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 하늘 아래 선 매와 거대한 원형, 솟구치는 빛과 고대 문양의 결합…1990년 회화에 집약된 중앙아시아의 자연과 신화적 상상력
[KtN 박준식기자]보랏빛 하늘 아래 매 한 마리가 높은 언덕에 앉아 있다. 검은 부리와 노란 눈, 붉은 가슴과 길게 내려오는 갈색 날개가 선명하다. 매의 오른쪽에서는 흰빛이 수직으로 솟구치고, 아래에는 붉은 뿔을 닮은 곡선과 노란색의 짧은 선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오른쪽의 커다란 분홍빛 원형은 검은 테두리와 노란 윤곽에 둘러싸여 있으며, 아래쪽에는 사다리처럼 이어지는 문양과 원형의 기호들이 놓여 있다.
키르기스스탄 화가 유리 스탄벡 쉬가예프(Yuristanbek Shygaev)의 1990년작 ‘매의 위엄(His Majesty Falcon)’은 자연의 생명체와 신화적 상상력이 하나의 공간에서 만나는 대형 회화다. 매는 실제 조류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지만 주변에는 빛의 기둥과 원형, 뿔을 닮은 형상, 기하학적 문양이 펼쳐진다. 쉬가예프는 매를 중심에 크게 그리는 대신 높은 곳에 앉힌 뒤 주변의 색채와 기호를 통해 존재감을 확장했다. 동물의 외형을 관찰하던 초기 작업에서 벗어나 자연의 생명체를 상징적 질서 안에 배치하는 회화적 변화가 뚜렷하다.
매는 캔버스 왼쪽 상단의 둥근 언덕에 앉아 있다. 머리에는 삼각형에 가까운 어두운 형태가 얹혀 있고, 노란 눈은 왼쪽을 향한다. 검은 부리는 아래로 굽었으며 목과 가슴에는 흰색과 붉은색, 청색이 겹쳐 있다. 날개와 꼬리는 짙은 갈색의 거친 붓질로 표현됐다. 가슴의 붉은색은 여러 개의 수평적인 색면으로 나뉘고, 길게 내려온 꼬리는 언덕의 곡선을 따라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다.
새의 몸에는 실제 매의 특징과 장식적인 색채가 함께 나타난다. 머리와 부리, 눈의 형태는 맹금류의 특징을 드러내고, 가슴을 가로지르는 붉은색과 청색의 배열은 하나의 문양처럼 구성됐다. 날개에는 짧고 거친 선들이 겹쳐져 깃털의 질감을 만들지만, 몸 전체의 비례는 세밀한 자연 관찰보다 강한 윤곽과 색채의 대비를 중심으로 정리됐다. 매의 존재는 개별적인 깃털의 묘사보다 굽은 부리와 노란 눈, 곧게 세운 자세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매가 앉은 언덕은 청록색과 회녹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둥글게 솟은 지형 아래에는 검은색과 노란색의 짧은 선, 흰색의 긁힌 흔적이 밀집한다. 언덕의 표면에는 작은 원과 불규칙한 무늬가 흩어져 있어 단순한 자연 풍경과는 다른 질감을 만든다. 높은 곳에 앉은 매의 모습은 안정적이지만 언덕 아래로 내려갈수록 선과 색채의 움직임이 복잡해진다.
캔버스 상단의 보라색은 매의 윤곽을 강조한다. 왼쪽의 짙은 보라색은 새의 머리와 날개를 또렷하게 드러내고, 오른쪽에서는 청색과 황갈색의 넓은 곡선이 겹쳐진다. 상단 오른쪽의 푸른 곡선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나 지형의 윤곽을 연상시키면서도 일정한 자연의 형태로 정리되지 않는다. 색채의 큰 움직임이 매의 정적인 자세와 대비를 이룬다.
작품 중앙에는 흰색과 연한 청색의 거대한 세로 형태가 자리한다. 상단에서 넓게 시작한 밝은 부분은 아래로 내려오면서 좁아지고, 중심부에는 노란색의 짧은 선들이 촘촘하게 모인다. 보랏빛 공간을 가르는 밝은 색채는 작품의 가장 강한 수직축이다. 매가 앉은 언덕과 오른쪽의 분홍빛 형상 사이에 놓여 서로 다른 영역을 나누면서도 아래쪽의 붉은 곡선과 연결된다.
