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혼합매체 목재 작업, 규칙과 서정 사이에서 마티에르로 세운 우주관의 서사
[KtN 박준식기자]검은 목재 패널 위로 다섯 개의 원형이 세로로 놓였다. 폭은 좁고 길이는 길다. 시선은 좌우로 퍼지지 않고 위아래로 이동한다. 원형들은 같은 질서 안에 배열됐지만 표면의 농담, 빛의 반사, 질감은 모두 다르다. 위쪽 원형은 검은 표면 안에 은빛 결을 낮게 품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흰빛과 검정의 경계가 거칠게 드러난다. 임하나(Lim HaNa)의 2023년작 'SCORE:SONNET'은 평면 회화의 형식을 취하지만, 작품 앞에서 먼저 작동하는 것은 단순한 이미지 재현이 아니라 우주관의 배열이다.
'SCORE:SONNET'은 혼합매체를 목재 위에 올린 260x60x4cm 규모의 작업이다. 분류상 flat painting이지만, 작품의 감각은 평면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목재 패널의 두께와 원형 표면의 물성, 검은 바탕과 은빛 반사가 얇은 부조의 긴장을 만든다. 작품은 벽에 붙은 이미지라기보다 검은 수직면 위에 질서와 서정, 기록과 상처, 빛과 침묵을 세워놓은 구조에 가깝다.
작품명 'SCORE:SONNET'은 분석의 출발점이다. ‘SCORE’는 점수와 기록, 악보와 총보, 규칙과 질서를 함께 품는다. 세계를 수치화하고 배열하고 통제하려는 이성적 구조가 단어 안에 들어 있다. ‘SONNET’은 정형시다. 14행이라는 엄격한 형식을 갖지만, 내부를 채우는 것은 인간의 감정과 서정이다. 임하나는 두 단어를 한 작품명 안에 붙인다. 규칙과 서정, 구조와 감정, 기록과 노래가 검은 수직면 위에서 함께 움직인다.
검은 목재 패널은 단순한 바탕이 아니다. 나무는 자연에서 온 물질이지만, 작품 안에서는 잘린 판, 세워진 표면, 규격화된 지지체가 된다. 자연의 물성이 정형의 틀 안으로 들어온다. 목재 위에 놓인 원형들은 매끈한 장식이 아니라 표면에 남은 흔적처럼 보인다. ‘Score’가 품은 또 다른 감각, 재료 표면에 새겨진 자국과 칼금의 의미도 작품 안에서 살아난다. 긁히고 밀리고 쌓인 듯한 질감은 상처이면서 기록이고, 기록의 층은 하나의 시적 구조로 모인다.
세로로 긴 비례는 악보와 기둥을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 260cm의 길이는 관람자의 몸보다 길게 서고, 60cm의 폭은 시선을 한 줄로 모은다. 가로로 펼쳐지는 풍경이 아니라 위아래로 읽히는 구조다. 음악에서 score가 모든 파트를 품은 총보라면, sonnet은 엄격한 형식 안에서 울리는 작은 노래에 가깝다. 임하나는 거대한 우주의 질서와 개인의 서정을 한 작품 안에 겹쳐 놓는다. 다섯 원형은 천체처럼 떠 있지만, 동시에 음표처럼 놓이고, 시의 행처럼 이어진다.
검은 바탕은 우주적 공간에 가깝다. 검정은 빛을 흡수하고, 원형 표면에서 되돌아오는 은빛을 더 날카롭게 만든다. 어둠이 깊을수록 반사는 강해지고, 반사가 강해질수록 원형의 거친 표면은 또렷해진다. 검은 여백은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별과 행성 사이의 거리, 음과 음 사이의 쉼표, 시구와 시구 사이의 침묵처럼 작동한다. 'SCORE:SONNET'의 우주관은 바로 이 여백에서 만들어진다.
다섯 개의 원형은 달의 위상으로 먼저 다가온다. 짙은 검정과 은빛 반사가 만든 둥근 형상은 밤하늘의 천체처럼 검은 수직면 위에 떠 있다. 그러나 원형의 감각은 달의 외형에서 멈추지 않는다. 임하나의 'Tea Therapy'에서 파동이 물결과 산수의 능선, 지형의 윤곽처럼 열리듯, 'SCORE:SONNET'의 원형도 달의 이미지와 음악적 파동의 단편을 동시에 품는다. 달로 보이는 표면은 하나의 입구이고, 원형 내부의 질감은 그 입구 안에서 다시 움직이는 에너지다.
둥근 형상 안쪽에 쌓이고 밀린 혼합매체의 결은 정지된 천체가 아니라 진동하는 표면에 가깝다. 빛을 받는 지점마다 은빛 입자는 다른 방향으로 살아나고, 검은 부분은 다시 깊이로 물러난다. 표면의 마티에르는 단순한 질감 효과가 아니다. 회화 안에 운동성을 만드는 힘이다. 원형은 고정된 상징이 아니라 달, 파동, 음의 잔향, 내면의 에너지가 겹쳐지는 운동의 단위가 된다.
원형의 반복은 질서를 만들고, 표면의 차이는 서사를 만든다. 둥근 외곽은 안정적이지만 내부의 마티에르는 계속 움직인다. 은빛 부분은 물결처럼 일고, 검은 부분은 깊은 틈처럼 가라앉는다. 일부 표면은 빛을 부드럽게 받아들이고, 일부 표면은 긁히고 밀린 흔적을 남긴다. 완전한 원의 형식 안에 불완전한 파동이 들어오면서 작품은 정지된 달의 이미지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진동하는 세계처럼 다가온다.
