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과 방사선으로 세운 질서, 연필의 농담과 보조선에 기록된 생성의 과정
[KtN 박준식기자]50×50cm 종이 중앙에 여러 겹의 꽃이 펼쳐졌다. 가느다란 꽃잎이 한 점에서 뻗고, 둥근 꽃잎과 끝이 뾰족한 꽃잎이 차례로 둘러선다. 가장 바깥에는 길쭉한 잎이 사방으로 퍼져 있다. 꽃과 잎 사이, 넓은 여백에는 원호와 직선, 교차점이 희미하게 남았다.
최혜정(CHOI HyuJung)의 2026년작 ‘Circle4 – geometry’는 자연의 꽃을 그대로 묘사한 작품과 거리가 있다. 중심점과 원, 방사형 축을 먼저 세운 뒤 꽃잎과 잎을 반복적으로 배치했다. 겉모습은 식물에 가깝지만 구조는 기하학에 놓여 있다. 연필로 완성한 꽃과 꽃을 만들기 위해 그은 기준선이 한 종이 위에 함께 드러난다.
시선은 중앙의 작은 별 모양에서 시작한다. 길고 가는 꽃잎들이 한 점에서 뻗어 나오고, 꽃잎 내부에는 촘촘한 사선이 들어갔다. 선은 중심으로 모이면서 밀도를 높이고, 바깥쪽으로 갈수록 간격을 넓힌다. 중앙에 모였던 시선도 꽃잎의 방향을 따라 밖으로 이동한다.
중심을 둘러싼 다음 층에는 둥근 꽃잎이 겹쳐 있다. 꽃잎 안에는 작은 꽃무늬와 점, 굵기가 다른 선이 배치됐다. 바깥의 뾰족한 꽃잎에는 중심에서 가장자리로 퍼지는 방사선이 반복된다. 하나의 원을 공유하면서도 내부 무늬가 달라 각 층의 속도와 밀도에 차이가 생긴다.
작은 꽃무늬는 직선과 원호가 지배하는 구성에 구체적인 식물의 흔적을 남긴다. 단순화한 꽃이 일정한 간격으로 들어가면서 작품은 기하학적 설계와 장식화 사이를 오간다. 다만 중앙부에는 꽃잎과 방사선, 점과 작은 꽃이 한꺼번에 모여 있다. 정보량이 많아 일부 무늬는 개별적인 형태보다 하나의 조밀한 덩어리로 읽힌다.
짙은 중심 뒤에는 크고 옅은 꽃잎이 펼쳐진다. 윤곽과 명암을 낮춘 꽃잎은 앞쪽의 선명한 형태보다 뒤로 물러나며 중간 깊이를 만든다. 중앙의 검은 선과 종이의 흰 바탕이 곧바로 맞닿지 않도록 연결하는 층이다.
옅은 꽃잎 사이에는 회색 원이 일정한 간격으로 놓였다. 작은 원들은 중앙의 복잡한 선과 바깥쪽 잎 사이를 잇고, 작품 전체에 반복되는 둥근 형태를 이어간다. 선이 많은 중심부와 비교하면 구조는 단순하지만, 명암의 변화가 시선을 외곽으로 이동시킨다.
가장 바깥의 잎은 중앙에서 종이 가장자리 쪽으로 뻗는다. 짙은 윤곽과 가운데 잎맥이 형태를 나누고, 내부에는 연필을 여러 차례 움직인 가로 결이 남았다. 중앙의 꽃이 원을 따라 회전하는 구조라면 바깥 잎은 시선을 사방으로 내보낸다.
전체 배치는 방사형 대칭을 따르지만 잎의 크기와 각도, 중앙과의 거리는 완전히 같지 않다. 일부 잎은 종이 가장자리에 가까이 닿고, 다른 잎은 여백을 더 넓게 남긴다. 기계적으로 복제한 문양과 달리 손으로 위치를 잡고 조정한 미세한 차이가 대칭 안에 들어 있다.
