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숲과 붉은 하늘, 푸른 설경에 남은 자연의 재구성
[KtN 박준식기자]박희열(Hee Yeol, Park)의 캔버스에서 자연은 실제 장소의 기록으로 머물지 않는다. 숲은 짙은 초록으로 밀집하고, 하늘은 붉거나 분홍빛으로 변하며, 눈 덮인 풍경은 푸른색의 정지감을 품는다. 연못과 바위, 집과 길, 인물과 새도 등장하지만 작품을 움직이는 감각은 바깥 풍경의 묘사보다 마음속에서 다시 정리된 기억의 이미지에 가깝다.
산과 숲, 들판과 물가, 설경은 한국 회화에서 오래 다뤄진 소재다. 박희열은 익숙한 자연 소재를 정밀한 사실 묘사로 붙잡기보다 색의 밀도와 구도의 압축으로 다시 세운다. 자연은 멀리 물러선 배경이 아니라 감정이 쌓이는 장소가 되고, 계절은 풍경 설명을 넘어 정서의 속도를 조절하는 장치가 된다. “눈으로 담은 풍경을 마음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작가의 문장은 작품의 조형 방식과 맞닿을 때 설득력을 얻는다.
‘The Mystery Nature’에는 붉은 태양과 초록 산, 풀숲이 맞물린다. 자연은 평온한 풍경보다 높은 온도의 에너지를 품은 공간으로 바뀐다. 산과 풀, 나무의 세부 경계보다 초록의 층과 붉은색의 압력이 먼저 다가온다. 지형의 정확성보다 색채가 만들어내는 감정의 농도가 작품의 성격을 결정한다. 박희열의 자연이 실제 풍경보다 기억의 파편처럼 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Winter Sapporo’는 다른 온도의 풍경을 만든다. 푸른 설경과 달빛은 움직임보다 정지를 앞세운다. 눈 덮인 자연은 비어 있는 공간처럼 남지 않고 청색 계열의 색으로 채워진다. 붉은 하늘의 작품들이 감정의 온도를 밀어 올린다면, ‘Winter Sapporo’는 낮은 온도의 고요로 풍경을 붙잡는다. 삿포로라는 지명보다 푸른색과 달빛이 만든 정서가 더 오래 남는다.
‘A Museum Pond’에서는 연못, 바위, 꽃, 수풀이 하나의 수변 구조를 이룬다. 물은 시선을 가라앉히고, 바위는 풍경의 무게를 붙잡는다. 꽃과 풀은 주변 장식으로 머물지 않고 초록의 반복 사이에서 작은 리듬을 만든다. 박희열의 자연은 거대한 산세나 숲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물가, 돌, 꽃, 풀처럼 작은 요소들이 모여 정서의 촘촘함을 만든다.
‘L 'appartment(Summer)’는 자연 속 인물과 새를 함께 배치한다. 초록 숲 앞에 붉은 드레스의 인물이 서 있고, 곁에는 붉은 새가 놓인다. 인물과 새는 자유와 소통의 이미지로 읽히기 쉽다. 색채 대비는 선명하고 상징도 빠르게 다가온다. 접근성은 높지만, 의미가 빨리 정리되는 만큼 해석의 여백이 줄어드는 지점도 있다. 박희열 회화의 장점과 검토 지점은 이런 직접성에서 함께 나온다.
박희열의 약력은 작품 바깥의 시간을 설명한다. 서울대학교를 거쳐 HK Group 이사회의 회장을 지냈고,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이사, JAE A Corporation 이사, 퀀텀디벨롭먼트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개인전 7회, 그룹전 42회의 전시 경력이 제시돼 있으며, 기업 사옥과 교육기관, 문화재단, 공관 등으로 이어지는 소장처도 알려져 있다. 다만 직함과 소장처가 회화의 성취를 대신 설명하지는 않는다. 작품의 설득력은 캔버스에 남은 색, 형태, 공간, 상징의 관계에서 갈린다.
한국 현대회화에서 자연은 오래된 소재다. 산수 전통, 서정적 풍경화, 표현적 색채 회화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연을 다뤄왔다. 박희열의 회화는 전통 산수의 여백이나 묵색의 질서와 거리를 둔다. 자연을 비워내기보다 색으로 채우고, 장소를 정밀하게 기록하기보다 감정의 농도로 다시 밀어 올린다. 대상의 윤곽은 알아볼 수 있게 남기지만, 풍경의 성격은 색과 붓질이 먼저 결정한다.
동시대 미술의 흐름에서 박희열 회화는 매체 실험을 전면에 세우는 작업과는 결이 다르다. 캔버스와 아크릴, 풍경과 인물, 상징적 소재를 기반으로 한다. 설치, 영상, 디지털 기반 작업처럼 회화의 경계를 흔드는 방식은 아니다. 대신 자연을 개인의 기억과 감정으로 옮기는 방식에서 현재적 독해가 가능하다. 오늘의 회화에서 풍경은 장소 묘사에만 머물지 않고, 정서와 회복, 고립과 귀향, 사유의 감각을 담는 공간으로 다시 읽힌다.
강한 색채는 작품을 빠르게 각인시키지만, 색의 선명함만으로 회화적 밀도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새, 길, 집처럼 의미가 빠르게 읽히는 대상은 관람자가 작품에 들어가는 통로가 되지만, 상징이 곧장 감정의 결론으로 이어질 때 해석의 폭은 좁아진다. 박희열 작품을 읽는 기준은 색채의 강도보다 색과 대상의 결합 방식, 상징의 직접성보다 구성 안에서 만들어지는 긴장에 놓여야 한다.
붉은 하늘과 초록 숲, 푸른 설경과 물가는 박희열 회화에서 반복되는 주요 어휘다. 반복은 작가의 방향을 드러내는 동시에 작품별 차이를 따져보게 만든다. 색채와 대상이 긴밀하게 맞물린 작품에서는 풍경이 기억의 이미지로 남고, 상징과 감정이 빠르게 결론으로 향하는 작품에서는 해석의 여백이 줄어든다. 박희열의 자연 회화는 자연을 얼마나 많이 그렸는지가 아니라, 자연을 색과 기억의 구조로 얼마나 설득력 있게 바꾸는가에서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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