흰색의 세로 형태는 빛의 기둥이나 솟구치는 물줄기를 떠올리게 한다. 주변의 보라색과 청색이 어두운 만큼 밝은 색채의 대비가 더욱 강하다. 특히 중앙에 집중된 노란색의 짧은 선들은 위아래로 반복되면서 빛이 흘러내리거나 솟아오르는 듯한 움직임을 만든다. 쉬가예프는 넓은 색면과 짧은 선을 함께 사용해 작품 중앙에 강한 상승과 하강의 리듬을 형성했다.
빛의 기둥 아래에는 붉은 뿔을 닮은 곡선이 놓여 있다. 좌우로 벌어진 붉은 선은 중앙의 노란색과 맞물리고, 그 아래로 여러 개의 짧은 곡선과 가느다란 선이 이어진다. 동물의 뿔이나 머리 장식을 연상시키는 형태는 주변의 기호들과 결합하면서 작품의 중심부에 독특한 상징적 구조를 만든다.
쉬가예프의 회화에서 동물의 신체와 기호가 결합하는 방식은 1987년 ‘납치’에서도 나타났다. 당시에는 붉은 짐승의 몸과 바퀴, 원형과 검은 곡선이 길게 이어지며 서로 다른 형태를 하나의 구조로 연결했다. ‘매의 위엄’에서는 동물의 모습이 매의 형상으로 또렷하게 남아 있는 가운데 주변에 뿔을 닮은 곡선과 원형, 반복적인 문양이 배치된다. 생명체와 기호를 결합하는 관심이 이어지면서도 매의 독립적인 존재감은 더욱 강조됐다.
오른쪽의 커다란 분홍빛 원형은 매와 함께 작품의 중심을 이룬다. 연한 분홍색의 내부에는 부드러운 붓질이 남아 있고 바깥쪽에는 밝은 노란색의 윤곽이 둘러져 있다. 원형의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검은색의 굵은 곡선이 이어지며 작은 기호들이 반복된다. 분홍빛 원형 뒤에는 붉은색과 자주색의 넓은 형태가 놓여 있어 밝은 중심부와 강한 대비를 만든다.
분홍빛 원형은 태양이나 달, 거대한 천체를 연상시킨다. 다만 작품에서는 실제 천체의 위치나 크기를 따르는 대신 원형 자체의 조형적 성격이 강조된다. 밝은 중심과 노란 윤곽, 검은 테두리의 관계가 원형을 하나의 독립적인 상징처럼 만든다. 주변의 붉은색과 보라색이 원형을 감싸면서 작품 오른쪽에 또 하나의 강한 시각적 중심이 형성된다.
원형의 위쪽에는 붉은 산처럼 솟은 형태가 펼쳐져 있다. 분홍색과 자주색의 넓은 면 위에 녹색의 작은 점들이 흩어져 있고, 노란 곡선이 아래에서 위로 길게 이어진다. 언덕이나 산의 윤곽을 떠올리게 하는 색면과 식물의 줄기처럼 뻗은 곡선이 결합한 구성이다. 왼쪽의 청록색 언덕과 오른쪽의 붉은 지형이 서로 다른 색채로 대응하면서 매와 원형의 위치를 받쳐준다.
매가 앉은 왼쪽의 언덕은 차가운 청록색이고 오른쪽의 넓은 지형은 따뜻한 분홍색과 자주색이다. 두 영역 사이에는 흰색과 노란색의 수직 형태가 자리한다. 차가운 색과 따뜻한 색, 정적인 새와 밝은 원형, 수평적인 지형과 수직으로 솟는 빛이 서로 맞물리면서 작품의 큰 구도가 완성된다.
