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카펫보다 복원·큐레이션·아카이브로 향한 명품 브랜드의 문화 전략
[KtN 임우경기자]홍콩 M+ 상영관 대형 스크린에는 M+, AAGFF, CHANEL 로고가 함께 걸렸다. 배우가 드레스를 입고 포토월 앞에 선 자리도, 신제품 캠페인 필름이 공개된 무대도 아니었다. 샤넬(CHANEL)은 제3회 M+ 아시아 아방가르드 영화제(AAGFF)에서 영화의 화려한 표면보다 영화가 보존되고, 상영되고, 다시 해석되는 기반 쪽에 이름을 올렸다.
샤넬이 영화를 말해온 시간은 짧지 않다. 패션 하우스와 영화의 오래된 접점은 배우의 몸을 통해 드러났다. 레드카펫 위의 드레스, 캠페인 필름 속 배우, 브랜드 앰배서더, 영화제 포토콜이 익숙한 방식이었다. 영화는 샤넬에 현대성과 감각, 스타의 이미지를 제공했고, 샤넬은 영화에 의상과 스타일, 화제성을 제공했다. 서로가 서로의 이미지를 빌리는 관계였다.
홍콩 M+와의 협력은 조금 다른 층위에 놓인다. 샤넬은 2023년 M+의 주요 파트너가 됐고, M+ 무빙이미지 프로그램 강화를 위해 ‘CHANEL Lead Curator, Moving Image’ 직책을 후원했다. 협력 범위에는 M+ 시네마 프로그램, 홍콩 영화 유산 복원 사업, 아시아 아방가르드 필름 관련 장기 사업이 포함됐다. 한 번의 영화제 협찬보다 깊고, 한 편의 캠페인 영상보다 느린 방식이다.
제3회 AAGFF는 샤넬의 달라진 영화 접근법을 보여준 현장이었다. 올해 주제는 ‘Space Enter Shift’였다. 상영관 안에서만 영화가 진행되지 않았다. 미술관 내부에는 탁구대가 놓였고, 계단형 공간에서는 라이브 시네마가 열렸다. 워크숍과 리스닝 세션, 토크 프로그램도 함께 진행됐다. 영화제라는 이름을 달았지만, 형식은 극장 중심의 상영회보다 무빙이미지 플랫폼에 가까웠다.
실케 슈미클(Silke Schmickl) M+ 샤넬 시니어 큐레이터 겸 무빙이미지 부문장은 공간을 렌즈 기반 매체의 핵심 원리로 설명했다. 올해 프로그램은 해당 설명을 상영관 밖으로 옮겼다. 영화는 스크린 안의 완성물로만 놓이지 않았다. 관객의 이동, 미술관의 구조, 라이브 공연, 소리, 참여형 설치, 기술 장치가 함께 들어왔다. AAGFF가 보여준 영화는 극장 좌석에 앉아 보는 대상이라기보다, 공간 안에서 경험되는 시간 기반 예술에 가까웠다.
샤넬 입장에서 영화는 여전히 강력한 현대성의 언어다. 패션은 계절마다 새로워져야 하지만, 영화는 오래 남는다. 복원된 필름, 다시 상영되는 실험영화, 미술관 컬렉션에 들어간 무빙이미지는 광고보다 긴 시간을 가진다. 브랜드가 해당 영역을 후원하면 단기 판매보다 긴 문화적 시간을 얻는다. 샤넬은 상품을 직접 말하지 않으면서도 현대성, 창작, 여성, 이미지, 기억, 아카이브라는 단어들과 나란히 놓인다.
아시아 아방가르드 영화라는 선택도 가볍지 않다. 상업 배급망에서 오래 살아남기 어려운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는 기관의 수집과 복원, 연구 없이는 다음 세대 관객에게 닿기 어렵다. 필름과 비디오테이프, 초기 디지털 포맷으로 남은 작업은 보존 비용과 기술 문제를 피하기 어렵다. 작가가 활동한 지역과 언어권을 넘어 유통되기도 쉽지 않다. 샤넬 후원은 이 대목에서 실제 효용을 갖는다. M+는 더 넓은 작품군을 다루고, 작가를 초청하고, 복원과 상영 프로그램을 확장할 여지를 얻는다.
