회적 사건을 몸 안에 품고 있다. 다만 호석의 시간은 ‘박하사탕’처럼 거꾸로 돌아가지 않는다. 과거를 품은 채 현재의 가족과 계속 살아야 한다.
설경구와 이창동 감독이 장편영화에서 다시 만난 것은 ‘오아시스’ 이후 24년 만이다. 두 사람은 2022년 단편 ‘심장소리’에서도 함께 작업했지만 장편으로는 오랜 간격이 있었다. 설경구는 ‘가능한 사랑’ 출연 제안을 받았을 때 이창동 감독과 작업한다는 사실만으로 좋았고 시나리오를 바로 달라고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후 대본을 읽으면서 ‘박하사탕’을 시작할 때와 비슷한 긴장을 느꼈다는 설명도 내놨다.
24년 전과 달라진 것은 배우와 감독 사이의 관계다. 이창동 감독은 전도연·설경구와 과거 작업할 때에는 감독과 배우 사이의 긴장이 있었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친구나 가족처럼 가까워졌고 현장의 분위기도 한층 부드러워졌다고 말했다. 십여 년 전 해고 노동자를 다루는 다른 시나리오를 준비했을 당시에도 전도연과 설경구를 주연으로 생각했지만 작품을 접었다는 사실도 공개했다.
두 배우가 ‘가능한 사랑’에서 부부가 된 과정에는 그래서 실제 영화 경력의 시간도 겹친다. 전도연과 설경구는 이미 여러 작품에서 만났고, 이창동 감독과도 각각 오랜 작업의 역사가 있다. 배우가 감독의 연출 방식을 처음 탐색하는 단계가 아니라 서로가 어떤 방식으로 촬영하고 연기하는지 알고 있는 관계에서 출발했다.
영화 속 미옥과 호석은 반대로 상대를 잘 알고 있다고 믿어왔던 부부다. 오랜 결혼생활을 함께했고 해고라는 사건도 함께 통과했지만 두 사람이 느끼는 상처의 크기와 방향까지 같은 것은 아니다.
호석에게 노동은 잃어버린 자신의 일부다. 미옥에게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계속해야 하는 현재의 생활이다.
같은 집 안에서 한 사람은 지나간 일을 반복해서 품고 있고 다른 사람은 밖으로 나가 일하며 다음 날을 만든다. 두 배우의 차이는 미옥과 호석의 계급적 위치보다 부부 내부의 비대칭을 먼저 드러낸다.
설경구는 몸을 닫아 호석을 만들고, 전도연은 상대를 향해 조금씩 움직이며 미옥의 범위를 넓힌다. 호석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미옥의 생활은 더 넓어지고, 미옥이 다른 사람들과 가까워질수록 호석이 잃어버린 자리는 선명해진다.
부부를 바라보는 관객의 위치도 움직인다. 처음에는 해고 뒤 고통받는 남편과 가족을 지키는 아내라는 관계가 눈에 들어오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연민만으로 두 사람을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호석에게도 공격성과 자기연민이 있고, 미옥에게도 욕망과 계산, 타인에게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 감정이 있다.
‘가능한 사랑’이 노동자의 가족을 도덕적으로 이상화하지 않는 이유도 두 배우의 연기에서 드러난다. 경제적 약자라는 조건이 인물을 자동으로 선하게 만들지 않고, 부유한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만으로 곧바로 피해자로 바꾸지도 않는다.
두 배우가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에는 부부로 살아온 시간이 들어 있다. 대사가 없어도 상대의 행동을 이미 예상한다는 듯한 반응이 나오고, 큰 갈등 앞에서도 처음 만난 사람처럼 놀라기보다 오래 참아온 감정이 밀려나오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전도연과 설경구는 ‘가능한 사랑’ 이전에도 여러 차례 함께 출연했다. 2001년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2019년 ‘생일’, 2022년 단편 ‘심장소리’, 2023년 ‘길복순’, 2025년 ‘굿뉴스’를 거쳐 다시 한 작품에 이름을 올렸다. ‘심장소리’에서는 설경구가 목소리로 참여했고 ‘굿뉴스’에서는 전도연이 특별출연했다.
