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폭시의 유동과 경화, 단색의 꽃 군락이 만든 물질적 시간…반복과 수공성으로 확장한 K아트의 조형 언어
[KtN 박준식기자]검은 패널 중앙에 크기와 구조가 다른 꽃 형상들이 둥근 군락을 이룬다. 짙은 바탕에 잠긴 꽃과 회백색 광택을 머금은 꽃, 반투명한 가장자리만 드러난 꽃이 촘촘하게 맞물린다. 일정한 거리에서는 응축된 검은 원이 먼저 들어오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꽃잎의 굴곡과 두께, 입자와 반사면이 복합적인 표면을 펼쳐낸다.
최혜정(CHOI HyuJung)의 2021년작 ‘액체정원’은 에폭시 수지와 안료를 패널 위에 구축한 작업이다. 꽃의 형태를 평면에 묘사해 깊이를 암시하는 대신 실제 높이와 굴곡을 가진 형상을 배치했다. 안료가 만든 명암과 돌출된 표면에서 생기는 그림자가 겹치며 회화와 부조의 경계를 넘나든다.
원형 군락에는 꽃잎이 안쪽으로 말린 겹꽃, 넓은 잎이 여러 층으로 벌어진 형태, 가느다란 단위가 방사형으로 퍼진 형상이 뒤섞여 있다. 특정 식물종의 외관을 정밀하게 옮기기보다 개화한 식물에서 발견되는 곡률과 주름, 중첩과 확산의 구조를 추출해 여러 형태로 변주했다.
같은 유형의 꽃도 동일하게 반복되지 않는다. 꽃잎의 수와 휘어진 각도, 중심부의 깊이, 안료의 농도가 미세하게 다르다. 반복은 하나의 문양을 복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작은 차이를 계속 축적해 원형 군락의 밀도를 높이는 제작 원리로 작동한다.
큰 꽃 사이에는 작은 꽃과 점에 가까운 입자가 끼어 있다. 미세한 단위들은 검은 틈을 메우고 떨어진 형상들을 연결한다. 개별 꽃의 윤곽을 따라가던 시선은 작은 입자를 거쳐 다른 형상으로 이동하며 군락 전체를 하나의 복합적인 물질체로 인식하게 된다.
중앙에는 크기가 크고 비교적 밝은 형상이 집중돼 있다. 반투명한 꽃잎과 회백색 반사면이 시선을 안쪽으로 모으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작고 짙은 형상이 늘어난다. 둥근 외곽은 선으로 잘라 만든 테두리가 아니라 크기와 투명도, 광택의 점진적인 변화로 형성된다.
중앙부도 완전한 방사대칭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큰 꽃의 위치와 밝기, 표면의 방향이 조금씩 어긋나면서 중심은 한 점에 고정되지 않는다. 전체는 원형의 질서를 유지하지만 내부에서는 밀집과 분산, 밝음과 어둠이 불규칙하게 교차한다.
검정은 모든 꽃을 하나의 색으로 평평하게 묶지 않는다. 빛을 흡수하며 바탕 속으로 가라앉는 검정과 회색빛을 반사하는 검정, 유리나 광물처럼 광택을 내는 반투명한 검정이 함께 놓였다. 색채의 폭을 제한한 자리에서 꽃잎의 두께와 곡률, 표면의 거칠기와 투명도가 한층 선명해진다.
검은 바탕 역시 꽃을 강조하는 수동적인 배경에 머물지 않는다. 짙은 형상의 외곽을 흡수하고 밝은 가장자리만 선택적으로 드러내면서 군락의 깊이를 조절한다. 바탕과 형상의 구분이 약해지는 부분에서는 개별 꽃보다 검정의 농도와 표면의 결이 앞선다.
원 바깥에 넓게 남은 검정은 군락을 주변에서 분리하면서도 외곽의 경계를 흐린다. 가장자리의 짙은 꽃은 패널의 어둠과 서서히 합쳐지고, 광택을 머금은 일부 윤곽만 표면 위에 남는다. 안과 밖은 명확한 선보다 형상의 가시성이 점차 낮아지는 과정으로 나뉜다.
원형 군락에 가까이 다가설수록 수지의 두께와 꽃잎의 굴곡, 표면에 맺힌 광택이 뚜렷해진다. 관람자의 위치와 빛의 방향이 달라지면 검정 속에 잠겨 있던 형상이 앞으로 떠오르고, 선명했던 윤곽은 다시 어둠 속으로 물러난다. 에폭시의 반사와 실제 그림자가 시선의 이동에 따라 깊이를 바꾸며 굳어진 군락 안에 유동적인 관람의 시간을 만든다.
에폭시 수지는 형상을 구성하는 재료인 동시에 작품의 시간을 결정한다. 액체 상태에서는 흐르고 섞이지만 경화가 진행되면 굴곡과 두께가 단단한 표면으로 남는다. 얇고 투명한 꽃잎 끝과 깊게 파인 중심, 매끄럽게 이어진 곡면에는 유동과 응고가 교차한 물질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액체’와 ‘정원’은 서로 다른 시간의 체계를 품는다. 정원은 계절에 따라 성장하고 쇠퇴하며 모습을 바꾸지만 굳어진 수지는 형성된 외관을 지속한다. 작품 속 꽃은 개화한 상태를 유지하는 대신 수분과 향기, 줄기와 잎, 성장과 시듦의 과정에서 분리된다.