백남준(Nam June Paik)의 ‘Wrap Around the World’와 쉬빙(Xu Bing)의 ‘Dragonfly Eyes’가 같은 프로그램 안에 놓인 점은 올해 AAGFF의 방향을 압축한다. 백남준의 1988년 위성 프로젝트는 기술을 연결과 공동 창작의 가능성으로 바라본 시기의 산물이다. 쉬빙의 2017년작은 공공 감시카메라 영상을 재구성해 이미지 과잉과 감시 체계의 시대를 드러낸다. 위성이 낙관의 신호였다면, 감시카메라는 이미 연결돼버린 사회의 흔적이다.
라리사 산수르(Larissa Sansour)와 쇠렌 린드(Søren Lind)의 ‘A Sunken Tale of Losses Delayed’는 공간의 문제를 지정학으로 밀고 간다. 팔레스타인, 망명, 식민주의, 약탈 문화재의 서사는 미술관 안의 세련된 프로그램이 쉽게 다루기 어려운 소재다. 올해 AAGFF가 단순히 미감 좋은 영상 예술 행사에 머물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술과 소유, 이동과 기억의 문제가 같은 틀 안에 들어왔다.
다만 샤넬의 선택을 문화적 선의로만 읽을 수는 없다. 명품 브랜드의 후원은 언제나 양방향으로 움직인다. 자본은 기관에 필요한 비용과 국제적 가시성을 제공한다. 작가 초청, 작품 복원, 프로그램 확장, 관객 접점 확대에도 실질적으로 기여한다. 동시에 브랜드는 실험성과 예술적 권위, 미술관의 신뢰를 자신의 이미지 자산으로 가져간다. 후원이 공공성을 갖는 순간에도 브랜드는 손해 보지 않는다.
아방가르드라는 말은 원래 제도와 시장, 관습에 대한 거리 두기를 포함했다. 대형 미술관과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가 결합하면 실험영화의 거친 결은 세련된 문화행사의 언어로 정돈될 수 있다. 상영관 스크린의 로고, 국제 홍보, 리셉션, 매끈한 행사 그래픽은 관객에게 안정감을 주지만, 작품이 가진 불편함을 부드럽게 감쌀 위험도 있다. 샤넬이 작품의 내용을 정했다는 근거는 없다. 다만 후원자의 이름이 크게 보이는 형식은 문화와 자본의 거리를 다시 보게 만든다.
큐레이터 직책 앞에 브랜드명이 붙은 사실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M+는 큐레이션 자율성을 강조했고, 공개 인터뷰에서도 샤넬은 예술가와 영화인, 문화 실천가, 관객을 연결하는 역할을 돕는 위치로 설명됐다. 확인된 범위 안에서 샤넬이 작가 선정이나 작품 해석에 관여했다는 근거는 없다. 그러나 문화기관의 전문성과 글로벌 브랜드의 자본이 한 화면에 놓이면 관객은 후원과 영향력의 경계를 의식하게 된다.
샤넬이 영화를 말하는 이유는 여기서 분명해진다. 영화는 제품을 팔기 위한 배경에 그치지 않는다. 브랜드가 문화적 시간을 확보하는 통로다. 레드카펫은 빠르게 소비되지만, 복원과 컬렉션은 오래 남는다. 스타의 착장은 다음 시즌으로 밀려나지만, 아카이브와 미술관 프로그램은 브랜드 이름을 예술사와 기관의 언어 안에 남긴다.
샤넬은 M+ AAGFF에서 영화 사랑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영화가 보존되고, 연구되고, 젊은 관객에게 다시 도착하는 통로에 들어갔다. 해당 선택은 문화 후원의 공공성을 갖지만, 럭셔리 브랜드가 예술의 권위를 자신의 이미지로 회수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샤넬이 말하는 영화는 순수한 예술 찬가도, 노골적인 광고도 아니다. 오늘의 명품 브랜드가 문화의 표면보다 오래 남는 기반을 통해 자신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