반복된 만남 자체보다 ‘가능한 사랑’에서 달라진 관계가 더 중요하다. 두 배우가 이번에는 사랑을 시작하는 남녀도, 사건을 함께 겪는 인물도 아닌 오래된 부부로 등장한다.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두 사람이 서로에게 말하지 않았던 욕망과 상처를 뒤늦게 마주한다.
해외 평론에서도 두 배우에게 무게가 실렸다. Screen Daily는 돈의 유무가 두 부부의 상호작용 전체를 규정한다고 분석하면서 호석의 해고와 미옥의 변화를 관계의 중요한 축으로 읽었다. IONCINEMA는 미옥과 호석이 잃을 것이 더 많은 인물들이기 때문에 전도연과 설경구의 연기가 작품의 정서적 중심을 형성한다고 평가했다.
베니스 공개 뒤 현지에서도 두 사람의 연기 이력은 반복해서 소환됐다. 전도연에게는 ‘밀양’, 설경구에게는 ‘박하사탕’과 ‘오아시스’가 비교점이 됐다. 과거 이창동 영화에서 대표적인 연기를 남겼던 두 배우가 다시 한 작품에서 부부가 됐다는 사실 때문이다.
하지만 ‘가능한 사랑’의 미옥과 호석을 과거 캐릭터의 연장으로 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전도연과 설경구가 다시 연기하는 것은 20여 년 전 인물들의 변형이 아니라 2026년의 노동과 가족, 계급 속에서 살아가는 중년 부부다.
미옥은 생활을 유지하는 능력을 가진 동시에 다른 삶을 원할 수 있는 사람이다. 호석은 노동자의 존엄을 지닌 동시에 상처 때문에 가족에게 부담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두 인물의 모순을 지우지 않는 연기가 영화의 계급 구도를 사람의 문제로 돌려놓는다.
이창동 감독은 베니스 수상 뒤 네 배우를 직접 언급하며 영화에 생명력을 준 전도연, 설경구, 조인성, 조여정에게 상의 공을 돌렸다. 전도연은 다음 이창동 영화가 궁금하다는 말로 수상을 축하했고, 설경구는 감독과 다시 작품을 함께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 감격했다고 밝혔다.
21일 국내 언론시사회에서 전도연은 뉴욕의 연극 ‘벚꽃동산’ 공연 일정 때문에 화상으로 기자간담회에 참여했다. 서울 포토월에는 이창동 감독과 설경구, 조인성, 조여정이 섰다. 국내 공개 자리에서도 전도연과 설경구의 긴 작업 역사는 자연스럽게 언급됐다.
‘가능한 사랑’에서 두 배우의 재회는 과거 대표작을 되풀이하는 방식으로 소비되지 않는다. 전도연은 ‘밀양’에서 한 개인이 견디기 어려운 상실을 통과했던 배우에서 가족의 생활을 붙잡으면서 자신의 욕망까지 바라보는 미옥으로 이동했다. 설경구는 ‘박하사탕’과 ‘오아시스’에서 사회와 충돌했던 청년을 지나 노동의 자리를 잃고 과거를 품은 중년의 호석으로 돌아왔다.
한 사람은 다시 바깥을 향하고, 다른 사람은 잃어버린 시간을 안고 멈춰 있다. 오래된 부부의 사랑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상태보다 서로 다른 속도로 살아가는 두 사람이 관계를 계속 이어가는 쪽에 가깝다.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국제장편부문 한국 출품작 선정 심사에서도 네 배우의 연기는 “완벽에 가까운” 호연으로 평가됐고, 인물과 관계의 다층성이 작품의 강점으로 언급됐다.
전도연과 설경구가 만들어낸 미옥과 호석도 한 문장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사랑하지만 지치고, 이해하면서도 원망하며, 함께 살아왔지만 같은 상처를 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고 이후 흔들린 한 가정에서 ‘가능한 사랑’이 붙잡는 것은 이상적인 부부의 형태보다 서로 다른 욕망과 상처를 가진 두 사람이 아직 같은 삶 안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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