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죽의 기억을 꽃과 미라클 베리로 변주한 크리스틴 나이젤의 신작…피에르 알렉시 뒤마의 창작 체계와 2026년 향수 시장의 변화

Hermès Redefines Its Modern Chypre With New Barénia Pleine Fleur Eau de Parfum. 사진=Richard Burbridge/Studio Des Fleurs,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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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N 박인경기자]에르메스가 2026년 8월 세계 부티크에 선보이는 ‘바레니아 플렌 플뢰르 오 드 퍼퓸(Barénia Pleine Fleur Eau de Parfum)’은 백합을 앞세운 플로럴 향수이면서, 에르메스가 2024년부터 구축해 온 현대 시프레(chypre)의 두 번째 해석이다. 조향사 크리스틴 나이젤(Christine Nagel)은 전작의 미라클 베리와 파촐리 구조를 유지한 채 백합과 오렌지 블로섬의 비중을 높였다. 플로럴 신작 한 병을 추가하는 데 머물지 않고 가죽·주얼리·향수를 하나의 조형 언어로 묶는 에르메스의 창작 방식도 함께 드러난다.

백합으로 옮긴 바레니아의 무게중심

‘바레니아’라는 이름은 에르메스의 가죽 유산에서 출발한다. 전작 바레니아 오 드 퍼퓸은 나비백합, 미라클 베리, 오크우드, 파촐리를 결합한 크리스틴 나이젤의 첫 에르메스 시프레였다. 나비백합의 가벼운 꽃향과 오크우드·파촐리의 건조한 바탕 사이에 미라클 베리의 과일 기운을 놓아, 전통적인 시프레보다 부드럽고 피부에 가까운 질감을 만들었다.

바레니아 플렌 플뢰르는 같은 구조의 중심을 백합 쪽으로 이동시켰다. 에르메스가 공식적으로 제시한 주요 원료는 백합, 오렌지 블로섬, 파촐리, 미라클 베리다. 공개된 출시 정보에는 볶은 오크우드에서 연상되는 럼 향과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지역의 가요 파촐리(Gayo patchouli), 말린 살구와 닮은 미라클 베리의 온기가 더 구체적으로 설명돼 있다. 전작의 목질적인 골격 위로 흰 꽃의 밀도와 과일의 둥근 질감을 덧입힌 구성이다.

Hermès Redefines Its Modern Chypre With New Barénia Pleine Fleur Eau de Parfum. 사진=Richard Burbridge/Studio Des Fleurs,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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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블로섬은 백합의 농밀함을 낮추는 역할을 맡는다. 백합만으로 중심을 채우면 향이 무겁거나 화장품처럼 분말감이 강해질 수 있지만, 오렌지 블로섬의 밝고 씁쓸한 기운이 꽃향의 윤곽을 정리한다. 미라클 베리 노트는 설탕이나 바닐라를 앞세운 정통 구르망과 달리 새콤함과 말린 과일의 온도를 오간다. 볶은 오크우드와 파촐리는 꽃이 피부 위에서 지나치게 흩어지지 않도록 낮은 무게중심을 만든다.

‘플렌 플뢰르’는 프랑스 가죽 용어로 표면을 과도하게 깎아내지 않은 풀그레인 가죽을 가리킨다. 프랑스어를 문자 그대로 옮기면 ‘가득 핀 꽃’이라는 의미도 생긴다. 에르메스는 꽃잎의 촉감과 가공을 최소화한 가죽의 촉감을 같은 이름 안에 배치했다. 향의 중심인 백합과 브랜드의 출발점인 가죽이 제품명에서 먼저 연결되는 구조다.

시프레의 형식은 남기고 재료는 바꾼 구성

전통적인 시프레는 베르가모트의 밝은 산미와 오크모스·라브다넘·파촐리의 어둡고 건조한 바탕이 대립하는 향조다. 상단의 감귤 향, 중간의 꽃향, 하단의 이끼와 수지 향이 시간차를 두고 나타나며 선명한 변화 곡선을 만든다. 20세기 후반 이후 오크모스 성분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면서 현대 시프레는 합성 원료와 다른 목질·광물·과일 노트를 이용해 기존의 긴장을 재구성해 왔다.

바레니아 계열은 오크모스의 어둡고 습한 느낌을 직접 재현하지 않는다. 오크우드와 파촐리로 건조한 바탕을 만들고, 백합과 미라클 베리로 상단과 중심부의 대비를 확보한다. 시프레를 특정 원료 목록이 아니라 밝음과 어두움, 꽃과 나무, 산미와 단맛이 교차하는 형식으로 다룬 셈이다.

