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스탄벡 쉬가예프 그래픽 작업이 회화를 확장하는 방식
[KtN 박준식기자]회화의 확장은 반드시 캔버스의 크기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형식의 확장은 종종 매체 선택에서 비롯된다. 유리스탄벡 쉬가예프의 작업에서 그래픽과 리노컷은 부차적 영역이 아니다. 회화와 동일한 무게를 지닌 언어이며, 세계관을 가장 정확하게 드러내는 통로다. Yuristanbek Shygaev의 그래픽 작업은 장식적 이미지나 기법 실험이 아니라, 인식 구조를 압축한 결과물에 가깝다.
쉬가예프가 그래픽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하다. 유목 문화가 지닌 세계 인식은 과잉된 묘사와 어울리지 않는다. 삶은 단순하고, 관계는 직접적이며, 기억은 반복을 통해 유지된다. 리노컷과 드로잉은 이러한 구조를 가장 효과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매체다. 굵은 선, 분명한 면, 제한된 색채는 시각적 효과를 줄이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의미를 선명하게 하기 위한 전략이다.
쉬가예프의 리노컷 화면에는 불필요한 요소가 거의 없다. 배경은 설명되지 않고, 인물은 과장되지 않는다. 선은 형태를 감싸되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다. 면은 공간을 채우되 깊이를 과시하지 않는다. 화면은 단정하지만 비어 있지 않다. 오히려 응축돼 있다. 이 응축은 단순화가 아니라 농축에 가깝다. 불필요한 정보가 제거된 자리에는 관계의 구조만 남는다.
그래픽 작업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위계의 부재다. 인물과 동물, 자연과 사물은 동일한 밀도로 화면에 놓인다. 중심을 향해 시선을 유도하는 구도는 보이지 않는다. 상하 관계도 설정되지 않는다. 이러한 배치는 중앙아시아 유목 문화가 지닌 세계관을 그대로 반영한다.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지 않고, 자연의 일부로 살아간다. 그래픽이라는 매체는 이 관계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쉬가예프의 선은 설명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선은 경계를 설정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리노컷 특유의 단호한 선은 흔들림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 선은 감정의 흔들림을 제거하는 대신 구조의 안정성을 확보한다. 화면은 감정 과잉으로 흐르지 않고, 차분한 긴장을 유지한다. 이러한 태도는 작가가 레핀 미술대학에서 체득한 데생 훈련과도 연결된다. 아카데미에서 익힌 선의 통제력은 그래픽 작업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색채 역시 절제돼 있다. 쉬가예프의 그래픽 작업에서 색은 장식이 아니다. 색은 의미를 강조하거나 리듬을 형성하는 역할로 제한된다. 다채로운 색의 향연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몇 가지 색이 반복되며 화면의 호흡을 만든다. 이 반복은 신화적 사고와 닮아 있다. 신화는 새로운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어내지 않는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며 의미를 축적한다. 색의 반복은 그 구조를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그래픽 작업에서 시간은 직선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장면은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지 않고, 특정 시점을 지시하지도 않는다. 인물은 언제의 존재인지 설명되지 않는다. 이러한 무시간성은 유목 문화가 지닌 시간 인식과 맞닿아 있다. 시간은 축적되고, 기억은 겹쳐진다. 그래픽은 이러한 겹침을 가장 간결하게 담아낸다. 회화보다 빠르게 읽히지만, 오래 남는다.
쉬가예프의 그래픽 작업은 회화를 보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회화를 규정한다. 회화에서 보이는 세계관은 이미 그래픽에서 정제된 상태로 존재한다. 캔버스 작업은 그 확장에 가깝다. 선과 면으로 구축된 구조가 색과 물성을 입으며 확장된다. 따라서 그래픽은 준비 단계가 아니라 핵심 언어다. 쉬가예프 작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래픽을 우선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앙아시아 미술이 종종 장식적 패턴이나 민속 문양으로 오해되는 상황에서 쉬가예프의 그래픽은 분명한 차이를 만든다. 문양은 반복되지만 장식으로 소비되지 않는다. 기호는 등장하지만 설명되지 않는다. 외부 시선을 겨냥한 연출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픽은 내부 질서를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된다. 이러한 태도는 국제 전시에서 쉬가예프의 작업이 쉽게 소비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픽 작업은 물리적 규모가 작다. 그러나 밀도는 결코 작지 않다. 소형 작업은 관람자의 시선을 붙잡기보다 끌어들인다. 가까이 다가서야 읽히고, 반복해서 보게 만든다. 이러한 관람 방식은 대형 회화가 제공하지 못하는 경험이다. 그래픽은 관람자의 속도를 늦추고, 시선을 고정시킨다. 쉬가예프는 이 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쉬가예프의 그래픽에는 사회적 메시지가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정치적 구호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화면은 중립적이지 않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 설정 자체가 이미 하나의 입장이다. 위계가 제거된 구조, 중심이 사라진 화면은 세계를 바라보는 또 다른 기준을 제시한다. 그래픽은 그 기준을 가장 간결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작업 태도는 동시대 미술 환경과도 맞물린다. 대형 회화와 극적인 서사가 주목받던 시기를 지나, 이미지의 밀도와 지속성이 다시 평가받고 있다. 그래픽과 판화, 종이 작업이 재조명되는 배경에는 이러한 변화가 놓여 있다. 쉬가예프의 그래픽 작업은 이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위치한다. 유행을 좇은 결과가 아니라, 일관된 선택의 축적이기 때문이다.
그래픽은 쉬가예프에게 회화를 대신하는 언어가 아니다. 회화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다. 선과 면으로 세계를 먼저 정리한 뒤, 색과 물성으로 확장한다. 이 순서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작업 전체가 하나의 질서를 공유한다. 매체가 달라져도 세계관은 유지된다.
유리스탄벡 쉬가예프의 그래픽 작업은 중앙아시아 미술이 지닌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화려한 색채나 이국적 이미지가 아니라, 단단한 구조와 응축된 언어로 세계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선과 면으로 구축된 이 세계는 조용하지만 강하다. 그래픽은 부차적 형식이 아니다. 쉬가예프 작업에서 그래픽은 회화를 떠받치는 가장 견고한 토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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