꽃 주변에 남은 옅은 선은 ‘Circle4 – geometry’의 성격을 분명하게 바꾼다. 원의 크기를 정한 원호, 잎 끝과 중심을 연결한 직선, 여러 기준선이 만나는 점이 종이 전체에 이어진다. 완성된 꽃의 뒤편으로 물러나 있지만 제작 과정에서 사용한 구조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기준선이 지워졌다면 작품은 정교한 꽃무늬나 장식 도안으로 마무리됐을 가능성이 크다. 최혜정은 완성된 윤곽과 설계의 흔적을 함께 남겼다. 중앙의 꽃은 선과 명암을 쌓아 얻은 결과이고, 주변의 옅은 선은 결과에 이르기까지 형태를 찾고 조정한 시간을 보여준다.
‘Circle4 – geometry’라는 작품명도 꽃 자체보다 원과 구성 원리를 앞에 놓는다. 꽃잎과 잎은 중심점과 원, 방사형 축을 따라 배열됐다. 자연의 형상을 관찰해 그대로 옮기기보다 여러 단위로 나누고 기하학적 질서 안에서 다시 조합한 방식이다.
중심에서 꽃잎이 반복적으로 퍼지는 구성은 만다라를 연상시킨다. 하나의 중심을 공유하는 원형 구조와 여러 겹의 꽃잎, 방사형으로 확장되는 잎이 시각적 유사성을 만든다. 특정 종교 도상으로 한정하기보다 중심과 주변을 연결하는 반복과 대칭의 형식으로 보는 편이 작품에 가깝다.
최혜정은 작업을 ‘작가의 시선으로 해석한 신과 인간의 시(詩), 서(書), 화(畵)의 놀이터’라고 설명한다. 시와 글씨, 그림을 한데 섞었다는 뜻만으로는 작품의 방향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다. 원과 대칭을 세우고 수많은 선을 반복하는 행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에 다가가려는 사유가 함께 놓여 있다.
신은 작품에 인물이나 상징물로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하나의 중심을 향해 모이는 선,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는 꽃잎, 사방으로 확장되는 대칭 구조가 인간의 일상적 시야를 넘어선 질서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신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리기보다 인간의 손으로 닿기 어려운 질서를 더듬는 과정을 종이 위에 옮긴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인간의 흔적은 연필의 농도와 선의 편차, 지워지지 않은 기준선에 남아 있다. 꽃잎의 크기와 각도는 조금씩 다르고, 회색 면의 밝기도 완전히 일정하지 않다. 정교한 원과 대칭에 접근하지만 작업자의 손과 시간은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신과 인간의 놀이터’는 두 존재를 작품 속 특정 꽃잎에 각각 배치한 공간보다, 인간이 선을 긋고 반복하며 초월적인 질서를 탐색하는 과정에 가깝다. 완성된 답을 제시하기보다 신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위치를 꽃과 기하학 사이에 남긴다.
시·서·화도 별개의 요소로 나뉘지 않는다. 꽃잎과 점이 반복되는 간격은 시의 운율처럼 시선의 호흡을 조절하고, 수많은 연필선에는 글씨를 쓰듯 손을 움직인 시간이 축적돼 있다. 선과 면, 흑백의 농담, 중심과 외곽의 배치는 하나의 회화적 구성을 이룬다.
‘놀이터’라는 표현은 시·서·화가 경계 없이 오가는 작업 방식을 가리킨다. 연필선은 글씨의 흔적이면서 꽃잎의 무늬가 되고, 반복되는 간격은 시의 리듬이면서 기하학적 규칙이 된다. 꽃은 그림의 대상인 동시에 작가가 보이지 않는 질서에 접근하는 통로가 된다.
온라인 전시관 아뜰리에 아미스에 공개된 ‘Circle4 – geometry’는 보는 거리에 따라 인상이 달라진다. 멀리서는 원형으로 피어난 꽃이 먼저 들어오고, 가까이에서는 꽃잎을 채운 선과 점, 잎의 연필 결, 옅은 기준선이 드러난다. 완성된 꽃과 제작의 시간이 번갈아 앞선다.
외형은 자연의 꽃을 따르지만 구성은 중심점과 원, 반복과 대칭에 놓여 있다. 중앙의 문양은 촘촘하게 닫히고, 주변의 기준선은 종이 가장자리까지 이어진다. ‘Circle4 – geometry’는 신을 직접 묘사한 작품보다 완전한 질서를 향해 선을 이어가는 인간의 움직임에 가깝다. 정돈된 꽃과 지워지지 않은 연필 자국 사이에 최혜정이 말한 신과 인간의 거리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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