Hermès Redefines Its Modern Chypre With New Barénia Pleine Fleur Eau de Parfum. 사진=Richard Burbridge/Studio Des Fleurs,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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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렌 플뢰르의 변화는 시프레를 더 대중적인 플로럴로 희석하는 방식과도 거리가 있다. 흰 꽃의 부피는 커졌지만, 바탕에는 볶은 나무와 파촐리가 남는다. 말린 살구처럼 느껴지는 과일 향도 단맛을 한 방향으로 밀어붙이지 않는다. 향수 시장에서 화이트 플로럴과 스톤프루트 계열이 다시 늘고 있는 흐름을 받아들이면서도, 에르메스는 꽃다발보다 구조와 촉감에 비중을 둔다. 2026년 향수 전망에서도 오렌지 블로섬을 비롯한 솔라 플로럴, 살구·복숭아 같은 부드러운 과일, 풋내와 산미를 지닌 식물성 노트가 함께 부상하고 있다.

향수병에 옮겨 놓은 가죽과 주얼리

타원형 유리병은 필립 무케(Philippe Mouquet)가 디자인한 기존 바레니아 병을 따른다. 오렌지와 분홍 사이의 유리색, 은색 금속판, 피라미드형 클루 메도르(Clou Médor) 스터드가 병의 인상을 결정한다. 클루 메도르는 에르메스의 가죽 칼라와 ‘콜리에 드 시앙(Collier de Chien)’ 브레이슬릿에서 이어진 장식 언어다. 부드럽게 부푼 유리 곡면과 날카롭게 솟은 금속 스터드의 대비는 향 안의 백합과 파촐리 구조를 시각적으로 반복한다.

Hermès Redefines Its Modern Chypre With New Barénia Pleine Fleur Eau de Parfum. 사진=Richard Burbridge/Studio Des Fleurs,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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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0·100mL 병은 별도 판매되는 125mL 리필로 다시 채울 수 있다. 리필은 폐기물을 줄이는 기능에 그치지 않는다. 향수병을 계절마다 교체하는 포장재가 아니라 가죽 제품이나 주얼리처럼 오래 보유하는 물건으로 바꾸려는 설계다. 향수의 지속가능성을 원료 설명에만 맡기지 않고 병의 사용 기간과 구매 방식까지 확장한 접근이다.

에르메스의 전체 사업 구조에서도 향수는 독립적인 화장품이라기보다 16개 메티에(métiers·공예 및 사업 부문)를 연결하는 입구에 가깝다. 가죽에서 이름을 가져오고, 주얼리의 금속 장식을 병에 옮기며, 조향사가 촉감에 가까운 향을 구성한다. 가방이나 주얼리보다 접근 가격이 낮은 향수는 젊은 소비자가 에르메스의 소재와 조형 언어를 경험하는 첫 제품이 될 수 있다.

피에르 알렉시 뒤마, 조향사가 아닌 창작 체계의 설계자

피에르 알렉시 뒤마(Pierre-Alexis Dumas)는 2005년부터 에르메스 예술 총괄 부사장으로 일하며 16개 메티에의 창작 방향과 일관성을 관리해 왔다. 각 부문의 창작자가 같은 제품을 만들도록 통제하기보다 소재, 기능, 공예 기술, 브랜드 역사 안에서 독립적인 결과를 내도록 조정하는 역할에 가깝다. 에르메스 공식 자료도 뒤마가 여러 예술·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총괄하며 형태와 색, 소재의 어휘를 해마다 갱신한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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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없는 창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문구를 피에르 알렉시 뒤마 개인의 명제로만 돌리기는 어렵다. 피에르 알렉시 뒤마는 공개 발언에서 선대 장 루이 뒤마(Jean-Louis Dumas)가 자주 하던 말이라고 설명했다. 문구를 계승한 피에르 알렉시 뒤마의 역할은 과거 제품을 그대로 복제하는 데 있지 않다. 안장과 마구에서 출발한 금속 스터드, 풀그레인 가죽을 뜻하는 제품명, 리필 가능한 향수병처럼 기존 자산의 용도를 바꾸고 서로 다른 메티에로 이동시키는 방식에 가깝다.

바레니아 플렌 플뢰르의 조향 저자는 크리스틴 나이젤이다. 뒤마가 향료 조합을 만든 것으로 확대해서는 안 된다. 뒤마는 가죽·꽃·금속·병이라는 서로 다른 요소가 에르메스라는 이름 아래 충돌하지 않도록 창작 환경과 언어를 관리한다. 나이젤은 수백 차례의 초기 시향과 실험을 다시 검토해 백합과 미라클 베리를 선택했다. 한 사람의 조향과 한 기업의 예술 총괄 체계가 분리돼 있으면서도 최종 제품에서는 하나의 질감으로 수렴한다.

