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레이 가와쿠보가 창간한 실험적 매거진, 런던·파리·도쿄에서 다시 공개…사진과 미술을 결합한 편집의 역사, 디지털 시대의 독자·저작권·편집 독립성

꼼데가르송의 비주얼 매거진 '식스' 1990년 제5호. 왼쪽에는 검은 꽃술과 노란 꽃잎을 크게 확대한 이미지가 실렸으며, 오른쪽에는 티머시 그린필드샌더스(Timothy Greenfield-Sanders)가 촬영한 이탈리아 미술가 엔초 쿠키(Enzo Cucchi)의 초상이 소개됐다. 사진=COMME des GARÇONS, Six No.5(1990)
꼼데가르송의 비주얼 매거진 '식스' 1990년 제5호. 왼쪽에는 검은 꽃술과 노란 꽃잎을 크게 확대한 이미지가 실렸으며, 오른쪽에는 티머시 그린필드샌더스(Timothy Greenfield-Sanders)가 촬영한 이탈리아 미술가 엔초 쿠키(Enzo Cucchi)의 초상이 소개됐다. 사진=COMME des GARÇONS, Six No.5(1990)

[KtN 최유식기자]런던 도버 스트리트 마켓(Dover Street Market)의 쇼윈도에 35년 전 패션잡지의 사진들이 대형 설치물로 등장했다. 일본 디자이너 레이 가와쿠보(Rei Kawakubo)가 1988년 창간한 '식스(Six)'의 지면이다. 도쿄 아오야마의 꼼데가르송(COMME des GARÇONS) 매장과 파리 도버 스트리트 마켓에서도 오래된 사진과 그래픽을 건축물에 적용한 전시가 마련됐다. 과거 표지 여섯 개와 지면 일부에 현대 사진가의 작품을 더한 인쇄물도 제작돼 일부 고객에게 우편으로 전달됐다.

1991년 발행을 중단했던 '식스'가 35년 만에 돌아왔다. 꼼데가르송은 런던에서 열리는 국제 미술행사 프리즈(Frieze)에 맞춰 인쇄물과 설치 전시를 공개하고, 옛 잡지의 이미지를 사용한 티셔츠 12종도 선보였다. 인쇄물을 직접 전달받는 고객과 매장을 찾는 방문객, 의류를 구매하는 소비자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식스'를 접하는 구성이다.

1988년부터 1991년까지 모두 여덟 차례 발행된 '식스'는 패션잡지에 관한 기존의 관념을 바꾼 출판물이었다. 당시 패션매체들이 새 시즌의 의상과 모델, 디자이너와 유행을 중심으로 지면을 구성하던 시절, 가와쿠보는 사진과 미술, 건축과 영화에 넓은 공간을 내줬다. 꼼데가르송의 옷은 일부 지면에만 등장했다. 브랜드가 제작한 잡지에 상품보다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이 더 많이 실린 것이다.

'식스'라는 이름은 인간의 다섯 가지 감각을 넘어서는 제6의 감각에서 가져왔다. 언어로 모두 설명하기 어려운 직관과 감각을 사진과 이미지의 배열로 표현하려는 구상이었다. 약 40×30cm의 대형 판형에 인쇄된 사진들은 일반적인 패션잡지보다 크게 펼쳐졌고, 초기에는 낱장을 넘기거나 순서를 달리하며 볼 수 있도록 제본하지 않은 형식도 사용했다.

아트디렉션은 일본 그래픽 디자이너 이노우에 쓰구야(Tsuguya Inoue)가 맡았다. 가와쿠보와 편집자 고자스 아쓰코(Atsuko Kozasu)는 글과 사진의 비중, 작품이 놓이는 순서를 조정하며 잡지의 성격을 만들었다. 독자는 지면에 실린 상품명과 가격을 따라가기보다 서로 다른 사진과 그림을 넘겨 보며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접했다.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와 앙드레 케르테스(André Kertész), 피터 린드버그(Peter Lindbergh)의 사진이 등장했고, 길버트와 조지(Gilbert & George)의 미술과 아일린 그레이(Eileen Gray)의 건축·디자인도 함께 다뤄졌다. 장 콕토(Jean Cocteau)의 작품처럼 패션과 직접 관련되지 않은 이미지도 지면을 채웠다.

사진과 건축, 회화의 시대적 배경은 서로 달랐지만 하나의 잡지에 실리면서 새로운 관계를 맺었다. 패션을 옷의 형태와 유행에 한정하지 않고 동시대의 시각문화와 연결하는 편집이었다.

