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껍게 덧칠한 붉은색 아래 노랑·흰색 노출…긁힌 선과 거친 질감으로 구성한 추상회화
날짜가 남은 인쇄 이미지와 검은 문자·푸른색 선 결합…회화와 인쇄매체의 조형적 대비
[KtN 임민정기자]붉은 물감이 캔버스를 거칠게 뒤덮었다. 두껍게 쌓인 물감 사이로 노란색과 흰색이 드러나고, 중앙에는 날카로운 도구로 긁어낸 듯한 선들이 얽혀 있다. 오른쪽에는 검은 문자와 푸른색 선이 겹친 세로형 인쇄 이미지가 자리한다. 넓게 덧칠한 색채와 일부만 남은 문자가 서로 다른 질감을 만든다.
미국 뉴욕주 허드슨의 갤러리 조이(Galerie Zoë)에서 열리고 있는 라마 마요(Rama Mayo)의 첫 개인전 'Level 50'에 출품된 회화다. 물감을 반복해 덧바르고 긁어낸 흔적에 날짜와 문자가 남은 인쇄 이미지를 결합했다. 물감의 두께와 색채의 대비, 인쇄물의 배치가 작품의 구성을 결정한다.
캔버스 위쪽에는 짙은 붉은색이 두껍게 쌓여 있다. 중앙에서는 붉은 물감이 여러 방향으로 밀려나며 가느다란 선과 굴곡을 남겼다. 왼쪽과 아래쪽에는 노란색과 흰색이 불규칙하게 드러난다. 붉은색이 전체 면적을 차지하면서 밝은 색들이 부분적으로 끼어드는 구성이다.
색을 고르게 펴 바른 부분보다 덧칠과 긁힘이 반복된 부분이 두드러진다. 물감이 두껍게 남은 곳에서는 굴곡이 뚜렷하고, 얇게 퍼진 곳에서는 아래의 색상이 드러난다. 중앙을 가로지르는 긴 사선과 짧게 끊긴 자국들이 겹쳐 붓질의 방향과 표면의 깊이를 달리한다.
붉은색과 노란색은 강한 대비를 이루지만 사용된 면적은 다르다. 붉은색이 넓게 펼쳐진 가운데 노란색은 불규칙한 얼룩과 짧은 선으로 나타난다. 흰색은 두 색이 만나는 부분에서 밝기를 높인다. 색을 쌓고 걷어낸 흔적이 남아 있어 캔버스의 표면은 한 가지 색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오른쪽의 세로형 인쇄 이미지는 거친 붓질과 대조를 이룬다. 베이지색 바탕에 검은 글자와 푸른색 선이 남아 있고, 직사각형 가장자리에는 굵은 검은 윤곽이 이어진다. 일부 글자는 거꾸로 놓이거나 다른 선에 가려졌다.
인쇄 이미지에는 'Wednesday, January 28'이라는 날짜의 일부가 보인다. 날짜는 특정한 시점을 가리키지만, 주변 문자가 겹치고 지워져 원래의 내용을 온전히 읽을 수 없다.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글자가 회화에서는 검은 선과 형태로 남았다.
날짜와 문자가 남은 부분은 작품에 구체적인 시간의 흔적을 더한다. 인쇄매체에 기록된 시간과 물감을 덧바르고 긁어내며 쌓인 흔적이 한 캔버스에 놓였다. 오른쪽 인쇄물은 일상의 기록을 떠올리게 하고, 붉은 채색은 제작 과정에서 생긴 물리적인 변화를 드러낸다.
글자를 읽는 방식도 달라졌다. 일반적인 인쇄물에서는 문자의 방향과 배열에 따라 내용을 파악하지만, 작품 속 글자는 뒤집히고 가려져 문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검은 글자의 굵기와 푸른 선의 방향, 베이지색 바탕과의 색상 차이가 강조된다.
붉은색이 넓게 퍼진 부분에는 불규칙한 곡선과 사선이 집중돼 있다. 인쇄 이미지는 좁고 긴 사각형 안에 문자와 선이 모여 있다. 서로 다른 표현 방식이 분명하게 구분되면서도 인쇄물의 검은 자국 일부가 붉은 채색과 맞닿아 전체 구성으로 이어진다.
인쇄물과 물감을 결합하는 작업은 20세기 현대미술에서도 널리 활용됐다.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와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는 신문과 인쇄된 종이를 회화에 도입했고, 로버트 라우션버그(Robert Rauschenberg)는 사진과 천, 일상용품을 물감과 결합했다. 이미 제작된 이미지를 회화의 재료로 활용하면서 문자와 사물의 원래 기능을 다른 조형적 관계로 옮겼다.
이번 작품에서도 날짜와 영문자가 남은 이미지는 원래의 정보 전달 기능보다 색상과 형태를 통해 읽힌다. 문자들은 서로 겹쳐지고, 푸른색 선은 글자 사이를 가로지른다. 인쇄물의 사각형 경계가 유지되는 가운데 내부의 정보는 부분적으로 가려졌다.
여러 차례 덧칠한 붉은 물감과 훼손된 듯한 인쇄물은 오래된 도시의 벽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광고와 포스터 위에 새로운 종이가 붙고, 페인트가 덧칠되며, 시간이 지나 일부가 벗겨지는 과정과 닮았다. 먼저 남겨진 색과 문자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자국 사이로 드러나는 모습이다.
작품의 붉은색 아래에는 노랑과 흰색이 남아 있고, 오른쪽 인쇄 이미지에는 검은 글자와 푸른 선이 겹쳐 있다. 색채의 중첩과 표면의 마모를 연상시키는 표현이 서로 다른 재료를 하나의 평면에 묶는다.
구성의 중심은 넓은 붉은색과 좁은 직사각형의 비율에 있다. 붉은 물감은 캔버스 가장자리까지 이어지고, 인쇄 이미지는 오른쪽에 수직으로 놓였다. 인쇄물의 검은 윤곽은 불규칙한 붓질 사이에서 형태를 구분하며, 그 내부에 집중된 푸른색이 전체 작품에 색채 변화를 더한다.
거리를 두고 작품을 바라보면 붉은색의 넓은 면적과 오른쪽의 검은 윤곽이 먼저 구별된다. 가까이에서는 물감이 쌓인 굴곡과 긁힌 자국, 희미한 날짜와 뒤집힌 문자가 드러난다. 붓질의 흔적과 인쇄 이미지의 세부 요소가 관람 거리에 따라 다른 비중을 차지한다.
'Level 50'에는 오래된 게임과 장난감, 스케이트보드 잡지 등 대중문화의 물건과 이미지를 활용한 작품들이 함께 출품됐다. 마요가 제작한 'HUF Forever'는 1997년 스케이트보드 잡지 '트래셔(Thrasher)'의 표지를 재구성한 회화다. 잡지의 제호와 인물, 배경색을 유지하면서 기존 이미지를 다른 작품으로 옮겼다.
붉은 회화에서는 특정 인물이나 사건의 묘사보다 색채와 인쇄물의 흔적이 강조된다. 인쇄 이미지를 활용했다는 점에서는 'HUF Forever'와 연결되지만, 익숙한 대중문화의 형상을 알아보는 방식보다 문자와 물감의 조형적 관계가 두드러진다.
날짜와 문자의 일부가 남은 직사각형은 붉은 물감과 함께 작품의 중심을 이룬다. 인쇄된 기록과 덧칠한 색채가 겹치면서 이전의 흔적이 일부 가려지고 다시 드러난다. 물감의 두께와 긁힘, 검은 문자와 푸른 선의 배치가 작품에 서로 다른 시간과 제작 방식의 흔적을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