향수 시장, 한 병의 서명에서 여러 병의 옷장으로

세계 향수 시장은 경기 불확실성 속에서도 화장품 산업의 성장축으로 남아 있다. 2025년 상반기 미국 프레스티지 향수 판매는 전년 동기보다 6% 증가했고, Z세대 가구가 향수 지출의 38%를 차지했다.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고급 브랜드를 경험할 수 있고, 향을 기분과 정체성을 바꾸는 도구로 사용하는 소비가 늘어난 결과다.

한 가지 향을 오랫동안 사용하는 ‘시그니처 향수’ 관습도 약해졌다. 2025년 전 세계에서 출시된 향수가 약 6000종에 이르렀다는 집계가 나왔고, 젊은 소비자층은 옷을 바꾸듯 상황과 계절에 따라 여러 향을 선택하고 있다. 작은 용량, 리필, 레이어링, 소셜미디어의 향수 콘텐츠가 다병 보유를 뒷받침한다.

바레니아 플렌 플뢰르는 여러 흐름이 겹치는 위치에 놓인다. 백합과 오렌지 블로섬은 화이트 플로럴의 귀환과 맞닿고, 말린 살구와 럼을 연상시키는 질감은 설탕 중심의 구르망에서 벗어난다. 시프레는 과거의 향조를 되살리는 복고 흐름에 속하지만, 오크우드와 미라클 베리의 결합은 전통 공식을 그대로 반복하지 않는다. 리필 병과 가죽·주얼리 코드는 향수 자체뿐 아니라 소유하는 물건의 가치까지 강조한다.

출시 과잉은 부담으로 남는다. 6000종에 가까운 신제품이 한 해에 쏟아지는 시장에서는 유명 향수의 이름을 확장한 플랭커(flanker)가 빠르게 묻힐 가능성도 커진다. 바레니아 플렌 플뢰르가 독립적인 향으로 자리 잡으려면 백합의 차이가 이름과 병 색상보다 피부 위 전개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전작 구매자에게는 중복되지 않아야 하고, 처음 접하는 소비자에게는 시프레의 건조함이 지나치게 낯설지 않아야 한다.

향수의 미래, 더 많은 노트보다 더 선명한 기억

2026년 공개된 대규모 향수 데이터 연구는 1900년부터 2024년까지의 향수 구성을 분석한 결과, 향수가 1990년대 이후 사용 노트의 수와 인상은 단순해지는 반면 노트 조합의 새로움은 커졌다고 밝혔다. 기존 제품을 닮은 향수가 많아지는 시장에서도 독창적인 조합은 지속성, 확산력, 소비자 평가에서 일정한 우위를 보였다.

인공지능과 분자 예측 기술도 향수 개발의 속도를 바꾸고 있다. 분자 구조를 바탕으로 향의 가능성과 강도를 예측하고, 수많은 후보 물질을 실험 전 단계에서 추리는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기술이 원료 탐색과 반복 실험을 단축할 수는 있지만, 어떤 냄새를 한 브랜드의 기억으로 묶을지는 여전히 조향사와 창작 조직의 몫으로 남는다.

바레니아 플렌 플뢰르가 제시하는 방향도 노트의 수보다 연결 방식에 있다. 백합은 꽃향에 머물지 않고 피부의 촉감으로 설명되고, 미라클 베리는 신맛과 단맛 사이의 기억을 맡으며, 오크우드와 파촐리는 가죽 브랜드의 건조한 바탕을 만든다. 병은 주얼리의 스터드를 지니고 리필을 통해 사용 기간을 늘린다. 향료, 용기, 브랜드 역사, 사용 방식이 분리되지 않는 구조다.

에르메스는 2025년 160억200만유로의 매출을 기록했지만 향수·뷰티와 시계 부문은 성장한 메티에 명단에서 제외됐다. 향수 시장 전체의 호황과 에르메스 내부 사업 흐름이 반드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 것은 아니다. 바레니아 라인의 확장에는 현대 시프레를 구축하려는 창작 의도와 함께 향수·뷰티 부문의 신선도를 높여야 하는 상업적 필요도 겹친다.

에르메스는 7월 29일 2026년 상반기 실적을 발표하고, 8월부터 바레니아 플렌 플뢰르를 세계 부티크에 공급할 예정이다. 바레니아가 단기간에 여러 변주를 내놓는 향수 계열에 머무를지, 가죽 제품처럼 시간에 따라 축적되는 에르메스의 대표 향수군으로 자리 잡을지는 출시 지역의 판매 반응과 향수·뷰티 부문 실적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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