캔버스 아래쪽에는 기호와 문양이 더욱 밀집한다. 왼쪽에는 검은색의 세로형 구조 안에 짧은 가로선과 작은 도형이 반복되고, 중앙에는 노란 테두리로 둘러싸인 원형이 놓여 있다. 원형 안에는 짙은 청색과 붉은색이 겹쳐 있으며 내부의 작은 형상은 여러 방향으로 갈라진다. 오른쪽 아래에는 검은색과 녹색의 곡선이 사선으로 이어지고, 짧은 청색 선들이 반복되면서 사다리나 직물의 문양을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기호들은 자연의 형상과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구성한다. 매와 언덕은 비교적 구체적인 모습을 갖지만 아래쪽의 원형과 세로선, 반복적인 문양은 독립적인 기하학적 구조로 나타난다. 자연에서 관찰한 형태와 오래된 문양을 연상시키는 선들이 한 캔버스에 놓이면서 쉬가예프 특유의 복합적인 조형언어가 형성된다.
키르기스스탄의 전통문화에서 매와 독수리 같은 맹금류는 자연과 인간의 생활을 연결하는 중요한 동물이었다. 중앙아시아의 매사냥 문화는 인간이 맹금류와 관계를 맺어온 오랜 생활의 한 부분이며, 맹금류는 예술과 민속문화에서도 다양한 형상으로 등장한다. 쉬가예프는 이러한 문화적 배경과 연결되는 매를 높은 곳에 배치하고 주변에 빛과 원형, 기호를 더해 자연의 생명체를 상징적인 존재로 확장했다.
작품 제목인 ‘매의 위엄’ 역시 매의 위치와 자세를 읽는 중요한 단서다. 매는 캔버스 전체에서 가장 큰 형상이 아니지만 가장 높은 곳에 뚜렷한 모습으로 자리한다. 노란 눈과 굽은 부리, 곧게 세운 몸이 강한 존재감을 만들고, 주변의 밝은 색채와 기호들이 매의 위치를 더욱 강조한다. 거대한 분홍빛 원형과 솟구치는 빛이 함께 등장하는 가운데 매는 작품의 상단에서 전체 구성을 내려다보는 듯한 자세를 유지한다.
쉬가예프는 초기 판화에서 사람과 동물의 구체적인 모습을 관찰했다. 1984년 ‘아산바이 아타’에서는 노인의 얼굴과 수염, 눈매를 세밀하게 새겼고, 1986년 ‘비둘기를 든 소녀’에서는 소녀와 말, 비둘기를 함께 배치했다. 사람과 동물은 현실의 생활공간 안에서 서로 관계를 맺었다.
1986년 유화 ‘수중 세계’에서는 물고기와 수초가 짙푸른 공간에 놓이면서 자연의 형상이 자유로운 색채와 결합하기 시작했다. 물고기의 몸은 비교적 분명하게 남아 있었지만 주변의 물과 식물은 거친 붓질과 작은 기호로 구성됐다. 1987년 ‘납치’에서는 붉은 짐승의 신체가 길게 늘어나고 기계와 기호를 연상시키는 형상들이 결합했다. 1989년 ‘호숫가’에서는 자연의 형상이 붉은 덩어리와 청록색의 작은 형태, 원형과 십자형의 기호로 재구성됐다.
1990년 ‘매의 위엄’에서는 동물의 구체적인 형태와 신화적 상상력이 더욱 분명한 관계를 맺는다. 매의 머리와 날개, 꼬리는 알아볼 수 있는 모습으로 남아 있고 주변에는 빛의 기둥과 원형, 뿔을 닮은 곡선, 반복적인 문양이 펼쳐진다. 현실의 생명체와 상징적인 형상들이 서로 다른 성격을 유지하면서도 하나의 질서를 이룬다.
쉬가예프의 색채 역시 이러한 변화를 뒷받침한다. 보라색은 작품의 넓은 공간을 이루고 청록색은 매가 앉은 언덕을 구성한다. 분홍색과 자주색은 오른쪽의 지형과 거대한 원형을 만들며 노란색은 빛의 기둥과 원형의 윤곽, 아래쪽의 작은 기호들에 반복된다. 붉은색은 매의 가슴과 중앙의 곡선, 오른쪽의 지형에 흩어져 서로 다른 형상들을 연결한다.