꼼데가르송의 비주얼 매거진 '식스' 1990년 제5호. 왼쪽에는 검은 꽃술과 노란 꽃잎을 크게 확대한 이미지가 실렸으며, 오른쪽에는 티머시 그린필드샌더스(Timothy Greenfield-Sanders)가 촬영한 이탈리아 미술가 엔초 쿠키(Enzo Cucchi)의 초상이 소개됐다. 사진=COMME des GARÇONS, Six No.5(1990)
꼼데가르송의 비주얼 매거진 '식스' 1990년 제5호. 왼쪽에는 검은 꽃술과 노란 꽃잎을 크게 확대한 이미지가 실렸으며, 오른쪽에는 티머시 그린필드샌더스(Timothy Greenfield-Sanders)가 촬영한 이탈리아 미술가 엔초 쿠키(Enzo Cucchi)의 초상이 소개됐다. 사진=COMME des GARÇONS, Six No.5(1990)

1990년 제5호의 노란 꽃은 잡지의 실험적인 편집을 보여주는 이미지다. 검은 꽃술 주변으로 노란 꽃잎이 크게 펼쳐지고, 인쇄 과정에서 형성된 작은 망점들이 표면 전체에 드러난다. 꽃의 세부적인 형태를 정교하게 재현하기보다 확대와 인쇄 질감을 이용해 강한 색채와 형태를 만들었다.

엔초 쿠키의 흑백 초상은 노란 꽃과 전혀 다른 인상을 남긴다. 인물의 얼굴과 손 주변으로 여러 겹의 무늬가 겹쳐지며, 피부와 배경의 질감이 뒤섞여 있다. 꽃의 선명한 색상과 미술가의 흑백 초상은 소재가 다르지만 거친 인쇄 질감과 강한 대비를 공유한다.

쿠키는 1970년대 말 등장한 이탈리아 트랜스아방가르디아(Transavanguardia)를 대표하는 작가로, 회화와 드로잉, 조각을 통해 인체와 동물, 자연의 상징을 다뤘다. '식스'는 당대 현대미술가의 초상을 패션 브랜드의 상품과 함께 소개하면서 미술과 사진의 표현을 출판물 안에 끌어들였다.

인쇄된 이미지의 크기와 질감은 잡지를 읽는 속도에도 영향을 줬다. 짧은 설명을 읽고 다음 사진으로 넘어가는 방식보다 한 장의 이미지를 오래 바라보도록 구성했다. 꽃의 색채와 미술가의 표정, 작품의 앞뒤 순서를 통해 독자가 스스로 연결을 만들어 가도록 한 편집이었다.

꼼데가르송의 패션 역시 당시 익숙했던 여성복의 형태와 다른 방향을 추구했다. 가와쿠보는 1981년 파리에서 첫 컬렉션을 발표한 뒤 비대칭 재단과 검은색, 해체적인 실루엣을 중심으로 몸과 의복의 관계를 새롭게 다뤘다. 단정하게 몸을 감싸거나 정해진 비례를 강조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원단의 부피와 빈 공간, 의복의 구조를 실험했다.

'식스'에서는 의상을 직접 설명하는 대신 가와쿠보가 관심을 두었던 사진과 미술, 건축의 세계가 펼쳐졌다. 브랜드의 미적 취향이 다른 분야의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으로 작용했고, 독자는 옷과 관련되지 않은 이미지에서도 꼼데가르송이 구축한 시각적 특징을 접했다.

1988년의 '식스'는 꼼데가르송이 제작비를 부담하고 고객과 패션업계 관계자들에게 무료로 배포한 간행물이었다. 독립 언론사에서 발행한 정기간행물과는 출발부터 다른 성격이었다. 가와쿠보가 선택한 예술가와 사진가의 작품은 브랜드의 미적 세계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고, 상품을 직접 소개하지 않는 편집도 꼼데가르송을 다른 패션기업과 구분하는 방식으로 활용됐다.

상업적인 목적과 편집의 실험이 하나의 출판물 안에 들어 있었다. 브랜드의 이름으로 발행했지만 판매할 의상과 제품 정보를 최소화했고, 독자가 예상하지 못한 작품을 지면에 배치했다. 가와쿠보가 패션을 통해 구축한 미적 취향을 인쇄물로 확장하는 작업이었다.