자연의 일부를 사실적으로 옮긴 풍경보다 유기적 형태를 산업 재료로 다시 구축한 인공 군락에 가깝다. 꽃의 형상은 남아 있지만 생물의 순환은 제거되고, 에폭시가 굳어가는 제작의 시간이 자연의 자리를 대신한다. 익숙한 꽃이 낯선 물질로 바뀌는 과정에서 유기성과 인공성의 긴장이 형성된다.
꽃은 장식성이 강한 소재이며 다수의 형상을 밀집한 구성도 시각적 풍요와 맞닿는다. 최혜정은 화려한 꽃색을 걷어내고 검정과 회색만 남겨 즉각적인 장식성을 낮췄다. 모든 형상이 한꺼번에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밝은 윤곽에서 깊은 굴곡으로, 매끄러운 곡면에서 입자가 두드러진 표면으로 시선을 옮겨야 군락의 세부가 열린다.
단색의 절제와 형상의 과밀함은 한 원 안에서 서로를 견제한다. 불투명과 반투명, 흡광과 반사, 매끄러운 곡면과 거친 입자가 군락의 결속을 유지하면서 개별 꽃의 차이를 남긴다. 검정은 색채를 줄이는 수단인 동시에 재료의 미세한 상태를 더 민감하게 드러내는 조형 조건이 된다.
한국 현대미술이 오래 다뤄온 단색의 밀도와 반복의 시간도 ‘액체정원’에서 다른 재료로 변주된다. 붓질과 안료의 층 대신 에폭시 수지의 실제 두께와 광택이 표면을 구축하고, 동일한 형상의 기계적 복제 대신 수공 과정에서 발생한 미세한 편차가 리듬을 만든다.
한국적 조형 감각은 전통 문양이나 익숙한 상징의 직접적인 인용보다 재료를 다루는 태도에서 구체화된다. 제한된 색 안에 농도와 질감의 차이를 쌓고, 반복된 형상 사이에 불규칙한 호흡을 남기며, 밀집된 군락과 넓은 검정의 관계로 공간을 조절한다. 채움과 비움, 규칙과 편차가 동시에 유지되는 구조다.
패널이라는 회화적 지지체 위에 입체적인 형상을 구축한 방식은 동시대미술의 매체 혼성과도 맞닿는다. 안료의 농담은 회화적 깊이를 만들고, 실제 부피를 지닌 수지는 조각적인 그림자와 반사광을 형성한다. ‘액체정원’은 평면에 놓인 이미지이면서 주변의 빛을 흡수하고 되돌려 보내는 물체로 존재한다.
작품이 제작된 2021년 한국 공개경매시장은 거래액 2억3700만 달러를 넘어서며 세계 6위까지 올라섰다. 서울을 거점으로 국제 갤러리와 미술시장 기반도 빠르게 확대됐다. 2024년 국내 경매 거래액은 7060만 달러로 줄었지만 주요 한국 작가에 대한 수요와 국제 미술계의 서울 진출은 이어졌다. 급격한 팽창을 거친 K아트는 개별 작가의 조형 언어와 연작의 지속성을 더욱 세밀하게 살피는 국면으로 옮겨갔다.
시장 열기가 높았던 시기에 나온 ‘액체정원’은 선명한 색채나 즉각적인 이야기보다 재료가 변하는 과정과 단색의 표면을 앞세웠다. 꽃이라는 친숙한 형상을 사용하면서도 생명과 아름다움의 상징을 반복하기보다 에폭시의 경화, 빛의 흡수와 반사, 형상의 실제 높이로 작품의 언어를 구성했다.
세계 미술시장에서도 고가 작품에 집중됐던 시선이 넓은 가격대와 새로운 구매층으로 분산되기 시작했다. 2023년 공개경매 거래의 90%는 1만2000달러 미만에서 이뤄졌으며, 1000달러 미만 작품의 거래는 약 42만3000건으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온라인 거래의 확대는 더 많은 작품과 관람자가 만나는 유통 기반을 넓혔다.
2024년 7월부터 2025년 6월까지 컨템포러리 아트 공개경매에서는 100만 달러 이상 낙찰 건수가 29% 감소하고 전체 거래액도 14억4000만 달러로 줄었다. 같은 기간 5000달러 미만 작품의 거래는 9% 늘었고, 연간 거래량은 14만6750점으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소수의 기록적인 낙찰보다 다양한 작가와 작품이 유통되는 방향으로 시장의 기반이 넓어지고 있다.
확대된 동시대미술의 지형에서는 익숙한 소재를 선택하는 것보다 소재를 독자적인 물질 언어로 전환하는 방식이 중요해진다. ‘액체정원’은 꽃의 형태를 에폭시 수지의 경화와 검정의 층차, 빛에 따라 달라지는 표면으로 바꾼다. 반복되는 꽃은 장식적 모티프를 넘어 재료의 상태와 시간을 드러내는 단위가 된다.
에폭시 수지는 개화의 외형을 붙잡았지만 정원의 변화를 모두 멈추지는 않았다. 굳어진 꽃은 자라거나 시들지 않지만 표면을 지나는 빛에 따라 모습을 드러내고 다시 검정 속으로 잠긴다. 생물학적 시간은 경화와 함께 정지하고, 관람의 시간은 광택과 그림자 사이에서 계속 이어진다.
최혜정의 ‘액체정원’에 남은 것은 영원히 피어 있는 꽃밭이 아니다. 흐르던 물질이 굳어 얻은 형태, 자연의 외관과 산업 재료가 유지하는 긴장, 검은 바탕에 잠겼다가 빛을 받아 떠오르는 표면이다. 에폭시는 개화의 한순간을 단단한 물질로 바꾸고, 이동하는 빛은 멈춘 군락에 끊임없이 다른 깊이를 부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