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형상과 붉은 색면, 상단의 추상회화가 이루는 이중 구조…1990년 작품에 응축된 유목의 기억과 쉬가예프의 상징적 조형언어
[KtN 박준식기자]붉은 대지 위에 검은 형상이 서 있다. 양쪽 끝이 날카롭게 솟은 긴 곡선은 동물의 뿔을 닮았고, 아래로 내려온 짧고 굵은 형태들은 다리처럼 이어진다. 형상 뒤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상단의 황토빛 공간에는 작은 직사각형의 추상적인 이미지가 자리한다. 유리 스탄벡 쉬가예프(Yuristanbek Shygaev)의 1990년작 ‘만남(Meeting)’은 두 개의 공간과 하나의 낯선 형상을 통해 자연의 기억과 신화적 상상력을 결합한 회화다.
화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붉은색은 넓고 평평하게 펼쳐져 있다. 그 위에 놓인 검은 형상은 세부를 최소화한 채 길게 휘어진 윤곽을 드러낸다. 상단의 작은 직사각형에는 녹색과 갈색, 붉은색과 노란색이 복잡하게 겹쳐 있다. 아래쪽의 단순한 구성과 위쪽의 밀도 높은 붓질이 대비를 이루면서 작품은 서로 다른 조형적 질서를 하나의 캔버스에 담아낸다.
작품은 황토색의 상단과 붉은색의 하단으로 크게 나뉜다. 두 영역의 경계는 수평에 가깝게 이어지고, 아래쪽에는 검은색이 넓게 깔려 있다. 황토색과 붉은색, 검은색이라는 세 가지 주요 색채가 수평으로 쌓이면서 단순하고 강한 구도가 형성된다. 상단의 밝은 색채는 넓은 여백을 만들고, 중간의 붉은색은 검은 형상을 떠받치며, 하단의 검은색은 작품 전체에 무게를 더한다.
붉은색은 작품의 중심을 이루는 색채다. 비교적 균일하게 칠해진 넓은 면에는 붓질의 미세한 흔적이 남아 있지만 색의 변화는 크지 않다. 강한 붉은색이 캔버스 중앙을 차지하면서 검은 형상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검은색과 붉은색의 대비는 형상의 존재감을 강조하고, 황토색의 상단과 연결되면서 따뜻한 색채의 흐름을 만든다.
검은 형상은 작품에서 가장 독특한 부분이다. 양쪽 끝이 위로 솟은 긴 곡선은 소의 뿔이나 초승달을 연상시킨다. 왼쪽 끝은 아래에서 위로 완만하게 올라가고, 오른쪽 끝은 더 길고 날카롭게 뻗는다. 중앙은 낮게 휘어져 있으며 표면에는 황갈색과 녹색, 붉은색의 작은 흔적들이 남아 있다. 형상 전체는 검은색을 바탕으로 하지만 곳곳에 밝은 색이 들어가 있어 단순한 실루엣보다 복합적인 질감을 지닌다.
곡선 아래에는 짧고 굵은 형태들이 이어져 있다. 다리처럼 내려온 부분은 붉은 바탕과 검은 그림자 사이에 놓인다. 형상은 동물의 신체를 떠올리게 하면서도 구체적인 종류를 쉽게 구별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양쪽으로 길게 벌어진 뿔과 짧은 다리가 결합하면서 현실의 동물과 추상적인 기호 사이에 놓인 존재가 만들어진다.
쉬가예프는 이 형상을 캔버스의 중앙보다 조금 아래에 배치했다. 넓은 붉은색의 공간이 위쪽에 펼쳐져 있고 검은 형상은 하단의 어두운 영역과 가까운 곳에 서 있다. 붉은색과 검은색이 만나는 부분에는 거친 붓질이 남아 있어 형상의 아래쪽이 그림자와 이어진다. 위로 솟은 두 끝은 붉은 바탕을 향해 길게 뻗으며 작품의 수평적인 구도에 완만한 곡선을 더한다.
검은 형상은 동물의 몸과 뿔, 초승달을 연상시키는 곡선을 동시에 품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유목문화에서 가축은 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돼 왔으며, 동물의 뿔을 단순화한 문양 역시 여러 장식문화에서 나타난다. 쉬가예프는 현실의 동물에서 출발한 형태를 간결한 곡선으로 압축해 자연의 생명체와 상징적 기호가 겹치는 조형언어를 발전시켰다. ‘만남’의 검은 형상도 이러한 작업의 흐름 속에서 읽힌다.
형상의 표면에 남은 작은 색채들은 주변의 넓은 붉은 면과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검은색 위에 황갈색과 녹색의 짧은 흔적이 이어지면서 곡선의 길이와 방향을 강조한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색채의 변화는 긴 형상에 리듬을 부여한다. 검은 형상이 단순한 평면적 기호에 머무르지 않고 여러 층의 물감이 쌓인 회화적 존재로 나타나는 부분이다.