2026년의 복간에도 이러한 제작 방식이 이어졌다. 가와쿠보는 과거 여덟 권에서 가져온 표지와 사진, 현대 사진가 잭 데이비슨(Jack Davison)과 플로르 가르두뇨(Flor Garduño) 등의 작업을 직접 골랐다. 옛 지면과 새 작품을 하나의 인쇄물에 묶고, 일부 고객에게 우편으로 전달했다.

꼼데가르송의 비주얼 매거진 '식스' 1990년 제5호. 왼쪽에는 검은 꽃술과 노란 꽃잎을 크게 확대한 이미지가 실렸으며, 오른쪽에는 티머시 그린필드샌더스(Timothy Greenfield-Sanders)가 촬영한 이탈리아 미술가 엔초 쿠키(Enzo Cucchi)의 초상이 소개됐다. 사진=COMME des GARÇONS, Six No.5(1990)
꼼데가르송의 비주얼 매거진 '식스' 1990년 제5호. 왼쪽에는 검은 꽃술과 노란 꽃잎을 크게 확대한 이미지가 실렸으며, 오른쪽에는 티머시 그린필드샌더스(Timothy Greenfield-Sanders)가 촬영한 이탈리아 미술가 엔초 쿠키(Enzo Cucchi)의 초상이 소개됐다. 사진=COMME des GARÇONS, Six No.5(1990)

도쿄와 파리, 런던에서 진행된 설치 전시는 인쇄물을 공간으로 옮겼다. 도쿄 아오야마 매장에서는 기둥을 따라 흑백 이미지가 이어졌고, 파리에서는 안뜰의 원통형 구조물에 과거 지면을 적용했다. 런던 헤이마켓의 도버 스트리트 마켓에서는 쇼윈도와 매장 내부를 활용해 사진과 그래픽을 크게 펼쳤다. 런던 전시는 지난 13일 시작돼 11월 13일까지 이어진다.

옛 지면을 건축물에 적용하면서 작품의 크기와 관람 방식도 달라졌다. 40cm 안팎의 종이에 인쇄됐던 이미지는 건물의 창문과 기둥을 감싸는 형태로 확대됐다. 인쇄물을 손으로 넘기던 독자는 이제 매장 안을 이동하며 이미지를 접한다. 책의 지면을 바꾼 편집이 공간의 형태에 맞춘 전시로 이어진 것이다.

옛 '식스'의 이미지를 인쇄한 티셔츠 12종도 함께 공개됐다. 과거의 출판물을 다시 소개하는 데서 나아가 오래된 이미지가 현재 판매하는 의류의 디자인으로 사용됐다. 잡지를 통해 형성했던 브랜드의 문화적 기록이 매장 전시와 상품에 다시 등장하면서 꼼데가르송의 아카이브가 새로운 유통 경로를 갖게 됐다.

35년 전에는 옷을 거의 싣지 않은 잡지가 브랜드의 이미지를 전달했다. 2026년에는 잡지에 실렸던 사진과 그래픽이 다시 옷과 매장으로 돌아왔다. 과거의 편집 실험이 시간이 흐른 뒤 브랜드의 문화적 자산으로 활용되는 변화다.

선별된 고객에게 보내는 우편물도 꼼데가르송의 고객 관리 방식과 연결된다. 일반 서점이나 온라인 매체에 널리 유통하는 정기간행물과 달리 브랜드가 선택한 소비자에게 별도의 인쇄 경험을 제공했다. 발행부수와 접근 범위가 제한된 인쇄물은 오랜 고객과 브랜드 사이의 관계를 유지하는 수단으로도 사용된다.

오래된 '식스'는 현재 전문 서점과 패션 아카이브 시장에서 수집품으로 거래된다. 종이의 상태와 발행 시기, 여덟 권의 완질 여부에 따라 판매 조건이 달라진다. 처음에는 고객에게 무료로 전달됐던 간행물이 수십 년 뒤 브랜드의 출판 역사를 보여주는 소장품이 된 것이다.

책의 내용과 함께 발행 당시의 인쇄 방식, 보존 상태, 희소성이 거래 가치에 영향을 미친다. 패션 브랜드의 출판물도 의상과 마찬가지로 오래된 기록을 수집하는 시장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이번 복간은 과거의 정기 발행을 그대로 재개하는 방식보다 아카이브를 새로운 매체에 적용하는 데 집중했다. 인쇄물과 전시, 티셔츠가 함께 공개됐고, 우편으로 전달된 지면은 선택된 고객을 대상으로 했다. 출판과 전시, 상품 판매가 하나의 기획으로 운영됐다.