'SCORE:SONNET'의 우주관은 거대한 천문학적 풍경이 아니다. 임하나의 우주는 외부의 별자리보다 내면의 질서에 가깝다. 검은 수직면 위에 놓인 원형들은 각각 다른 상태의 기억과 감정, 시간의 국면을 품는다. 밝아지는 표면,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표면, 거칠게 찢긴 듯한 경계, 빛을 반사하는 결은 서로 다른 장면을 만든다. 작품은 한순간의 이미지가 아니라 다섯 개의 국면이 이어지는 서사다.
‘SONNET’이라는 단어는 감정의 압축을 떠올리게 한다. 소네트는 엄격한 형식 속에서 감정을 다루는 시다. 임하나의 다섯 원형도 자유롭게 흩어지지 않는다. 좁고 긴 검은 목재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된다. 감정은 직접적으로 폭발하지 않고 원형의 표면에 눌려 있다. 은빛의 떨림, 검은 부분의 침잠, 거친 질감의 흔적이 정형의 틀 안에서 천천히 올라온다.
'SCORE:SONNET'은 세상의 엄격한 규칙 안에서 개인의 서정이 어떻게 남는지를 시각화한 작품으로 읽힌다. 점수와 기록, 총보와 질서의 세계가 검은 목재 패널의 수직 구조를 만들고, 소네트의 서정은 다섯 원형의 표면에서 빛과 질감으로 떠오른다. 규칙은 감정을 지우지 않는다. 정해진 형식 안에서 감정은 더 압축되고, 더 오래 남는다.
작품의 물질성은 제목의 의미를 다시 밀어 올린다. 목재 위에 혼합매체가 쌓이고, 원형 표면에는 빛을 받아내는 결이 생긴다. 표면은 매끈하게 마감된 장식보다 상처와 기록에 가깝다. 긁힌 듯한 흔적, 밀려난 듯한 질감, 검정과 은빛의 불규칙한 경계가 작품 안에 시간의 층을 만든다. ‘Score’가 규칙과 기록이라면, 원형 표면의 흔적은 삶이 재료 위에 남긴 점수이자 칼금이다. 그 자국들이 모여 ‘Sonnet’의 서정으로 바뀐다.
임하나 작업에서 검정은 어둠의 표현에 머물지 않는다. 검정은 빛을 붙잡기 위한 조건이고, 감각을 늦추는 장치다. 'SCORE:SONNET'의 검정은 이후 새장, 깃털, 둥지, 매듭 작업에서 반복되는 검정의 감각과 이어진다. 새장과 깃털의 검정이 닫힘과 이탈을 품었다면, 'SCORE:SONNET'의 검정은 침묵과 반사를 품는다. 어둠은 비어 있지 않고, 빛이 나타날 자리를 만든다.
은빛 표면은 물질의 흔적을 강하게 드러낸다. 매끈하게 칠해진 표면이 아니라 쌓이고 밀리고 긁힌 듯한 결이 남아 있다. 질감은 자연 풍경의 모사가 아니다. 물결, 지형, 달의 표면, 파장, 침식된 기억처럼 여러 감각을 동시에 부른다. 임하나의 후속 작업에서 파동이 컵과 용기 위로 이동하는 흐름을 떠올리면, 'SCORE:SONNET'의 원형 표면은 이미 보이지 않는 진동을 붙잡으려는 구조처럼 읽힌다.
작품의 세로성은 우주관의 서사를 더 분명하게 만든다. 가로 구조였다면 원형들은 풍경처럼 펼쳐졌을 가능성이 크다. 세로 패널 안에서는 각각의 원형이 하나의 장면, 하나의 음, 하나의 행처럼 읽힌다. 위에서 아래로 이어지는 배열은 시간의 흐름이 되고, 원형 사이의 검은 간격은 침묵의 구간이 된다. 작품은 천체의 위치를 기록한 지도처럼 보이면서도, 내면의 변화를 순서대로 적은 악보처럼 작동한다.
'SCORE:SONNET'은 임하나가 ‘Composer’로 불릴 수 있는 이유를 앞서 드러낸 작품이다. 임하나는 대상을 묘사하기보다 감각의 순서와 간격을 배열한다. 소리 없이 악보를 만들고, 문장 없이 시의 구조를 세우며, 원형과 여백으로 감정의 속도를 조율한다. 회화는 하나의 완성된 이미지가 아니라 음악적 시간과 시적 형식을 품은 구조가 된다.
2023년의 'SCORE:SONNET'은 이후 설치, 음악, 차, 파동 작업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작품이다. 회화는 이미 이 시기에 악보처럼 배열되고, 원형은 빛에 따라 변하며, 검은 여백은 침묵의 시간을 만든다. 'connect: MUSIC'에서 소리가 전시장 안으로 들어오고, 'Tea Therapy'에서 파동이 컵과 몸의 감각으로 이동하는 흐름은 'SCORE:SONNET'의 구조 안에서 먼저 예고돼 있다. 회화는 벽에 머물지만, 감각은 이미 음악과 시간의 방향으로 열려 있다.
'SCORE:SONNET'은 달의 이미지를 지우지 않는다. 오히려 달처럼 보이는 원형 안에 음악적 파동과 물질의 에너지를 함께 넣는다. 다섯 원형은 서로 다른 밝기와 질감으로 검은 바탕 위에 놓이고, 관람자의 시선은 원형 사이의 침묵을 따라 움직인다. 임하나는 회화를 설명의 장으로 만들지 않는다. 검정, 원형, 반사, 마티에르, 간격을 통해 세계가 배열되고 진동하는 방식을 만든다. 'SCORE:SONNET'은 임하나 작업에서 회화가 음악이 되고, 시가 되고, 우주관의 서사가 되는 순간을 담은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