상단의 작은 직사각형은 작품의 또 다른 중심이다. 황토색의 넓은 바탕 안에 자리한 직사각형에는 녹색과 갈색, 붉은색, 노란색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다. 짧은 붓질과 겹쳐진 색면이 작은 공간에 밀집하면서 아래쪽의 넓고 단순한 붉은색과 강한 대비를 만든다. 직사각형의 외곽은 비교적 분명하지만 내부의 형상들은 서로 겹쳐 있어 여러 색채가 하나의 덩어리처럼 움직인다.
직사각형은 캔버스 안에 또 하나의 그림이 들어간 듯한 인상을 준다. 황토색의 넓은 여백에 둘러싸인 작은 색채의 집합은 독립된 공간을 이루고, 아래쪽의 검은 형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위쪽에는 복잡한 색채의 움직임이, 아래쪽에는 하나의 강한 윤곽이 놓여 있다. 쉬가예프는 밀도 높은 추상적 이미지와 간결한 상징적 형상을 수직으로 배치해 두 영역 사이의 긴장을 만들었다.
작품 제목인 ‘만남’은 두 영역의 관계를 살펴보게 한다. 상단의 직사각형과 하단의 검은 형상은 서로 다른 조형적 성격을 지니지만 하나의 캔버스 안에서 마주한다. 위쪽에는 여러 색이 뒤엉킨 복잡한 구성이 있고 아래쪽에는 긴 곡선으로 압축된 검은 형상이 있다. 색채의 밀도와 형태의 단순함이 서로 대비되면서 작품 전체의 균형을 만든다.
상단의 작은 직사각형과 하단의 검은 형상 사이에는 넓은 붉은색의 공간이 놓여 있다. 황토색과 붉은색의 경계에서 검은 형상까지 상당한 거리가 유지되면서 두 영역은 서로 독립된 위치를 차지한다. 관람자의 시선은 먼저 붉은 바탕 위의 검은 형상에 머물렀다가 상단의 작은 직사각형으로 이동한다. 복잡한 색채와 단순한 윤곽을 번갈아 바라보는 과정에서 작품의 두 구조가 연결된다.
쉬가예프의 1980년대 작품들과 비교하면 ‘만남’의 간결한 구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1986년 ‘수중 세계’에서는 여러 물고기와 수초, 둥근 기호들이 짙푸른 공간에 함께 등장했다. 물고기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고 청색과 보라색, 붉은색과 노란색이 복잡하게 겹쳤다. 1987년 ‘납치’에서는 붉은 짐승의 몸과 바퀴, 원형과 기호들이 길게 이어지며 강한 이동감을 만들었다. 1989년 ‘호숫가’에서는 붉은 덩어리와 청록색의 형상, 원형과 십자형 기호가 넓은 청색의 공간에 흩어져 있었다.
‘만남’에서는 이러한 복잡한 구성 요소들이 크게 줄어들었다. 동물을 연상시키는 검은 형상과 상단의 작은 추상적 이미지, 넓은 색면이 작품을 이루는 주요 요소다. 선과 색채의 수가 줄어들면서 각각의 형태가 차지하는 비중은 커졌다. 특히 검은 형상은 캔버스 전체에서 유일하게 강한 윤곽을 가진 대상으로 남아 있어 작은 움직임과 색채의 변화까지 두드러진다.
1990년의 ‘매의 위엄’과 비교하면 같은 시기에 쉬가예프가 얼마나 다른 구성을 탐색했는지도 드러난다. ‘매의 위엄’에서는 매와 거대한 원형, 빛의 기둥, 뿔을 닮은 곡선과 반복적인 문양이 한 작품에 등장했다. 보라색과 청록색, 분홍색과 노란색이 서로 다른 영역을 이루면서 자연의 생명체와 상징적인 형상들이 복잡하게 결합했다.
‘만남’에서는 붉은색과 황토색, 검은색을 중심으로 색채를 정리하고 동물의 형상도 긴 곡선으로 압축했다. ‘매의 위엄’이 여러 형상과 기호를 한 공간에 결합했다면 ‘만남’은 상징적 형상 하나와 추상적 이미지 하나를 넓은 색면 안에 배치했다. 같은 해의 두 작품은 쉬가예프가 복합적인 구성과 간결한 구성 모두에서 인간과 자연, 신화적 형상의 관계를 탐색했음을 보여준다.
‘만남’에서 붉은색이 차지하는 비중도 중요하다. ‘납치’에서는 붉은색이 짐승의 몸을 이루며 작품을 가로질렀고, ‘호숫가’에서는 중앙의 복잡한 형상을 만드는 주요 색채로 사용됐다. ‘만남’에서는 붉은색이 하나의 대상에서 벗어나 넓은 공간을 이룬다. 붉은색의 역할이 형상을 묘사하는 데서 형상을 둘러싼 공간을 구성하는 방향으로 확장된 것이다.