1988년의 '식스'가 패션잡지의 지면을 넓히는 작업이었다면 2026년의 프로젝트에서는 출판물이 브랜드의 역사와 상품, 고객을 연결하는 매개가 됐다. 동일한 이름의 잡지가 돌아왔지만 제작과 배포, 소비의 환경은 크게 달라졌다.

1988년에는 패션 컬렉션의 사진과 해외 미술가의 작품을 접하기 위해 잡지와 전시 도록, 사진집을 찾아야 했다. 해외에서 열린 패션쇼의 소식이 국내 독자에게 전달되기까지도 시간이 걸렸다. 인쇄매체의 편집자는 어떤 작품을 소개하고 어떤 정보를 지면에 배치할지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2026년의 독자는 브랜드의 공식 계정에서 컬렉션을 공개 당일 확인한다. 사진가와 미술가도 자신의 작품을 온라인에 직접 올리고, 전시장은 짧은 영상으로 내부를 소개한다. 패션매체와 브랜드, 개인 창작자가 비슷한 이미지를 동시에 유통하는 환경이다. 인쇄된 잡지 한 권을 기다리던 독자에게 정보와 사진을 얻을 수 있는 경로가 크게 늘어났다.

디지털 플랫폼의 확산은 이미지의 제작과 유통 속도도 바꿨다. 런웨이가 끝나기도 전에 사진과 영상이 공개되고, 유명인이 착용한 의상은 여러 매체에서 거의 동시에 소개된다. 브랜드의 공식 사진에 짧은 설명을 붙인 콘텐츠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서로 다른 매체에서도 비슷한 정보와 이미지가 반복된다.

잡지 편집의 가치가 달라지는 부분도 이러한 유통 환경과 맞닿아 있다. 새로운 사진을 먼저 확보하는 일과 함께 작품이 만들어진 시대와 배경, 작가의 작업 이력, 디자인과 문화의 관계를 설명하는 능력이 중요해졌다. 독자가 이미 접한 이미지에서도 새로운 사실과 해석을 발견할 수 있도록 기사와 사진을 구성하는 일이다.

'식스'의 초기 지면에서는 작품의 배열 자체가 중요한 표현이었다. 가와쿠보와 편집진은 서로 다른 미술가와 사진가의 이미지를 한데 모으고, 설명을 줄인 채 시각적인 관계를 강조했다. 이미지에 대한 접근이 지금보다 제한적이었던 시절, 뜻밖의 작품을 만나게 하는 편집은 그 자체로 독특한 경험을 제공했다.

오늘날에는 한 이미지의 출처와 제작 과정, 역사적 배경을 충분히 설명하는 편집도 필요하다. 과거의 사진 한 장을 다시 소개하더라도 촬영자와 촬영 시기, 당시의 사회문화적 환경까지 연결하면 독자가 접하는 정보의 깊이는 달라진다. 사진을 선택하는 능력에 작품을 해석하고 검증하는 전문성이 더해지는 것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의 확산은 이미지와 출판을 둘러싼 환경을 더욱 빠르게 바꾸고 있다. 새로운 사진과 그래픽을 만드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실제 촬영한 이미지와 합성한 이미지, 기존 작품을 가공한 결과물이 같은 온라인 공간에서 유통된다. 제작자의 이름과 작업 과정, 원본의 출처와 사용 권리가 출판의 신뢰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떠올랐다.

사진가가 촬영한 작품을 편집에 사용하려면 저작권과 이용 범위를 확인해야 한다. 오래된 이미지를 다시 인쇄하거나 상품에 적용할 때에도 권리 관계와 사용 조건이 따른다. 꼼데가르송의 이번 프로젝트처럼 과거 아카이브를 현대적인 전시와 상품으로 활용하는 활동이 늘어날수록 이미지의 보존과 관리, 정당한 이용이 출판산업의 주요한 영역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한국의 패션·문화매체도 비슷한 환경에 놓여 있다. 해외 패션쇼와 유명 브랜드의 전시, 작가의 신작이 공개되면 보도자료와 공식 사진이 여러 매체에 빠르게 전달된다. 국제적인 패션행사를 직접 취재하지 않더라도 브랜드가 제공한 이미지와 설명을 이용해 기사를 제작할 수 있다. 독자가 같은 사진과 비슷한 문장을 여러 곳에서 만나게 되는 배경이다.

해외 패션 브랜드가 발표한 디자인의 특징을 소개하는 기사와 작품을 비평하는 기사는 구성부터 달라야 한다. 새로운 컬렉션이 공개됐다는 사실을 전달하는 데에는 일정과 디자이너, 주요 의상에 관한 정확한 정보가 필요하다. 작품의 문화적 의미를 다루려면 재단과 소재, 이전 컬렉션과의 변화, 동시대 패션과의 관계를 살피는 작업이 더해져야 한다.

