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과 직무 대신 과제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스쿼드 운영이 속도와 협업을 동시에 이끈다”
[KtN 임우경기자] 기업이 커질수록 사일로(silo) 현상은 강화된다. 마케팅은 마케팅의 논리로, 영업은 영업의 논리로 움직인다. 프로젝트가 실패했을 때 “그건 내 부서 일이 아니었다”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한국 뷰티 산업의 빠른 전개 속도 속에서는 이러한 사일로 구조가 치명적인 병목이 된다.
글로벌 대기업에서는 프로젝트마다 여러 부서 간 조율이 필요해 의사결정이 길어지기 일쑤다. 반면 K-뷰티 기업은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아젠다 중심 조직, 즉 ‘스쿼드 운영’ 방식을 채택했다.
아젠다 조직의 구조
아젠다 조직은 말 그대로 과제(agenda)를 기준으로 꾸려진 임시 조직이다. 특정 브랜드의 론칭, 신제품 개발, 프로모션 기획처럼 단기 목표가 주어지면, 관련 기능을 가진 인력들이 부서 구분 없이 하나의 팀을 이룬다.
여기에는 마케팅, 영업, 상품기획, 데이터 분석, 디자인 인력이 동시에 참여한다. 이들은 기존 소속 부서를 떠나지 않지만, 일정 기간 동안은 해당 아젠다의 목표 달성이 1순위가 된다. 따라서 부서 단위의 책임보다 과제 중심의 책임이 강조된다.
목표·기간·예산의 명확화
스쿼드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목표, 기간, 예산을 명확히 설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3개월 안에 매출 50억 원을 달성하는 신규 브랜드 런칭”이라는 목표가 주어지면, 참여 인원 모두가 같은 수치와 기간을 공유한다.
이렇게 구체적 수치로 명시된 목표는 부서별 KPI와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단일 목표가 구성원들을 묶어주는 기준이 된다. 이는 한국 뷰티 산업이 빠른 시장 대응을 가능하게 하는 숨은 장치다.
크로스펑셔널 팀이 주는 효과
아젠다 조직의 핵심은 크로스펑셔널(cross-functional) 협업이다. 상품기획자가 소비자 인사이트를 설명하고, 데이터 분석가가 판매 예측 모델을 제시하며, 마케팅 담당자가 캠페인 아이디어를 더한다. 이 과정이 동시에 이뤄진다.
전통적 방식처럼 기획 → 검토 → 실행으로 이어지는 순차적 프로세스가 아니라, 병렬적 협업이 가능하다. 그만큼 시간이 단축되고, 각 부서 간 관점 차이도 현장에서 조율된다.
‘내 부서 일이 아닌데요’의 소멸
아젠다 조직 운영의 가장 두드러진 효과는, 프로젝트 실패 시 책임 공방이 줄어든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마케팅이 준비가 늦었다”, “영업이 협조하지 않았다”는 식의 말들이 쉽게 나왔다. 하지만 아젠다 조직에서는 모든 구성원이 목표와 결과를 함께 공유하기 때문에, 실패는 곧 팀 전체의 경험으로 남는다.
중견 화장품 기업 관계자는 “스쿼드 체계가 자리 잡은 후 ‘내 일이 아니다’라는 말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실패는 곧 기록되고, 팀 단위로 회고를 진행하며 개선안이 도출된다. 이 루프가 반복되며 조직 전체의 대응 속도는 점차 빨라진다.
속도와 협업의 동시 달성
아젠다 조직의 도입은 단순한 협업을 넘어 속도의 혁신으로 이어졌다. 글로벌 브랜드가 신규 제품 기획에 12~18개월을 소요한다면, K-뷰티 기업은 아젠다 스쿼드를 통해 이를 6개월 이하로 단축한다.
이는 단순히 인력을 줄여 투입한 결과가 아니라, 병렬 협업이 가능하기 때문에 생긴 차이다. 소비자 인사이트 수집, R&D, 디자인, 마케팅 전략이 동시에 진행되니, 불필요한 대기 시간이 줄어든다.
리스크와 보완 과제
물론 아젠다 조직에도 한계는 있다. 단기 목표에 집중하는 과정에서 장기적 브랜드 전략이 희석될 위험이 있고, 인력 배치가 중복되면 효율성이 떨어질 수 있다. 따라서 아젠다 조직은 모든 프로젝트에 적용되기보다는, 속도가 중요한 전략 과제에 선별적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팀원들이 본래 소속 부서의 업무를 병행해야 하는 경우, 과중한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기업들은 일정 규모 이상의 프로젝트에는 전담 인력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균형을 맞추고 있다.
글로벌 확산 가능성
흥미로운 점은 해외 기업들이 이 방식을 점차 벤치마킹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IT 기업들은 이미 ‘스쿼드’와 ‘애자일’ 방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했지만, 뷰티 산업에서는 K-뷰티가 이를 선도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특히 일본과 동남아 기업들은 K-뷰티식 아젠다 조직 운영을 시험하면서, 빠른 시장 대응에 적합한 모델로 주목하고 있다.
사일로를 넘어선 유연성
아젠다 조직은 단순한 협업 방식이 아니라, 사일로를 해체하고 유연성을 확보하는 구조적 장치다. ‘내 부서 일이 아니다’라는 말이 사라지고, 목표·기간·예산을 공유하는 방식이 속도와 품질을 동시에 높인다.
K-뷰티가 글로벌 시장에서 보여주는 빠른 기획과 실행력의 배경에는, 바로 이 아젠다 중심 운영 방식이 자리한다. 권한 위임과 바텀업 구조에 이어, 아젠다 조직은 K-뷰티가 사일로를 넘어 협업과 속도를 동시에 달성하는 방법론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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