검은색도 형상과 공간을 함께 만든다. 중앙의 긴 곡선은 검은색을 바탕으로 하고 하단에는 넓은 검은 면이 놓여 있다. 두 부분은 서로 가까이 있지만 형태와 질감에서 차이를 보인다. 긴 곡선에는 황갈색과 녹색의 작은 흔적이 남아 있고 하단의 검은 면은 비교적 단순하다. 검은색이 독립적인 형상과 작품의 바닥을 동시에 구성하면서 붉은색의 넓은 영역에 안정감을 부여한다.
상단의 황토색은 붉은색과 검은색 사이에서 색채의 강도를 조절한다. 따뜻하고 밝은 황토색이 넓게 펼쳐지면서 중앙의 붉은색은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작은 직사각형은 황토색의 여백 속에서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내부의 복잡한 색채는 아래쪽의 간결한 형상과 대비된다. 쉬가예프는 넓은 단색의 영역을 이용해 작은 이미지와 상징적 형상의 존재감을 높였다.
검은 형상의 양쪽 끝은 서로 다른 각도로 솟아 있다. 왼쪽 끝은 완만한 곡선을 따라 올라가고 오른쪽 끝은 더 날카롭고 길게 뻗는다. 중앙이 낮게 내려앉은 곡선은 전체적으로 초승달을 닮았지만 아래쪽의 다리 형태가 더해지면서 동물의 몸으로도 읽힌다. 하나의 형태 안에서 자연의 생명체와 기하학적 기호가 겹치는 구성이다.
쉬가예프의 후기 회화에서 동물은 자연의 일부이면서 인간의 기억과 신화적 상상력을 담는 형상으로 확장됐다. 사람과 동물, 전통 문양과 기호가 서로 다른 관계를 맺으며 하나의 공간을 이루는 작업도 이어졌다. ‘만남’에서는 이러한 조형적 관심이 긴 곡선과 넓은 색면의 관계로 압축된다. 구체적인 동물의 신체를 세밀하게 묘사하는 대신 뿔을 닮은 윤곽과 짧은 다리, 어두운 그림자를 통해 상징적 형상을 완성했다.
작품 상단의 직사각형은 이러한 압축된 구성에 또 다른 층을 더한다. 작은 공간 안에 녹색과 갈색, 붉은색과 노란색이 겹치면서 여러 형상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듯한 인상을 만든다. 아래쪽의 검은 형상이 명확한 외곽을 지닌 것과 달리 직사각형 내부에서는 색채의 경계가 흐려진다. 쉬가예프는 두 영역의 차이를 통해 구체적인 윤곽과 추상적인 붓질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했다.
작품의 세로형 비례 역시 구성을 강화한다. 상단의 작은 직사각형과 하단의 긴 곡선이 위아래로 놓이고 그 사이를 황토색과 붉은색의 넓은 면이 연결한다. 검은 형상의 양쪽 끝은 수평으로 길게 벌어져 세로형 캔버스에 안정적인 균형을 만든다. 상단의 작은 직사각형은 중앙에 가깝게 배치돼 아래쪽의 긴 형상과 시각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쉬가예프는 ‘만남’에서 상징적 형상을 간결하게 남기면서도 물감의 질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붉은색의 넓은 면에는 미세한 붓질이 남아 있고 검은 형상의 표면에는 여러 색이 겹쳐 있다. 하단의 검은색과 붉은색이 만나는 부분에는 거친 흔적이 드러나며 상단의 작은 직사각형에도 붓질의 방향과 색채의 겹침이 남아 있다. 넓은 색면과 작은 이미지, 상징적 형상이 서로 다른 질감을 지니면서 작품의 구조가 더욱 분명해진다.
‘만남’은 쉬가예프가 초기 판화에서 보여준 현실의 관찰과 후기 회화에서 발전시킨 신화적 상상력 사이의 관계를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사람과 동물의 구체적인 모습을 새겼던 초기 작업에서 출발해 동물의 신체와 기호를 결합하고, 자연의 형상을 단순화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1990년의 ‘만남’에서는 동물을 연상시키는 긴 곡선이 하나의 상징적 형상으로 자리하고, 상단의 추상적 이미지와 넓은 색면이 그 주변을 구성한다.
붉은 바탕 위에 선 검은 형상은 작은 색채의 흔적을 품고 양쪽 끝을 길게 뻗는다. 상단의 황토색 공간에는 여러 색이 겹친 직사각형이 놓여 있고 하단의 검은 면은 작품 전체에 무게를 더한다. 복잡한 이미지와 간결한 윤곽, 넓은 색면이 서로 다른 위치에서 균형을 이루며 하나의 회화를 완성한다. 쉬가예프가 자연의 생명체와 신화적 형상을 다뤄온 방식은 ‘만남’에서 절제된 색채와 강한 윤곽으로 응축됐다. 붉은 대지 위의 검은 형상과 상단의 추상적 이미지는 서로 다른 조형적 세계가 한 캔버스에서 만나는 순간을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