미술잡지에서도 전시 일정과 참여 작가를 소개하는 일에 더해 작품의 형식과 제작 과정, 미술사적 위치를 구체적으로 다루는 편집이 요구된다. 작가와 갤러리가 제공한 설명을 그대로 옮기는 방식으로는 작품에 대한 독립적인 평가를 충분히 전달하기 어렵다. 전시의 규모와 작가의 명성, 작품의 실제 성취를 구분하는 비평이 필요하다.

'식스'의 역사는 패션기업이 제작한 출판물에서도 높은 수준의 편집 실험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가와쿠보는 자사 의상을 반복해서 소개하는 대신 서로 다른 예술가의 작업을 선택했고, 이노우에는 대형 판형과 이미지의 배치로 잡지의 형식을 발전시켰다. 제작을 지원한 기업의 미적 방향이 편집에 강하게 반영됐지만 일반적인 제품 카탈로그와는 다른 출판물을 만들었다.

독립적인 문화매체가 수행하는 역할은 여기서 한층 넓어진다. 패션기업의 디자인과 문화적 시도를 소개하면서 제작 방식과 시장의 반응, 작품에 대한 비평도 함께 다룬다. 브랜드가 의도한 메시지와 실제 결과물 사이의 차이를 살피고, 기업의 사업 전략이 문화예술의 제작과 유통에 미치는 영향도 취재한다.

광고와 협찬은 잡지의 경제적 기반이지만 편집의 신뢰는 독자가 기사에 기대하는 기준이다. 광고주의 상품을 소개하는 지면과 독립적인 취재·비평 기사가 명확하게 구분될수록 독자는 매체의 판단을 신뢰할 수 있다. 광고 계약과 별개로 작품의 장점과 한계, 시장의 변화를 충실하게 설명하는 편집이 문화매체의 전문성을 뒷받침한다.

잡지의 독립성을 유지하려면 안정적인 제작 환경도 갖춰야 한다. 사진가에게 지급하는 사용료와 필진의 원고료, 취재비와 인쇄비가 지속적으로 확보돼야 한다. 광고와 구독, 도서 판매, 전시와 행사를 통한 수익이 각각 편집과 출판의 운영에 영향을 준다. 매체의 성격에 맞는 수익 구조를 마련하는 일이 결국 취재와 제작의 범위를 결정한다.

인쇄잡지는 종이와 제본, 판형을 통해 디지털 매체와 다른 독서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 독자는 한 권에 담긴 기사를 순서대로 읽고, 사진이 놓인 위치와 여백, 인쇄된 색과 질감을 직접 접한다. 책을 보관했다가 다시 꺼내 읽거나 특정한 사진과 기사를 비교하는 경험도 이어진다.

'식스'가 큰 판형과 낱장 형식을 사용했던 이유도 인쇄물을 하나의 표현 수단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사진의 크기를 바꾸고 여러 이미지를 서로 다른 순서로 배치하며 독자가 작품을 접하는 방법을 새롭게 구성했다. 편집의 형식 자체가 잡지의 성격을 결정했다.

오늘날의 디지털 잡지에도 이러한 편집의 여지는 남아 있다. 긴 기사와 사진, 영상과 원자료를 함께 제공하고 작품의 세부적인 특징을 확대해 보여줄 수 있다. 인쇄물에서는 분량 때문에 싣지 못했던 자료를 추가하거나 독자가 관련 작품을 함께 살펴보도록 구성하는 것도 가능하다. 매체의 형식에 맞는 편집을 발전시키는 일이 출판의 경쟁력과 연결된다.

독자와의 관계에서도 변화가 나타난다. 꼼데가르송은 '식스'의 새 인쇄물을 일부 고객에게만 전달했다. 제한적인 배포는 오랫동안 브랜드와 관계를 맺어 온 소비자에게 특별한 출판 경험을 제공한다. 매장을 방문한 사람들은 인쇄물 대신 확대된 사진과 설치물을 볼 수 있고, 티셔츠를 구매하는 소비자는 옛 이미지를 의류로 접한다.

문화잡지를 정기적으로 읽는 독자에게는 또 다른 방식의 관계가 형성된다. 매호 이어지는 취재와 비평, 사진가와 필자의 작업을 통해 독자는 매체가 축적하는 관점과 판단을 접한다. 특정한 브랜드의 고객 여부보다 기사와 작품에 대한 관심이 잡지와 독자를 연결한다.

