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덮인 산과 초록 들판, 호숫가 집들이 수면에 겹쳐…짙고 옅은 수채 색층으로 풀어낸 자연과 생활의 거리
[KtN 박준식기자]푸른 산이 마을 뒤편을 크게 둘러싸고, 물가에는 노랑과 파랑, 붉은색 지붕을 얹은 집들이 길게 이어진다. 화면 아래 절반을 차지한 물에는 집들의 색이 길게 번진다. 조운호의 수채화 ‘마을 너머의 산’은 노르웨이 베르겐에서 만난 풍경을 산과 마을, 물이라는 세 층으로 나눠 담았다.
가장 먼저 시선을 붙드는 것은 산의 크기다. 뒤편의 산은 화면 상단을 넓게 차지하고, 산허리에는 짙은 청색과 청록, 회청색이 층층이 겹친다. 정상부에는 흰색이 남아 눈의 흔적을 만들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녹색과 황토빛이 섞이며 들판과 마을로 이어진다.
산은 세부를 촘촘히 묘사하기보다 색의 농도와 붓질로 형태를 잡았다. 능선과 암벽은 짙은 청색을 길게 끌어내리고, 밝은 부분은 종이의 흰색을 남겨 높낮이를 나눈다. 단단한 산세와 수채화 특유의 번짐이 함께 놓이면서 자연의 무게와 공기의 가벼움이 한 화면에 공존한다.
마을은 산보다 훨씬 작지만 색으로 존재감을 확보한다. 노란 집과 파란 집, 붉은 지붕과 갈색 건물이 물가를 따라 나란히 서 있다. 건축물의 크기와 형태는 제각각이지만, 비슷한 높이로 이어지는 지붕선이 하나의 긴 리듬을 만든다.
집의 색은 산과 물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청색과 녹색이 넓게 퍼진 풍경 속에 노랑과 빨강, 주황이 들어오면서 시선이 자연스럽게 마을로 이동한다. 따뜻한 색이 넓은 면을 차지하지 않아 전체 풍경의 차분한 온도는 유지된다.
호수에 가까운 집들은 비교적 또렷한 윤곽으로 잡혀 있다. 창과 지붕, 벽면의 구분이 분명하고 건물의 개별적인 색도 유지된다. 산으로 갈수록 형태가 단순해지고 색의 경계가 느슨해진다. 가까운 생활 공간과 먼 자연이 묘사의 밀도에서도 나뉜다.
물은 화면에서 가장 넓은 여백을 품는다. 청록과 녹색, 회청색이 넓게 번지고, 그 위로 집들의 노랑과 파랑, 붉은색이 아래쪽으로 길게 내려온다. 수면에 비친 색은 건물의 형태를 그대로 복제하지 않는다. 세로로 번진 색이 짧은 수평 붓질과 만나면서 흔들리는 반사를 만든다.
흰색으로 남긴 수면의 결도 눈에 띈다. 가늘고 긴 흰 선이 반복되면서 물결의 방향을 만들고, 그 사이로 녹색과 청색이 끊어지듯 이어진다. 색을 채운 부분과 비워둔 부분이 번갈아 나타나면서 잔잔한 물의 움직임이 살아난다.
수면 중앙의 파란 반사는 특히 강하다. 마을의 푸른 집에서 시작된 색이 물 아래로 길게 떨어지며 하나의 세로축을 만든다. 옆으로는 노랑과 보라, 붉은빛이 나란히 번진다. 마을의 색이 물속에서 한 번 더 풀리면서 풍경의 색채가 화면 아래쪽까지 이어진다.
산과 마을, 물을 구분하는 경계는 선명하지만 서로 끊기지는 않는다. 산 아래 녹색 들판은 집들의 배경이 되고, 집들의 색은 수면으로 내려간다. 위에서 아래로 자연과 생활 공간, 반사가 차례로 이어지면서 화면 전체가 하나의 색 흐름을 만든다.
‘산은 마을을 품고, 마을은 호수를 품는다’는 표현은 화면의 배치와도 잘 맞는다. 산이 마을을 뒤에서 감싸고, 마을은 다시 물가를 따라 길게 자리한다. 자연과 인간의 공간이 서로 분리된 채 맞서는 대신 크기와 거리의 차이를 유지하면서 이어진다.
눈 덮인 산과 초록 들판의 대비도 계절감을 만든다. 산 정상에는 겨울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아래쪽에는 짙은 녹색과 연두색이 넓게 퍼져 있다. 하나의 풍경 안에서 차가운 계절과 따뜻한 계절이 함께 자리한다.
하늘은 산보다 한층 가볍다. 옅은 청색과 흰 구름이 넓게 퍼지고, 붓질의 경계도 느슨하다. 산에서 짙게 쌓인 색이 하늘에서는 풀리면서 화면 상단의 무게를 덜어준다. 아래쪽 수면과도 비슷한 투명성을 유지해 하늘과 물 사이에 은근한 대응을 만든다.
조운호의 자연 수채화에서는 산과 물, 사람이 사는 공간이 여러 차례 함께 등장했다. 블레드 호수에서는 설산과 섬, 종탑이 비교적 넓은 간격을 두고 놓였고, 할슈타트에서는 산과 호수 사이에 밀집된 마을이 자리했다. ‘마을 너머의 산’에서는 집들이 물가를 따라 길게 펼쳐지면서 생활 공간의 색채가 더욱 적극적으로 드러난다.
마을의 개별 건축물을 크게 부각하지 않은 점도 눈에 띈다. 노란 집과 파란 집은 각각 눈에 들어오지만 어느 하나가 중심을 독점하지 않는다. 여러 채의 집이 모여 하나의 색띠를 만들고, 그 뒤편 산과 앞쪽 물을 연결한다.
자연의 규모도 과장하지 않았다. 산은 크지만 위압적으로 다가오지 않고, 마을은 작지만 묻히지 않는다. 산의 짙은 청색과 마을의 밝은 색, 수면의 투명한 녹색이 서로 다른 밀도로 배치되면서 각자의 존재감을 유지한다.
베르겐에서 만난 풍경은 이 작품에서 관광지의 세부 기록보다 색과 거리의 관계로 정리됐다. 눈 덮인 산의 흰색, 초록 들판, 알록달록한 집, 잔잔한 물의 반사가 서로 이어지면서 한 장소의 인상을 압축한다.
‘마을 너머의 산’은 거대한 자연과 작은 마을을 대비시키는 데 머물지 않는다. 산과 집, 물이 서로의 색을 받아들이면서 화면 안에서 연결된다. 조운호 작가는 북유럽의 풍경을 수채화의 번짐과 여백, 선명한 건축물의 색으로 나눠 담으며 자연과 생활이 함께 이어지는 공간을 그렸다.
후원=NH농협 302-1678-6497-21 위대한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