특히 노란색은 작품의 여러 영역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매의 눈과 중앙의 빛, 분홍빛 원형의 테두리, 하단의 작은 원형에 같은 색이 반복된다. 노란색이 서로 떨어진 형상들을 연결하면서 작품 전체에 일정한 리듬을 만든다. 붉은색 역시 매의 몸과 중앙의 뿔 모양, 오른쪽의 지형에 나타나며 색채의 관계를 넓힌다.
대형 캔버스의 세로형 구성은 매의 위치와 빛의 흐름을 강조한다. 상단 왼쪽의 매와 오른쪽의 거대한 원형은 서로 다른 높이에 놓여 있고, 중앙의 흰색과 노란색은 위에서 아래로 길게 이어진다. 아래쪽의 세로형 문양과 원형 기호는 이러한 수직적인 움직임을 받쳐준다. 관람자의 시선은 매에서 중앙의 빛으로 이동한 뒤 오른쪽의 원형과 아래쪽의 문양을 따라 움직인다.
매의 머리 위에 얹힌 삼각형의 어두운 형태도 눈에 띈다. 단순한 윤곽으로 표현된 형태는 새의 머리와 결합하면서 장식적인 인상을 더한다. 가슴의 붉은색과 청색, 날개의 거친 갈색이 함께 사용돼 자연의 동물이면서 상징적 성격을 지닌 존재로 표현됐다. 작품 제목의 ‘위엄’은 이러한 자세와 색채의 결합에서 구체적인 형상을 얻는다.
캔버스 중앙의 빛과 오른쪽의 분홍빛 원형은 매의 존재를 둘러싼 공간을 확장한다. 밝은 수직 형태는 상단의 보라색을 가르고 아래쪽의 붉은 곡선과 연결된다. 오른쪽의 원형은 넓은 분홍색 면과 노란 테두리로 강조되며 주변의 검은 곡선과 작은 기호를 받아들인다. 매와 빛, 원형이 서로 다른 위치에서 강한 시각적 중심을 형성하면서 작품 전체에 복합적인 질서가 만들어진다.
쉬가예프의 회화에서 신화적 상상력은 동물의 외형을 낯설게 바꾸는 데서 출발해 자연의 생명체와 기호, 색채를 하나의 공간에 결합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매의 위엄’은 이러한 변화가 집약된 작품이다. 매는 높은 언덕 위에서 분명한 모습을 유지하고, 주변의 빛과 원형, 문양들은 독립적인 형상으로 펼쳐진다. 서로 다른 요소들이 색채와 선의 반복을 통해 연결되면서 자연의 동물이 상징적인 존재로 확장된다.
1990년의 ‘매의 위엄’에는 쉬가예프가 1980년대에 탐색했던 조형적 변화가 함께 남아 있다. 인물과 동물을 관찰하던 초기 판화의 구체적인 형태, ‘수중 세계’에서 나타난 강렬한 색채와 생명체의 관계, ‘납치’의 신체와 기호의 결합, ‘호숫가’의 원형과 추상적인 공간이 하나의 대형 캔버스에서 만난다. 매의 노란 눈과 굽은 부리, 붉은 가슴은 현실의 생명체를 붙잡고, 빛의 기둥과 거대한 원형, 반복적인 문양은 자연의 형상을 신화적 상상력의 영역으로 넓힌다.
높은 언덕에 앉은 매는 작품의 가장자리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중앙의 흰빛은 보랏빛 공간을 가르며 아래로 이어지고, 오른쪽의 분홍빛 원형은 노란 윤곽에 둘러싸여 강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아래쪽에는 원형과 수직선, 반복적인 기호들이 촘촘하게 배치돼 있다. 쉬가예프는 자연의 생명체와 오래된 문양을 연상시키는 형상, 강렬한 색채를 결합해 매를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회화의 세계를 완성했다. ‘매의 위엄’은 현실의 동물에서 출발한 형상이 신화적 상상력과 결합하며 쉬가예프의 조형언어가 한층 깊어졌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