한 번 공개한 이미지를 여러 채널에 반복해서 배포하는 일은 브랜드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유용하다. 반면 정기적인 문화매체의 경쟁력은 시간이 지나면서 쌓이는 기록에 있다. 한 시대의 패션과 미술, 사진과 건축을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고 해석했는지가 여러 권의 잡지와 기사에 남는다. 나중에는 당시의 사회문화와 예술을 연구하는 자료로도 활용된다.

꼼데가르송의 비주얼 매거진 '식스' 1990년 제5호. 왼쪽에는 검은 꽃술과 노란 꽃잎을 크게 확대한 이미지가 실렸으며, 오른쪽에는 티머시 그린필드샌더스(Timothy Greenfield-Sanders)가 촬영한 이탈리아 미술가 엔초 쿠키(Enzo Cucchi)의 초상이 소개됐다. 사진=COMME des GARÇONS, Six No.5(1990)
꼼데가르송의 비주얼 매거진 '식스' 1990년 제5호. 왼쪽에는 검은 꽃술과 노란 꽃잎을 크게 확대한 이미지가 실렸으며, 오른쪽에는 티머시 그린필드샌더스(Timothy Greenfield-Sanders)가 촬영한 이탈리아 미술가 엔초 쿠키(Enzo Cucchi)의 초상이 소개됐다. 사진=COMME des GARÇONS, Six No.5(1990)

1988년부터 1991년까지 발행된 여덟 권의 '식스'도 지금은 패션과 그래픽디자인의 역사를 살피는 아카이브가 됐다. 당시에는 새로운 이미지의 조합을 보여주는 출판물이었고, 35년이 흐른 뒤에는 가와쿠보와 편집진이 어떤 예술가의 작업을 선택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됐다. 종이에 남긴 편집의 흔적이 시간이 지나면서 별도의 문화적 가치를 얻은 것이다.

2026년 꼼데가르송이 선택한 복간 방식도 출판과 유통의 변화를 보여준다. 과거의 지면을 그대로 재인쇄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현대 사진가의 작품을 더해 새 인쇄물을 제작했다. 동시에 런던과 파리, 도쿄의 건축공간에 옛 이미지를 적용하고, 이를 의류의 디자인으로 활용했다. 한때 잡지에 실렸던 사진은 책과 전시, 상품을 오가는 이미지가 됐다.

인쇄물의 배포를 선택된 고객에게 한정한 점에서는 꼼데가르송 특유의 브랜드 운영 방식이 이어졌다. 동시에 작품을 직접 접할 수 있는 범위는 배포와 전시의 조건에 따라 달라졌다. 누구나 자료를 열람하고 연구할 수 있는 공공 아카이브와 브랜드가 고객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인쇄물 사이에는 유통 목적과 접근 방식의 차이가 있다.

'식스'가 지닌 역사적 의미는 가와쿠보의 이름이나 한정판의 희소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1988년의 편집진은 패션잡지의 지면에 사진과 현대미술, 건축과 영화를 배치했고, 상품을 전면에 내세우던 출판 관행에서 벗어난 구성을 선보였다. 여덟 권에 남은 이미지와 판형, 인쇄 방식은 당시 패션과 시각문화의 관계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1990년 제5호의 노란 꽃과 엔초 쿠키의 초상은 서로 다른 작품이 하나의 편집 안에서 관계를 맺었던 방식을 보여준다. 꽃의 색채와 인쇄된 망점, 인물의 얼굴을 덮은 무늬는 오늘날에도 뚜렷한 인상을 남긴다. 작품의 출처와 작가의 이력, 사진이 만들어진 시대를 함께 살펴보면 오래된 지면은 단순한 수집품을 넘어 미술과 출판의 역사를 전하는 자료가 된다.

꼼데가르송의 이번 복간은 11월 중순까지 이어지는 런던 설치 전시와 새 인쇄물, 한정판 의류를 통해 1988년의 편집을 다시 소개하고 있다. 사진과 미술을 한 권에 모으는 방식으로 출발했던 '식스'는 35년 뒤 건축과 상품, 고객을 연결하는 프로젝트로 돌아왔다. 이미지의 제작과 유통이 빨라진 오늘날 잡지의 가치는 한 시대의 작품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서로 다른 문화의 관계를 깊이 있게 해석하며, 독자에게 독립적인 판단을 제공하는 편집에서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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