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이화수아티스트]우리가 자산이라 믿는 것들의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가. 화폐도, 부동산도, 주식도 결국은 "이것이 가치를 저장한다"는 사회 구성원들의 공통된 믿음 위에서 성립해 왔다. 초기에는 회의적 시각이 지배적이었던 비트코인 역시, 가치 저장 수단이라는 인식이 축적되면서 어엿한 자산의 지위를 획득했다.
반면 미술 시장은 여전히 이러한 사회적 신뢰 기반이 취약한 영역이다. 전시장은 관람객으로 붐비지만, 정작 미술품이 주식이나 부동산과 같은 정당한 자산으로 인식되기까지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신뢰 부재가 낳는 불안정한 생태계
신뢰 기반이 취약한 시장은 그만큼 변동성도 크다. 한때 시장의 주목을 받던 작가가 몇 년 지나지 않아 거래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는 일이 드물지 않다. 국내에서 장기간 가격 방어력을 인정받는 작가는 이우환, 김환기 등 손에 꼽을 정도다. 17세기 네덜란드를 휩쓴 튤립 투기의 구조적 취약성과 다르지 않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창작자에게 돌아가는 몫이다. 작품이 경매 등 2차 시장에서 고가에 거래되며 자산 가치를 인정받아도, 정작 그 작품을 만든 작가에게는 재판매 수익이 거의 돌아가지 않는다. 이른바 '추급권' 제도가 사실상 부재한 국내 현실에서, 작가들은 유행과 투기적 수요에 따라 소비되고 잊히는 구조에 놓여 있다.
해법은 '투명성'과 '검증 인프라'
이 문제를 풀 실마리는 거래의 투명성 확보에 있다고 본다. 작품의 거래 이력, 감정 평가 내역, 소유권 변동 과정을 표준화해 기록하고, 공신력 있는 제3의 기관이 검증하는 체계가 우선 마련돼야 한다.
여기에 블록체인 기반 디지털 인증서를 더하면 위작 유통과 가격 조작 리스크를 상당 부분 낮출 수 있다. 이런 인프라가 뒷받침될 때 비로소 미술품은 특정 계층의 사적 소비재가 아닌, 신뢰할 수 있는 대체 자산으로 인식을 넓혀갈 수 있을 것이다.
신뢰 인프라가 갖춰진 다음에는 제도적 뒷받침도 필요하다. 기업이 미술품을 자산 포트폴리오의 일부로 투명하게 소장·관리하는 문화가 자리 잡으려면, 현행 법인 세제 혜택의 폭을 넓히는 방안을 검토할 만하다. 또한 음악 산업에서는 보편화된 저작권 로열티 시스템이 미술계에는 사실상 없다는 점도 아쉬운 대목이다. 원작이 재생산·유통될 때마다 작가에게 정당한 지식재산권 수익이 돌아가는 구조가 마련돼야, 창작자들이 안정적으로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다.
시장이 커지면 얻는 것들
미술 시장이 신뢰를 바탕으로 건강하게 성장한다면 다음과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먼저 자산 포트폴리오의 다각화다. 미술품은 인플레이션 헤지 기능이 우수하고 경제 위기 속에서도 고유 가치를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특성이 있어, 주식·부동산과 병행할 수 있는 대안 자산으로서 가치가 있다.
또한 창작 생태계의 선순환도 기대된다. 시장 규모가 커지면 소수 블루칩 작가뿐 아니라 중견·신진 작가층에도 자본이 흘러들어, 생계 걱정 없이 창작에 몰두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
연관 산업의 성장도 빼놓을 수 없다. 아트 어드바이저리, 법률·세무 컨설팅, 과학적 감정·보존, 프리미엄 아트 물류 등 지식 기반 서비스업이 함께 성장하며, 최근에는 미술품 지식재산권을 활용한 기술 산업과의 융합도 확대되는 추세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정서 자본의 축적이다. 경제학적으로 미술은 '가치재'로 분류된다. 기업의 미술품 소장, 지자체의 미술관 확충, 개인의 일상적 예술 향유가 늘어날수록 사회 전반의 문화적 안목과 정서적 안정감도 함께 높아질 것이다.
그림 한 점이 지니는 상징적 무게
미술품의 가치는 경제적 측면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살바토르 문디>가 약 5,000억 원에 낙찰돼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의 소장품이 된 사례, 조르주 쇠라의 작품에 글로벌 자산가들이 대규모 투자를 이어가는 사례가 이를 보여준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걸작을 소유함으로써 자산가는 단순한 부의 소유자를 넘어 인류의 문화유산을 지키는 존재로 자리매김하려 한다. 사우디의 사례 역시 자원 부국이라는 이미지를 넘어 문화국가로 도약하려는 국가 브랜딩 전략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과거 미국이 팝아트를 통해 문화적 영향력을 넓혔던 흐름과도 맥이 닿아 있다.
남은 과제
미술 시장이 투기적 유행에 좌우되는 불안정한 구조를 넘어 신뢰받는 대체 자산으로 자리매김하려면, 세 가지 과제가 함께 풀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거래 이력·감정·소유권을 아우르는 투명한 검증 인프라 구축이다. 둘째, 추급권과 저작권 로열티 도입을 통한 창작자에 대한 정당한 수익 배분이다. 셋째, 미술을 특수 계층의 전유물이 아닌 일상적 교양이자 자산으로 받아들이는 사회적 인식 전환과 관련 교육의 확대다.
이 세 가지가 하나씩 풀려갈 때, 미술 시장은 작가와 투자자, 나아가 우리 사회 전체가 함께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건강한 생태계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