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 비평가주간 초청작으로 28회 개막…전쟁 속 여성 공동체와 보정 사회의 통제 함께 다뤄
“남성 금지, 무기 금지, 정치 금지.”
[KtN 이은선기자]예멘 내전이 이어지는 마을의 여성 전용 주유소에는 세 가지 규칙이 걸려 있다. 전쟁과 무장 세력, 남성 중심 질서가 주유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여성들이 세운 경계다. 8월 20일 개막하는 28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해당 공간을 배경으로 한 사라 이스하크(Sara Ishaq) 감독의 ‘정거장’을 개막작으로 선정했다.
김미조 감독이 연출한 공식 트레일러 ‘FLICKER’에는 프락시노스코프와 타자기, 텔레비전, CCTV가 등장한다. 배우 이연이 연기한 인물은 자신을 관찰하고 보정하는 장치를 부순다. 전쟁 속 여성들의 생존 공간과 완벽한 얼굴을 요구하는 기술 환경이 올해 영화제의 첫 상영과 매 작품의 시작을 나눠 맡는다.
28회 영화제의 슬로건은 ‘F를 상상하다(Reimagining F)’다. 실패와 흔들림을 지워야 할 결함으로 다루지 않고, 기존 질서에서 벗어나는 출발로 바라보겠다는 뜻을 담았다. 개막작과 트레일러는 슬로건을 설명하는 두 개의 축이다. ‘정거장’은 여성들이 직접 규칙을 만들고 행동하는 과정을, ‘FLICKER’는 사람을 일정한 기준에 맞추려는 감시와 보정에 대한 거부를 담았다.
칸 초청작을 개막작으로
‘정거장’(The Station, 원제 Al Mahattah)은 2026년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경쟁 부문에 초청돼 처음 공개됐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칸 상영을 마친 신작을 개막작으로 배치하면서 작품의 국제적 이력과 올해 영화제의 주제를 함께 앞세웠다.
라얄이 운영하는 주유소는 여성들이 연료를 구하는 장소이자 외부의 폭력을 잠시 피해 일상을 이어가는 공간이다. 남성과 무기, 정치의 출입을 막은 규칙에는 전쟁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생활의 범위를 지키기 위해 마련한 최소한의 질서가 담겼다.
전쟁터로 떠났던 라얄의 언니가 비밀을 안고 돌아오고, 열두 살 남동생이 소년병으로 끌려갈 위기에 놓이면서 주유소의 안전도 흔들린다. 세 가지 금지 규칙만으로는 가족과 공동체를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닥친다. 라얄과 언니, 주유소를 오가는 여성들은 남동생을 구하기 위한 계획에 나선다.
전쟁을 다룬 영화에서 여성은 가족을 잃거나 피란길에 오르는 인물로 자주 배치된다. ‘정거장’은 여성들에게 주유소 운영과 위험 판단, 구출 계획을 맡긴다. 여성의 고통을 보여주는 데 머물지 않고 전쟁 속에서 생활을 꾸리고 행동을 결정하는 과정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는다.
공동체 안의 여성들을 한목소리로 묶지 않은 설정도 중요하다. 라얄과 언니를 비롯한 인물들은 서로 다른 생각과 조건을 지닌다. 갈등이 사라진 뒤 연대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안은 채 공동의 위기에 대응한다. 여성 공동체를 이상적인 집단으로 내세우기보다 협력에 이르는 과정 자체를 서사에 담은 구성이다.
다큐멘터리에서 극영화로
‘정거장’은 예멘 내전 당시 수도 사나에 실제로 생겨난 여성 전용 주유소에서 출발했다. 사라 이스하크 감독은 처음에는 해당 공간을 다큐멘터리로 기록하려 했으나 촬영에 참여하는 여성들의 안전을 고려해 극영화로 방향을 바꿨다.
분쟁 지역에서 카메라는 현실을 기록하는 수단이면서 촬영된 사람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장치이기도 하다. 실제 인물을 직접 촬영하지 않고 허구의 인물과 사건을 만든 선택은 현실을 피하기 위한 결정과 거리가 있다. 카메라 앞에 설 수 없는 여성들의 경험을 영화로 옮기기 위해 형식을 바꾼 것이다.
극영화로 전환하면서 생기는 부담도 남는다. 실제 공간에 모였던 여성들의 경험은 가족 관계와 계층,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달랐을 가능성이 크다. 여러 사람의 삶을 한 편의 영화로 압축하는 과정에서 예멘 내전의 복잡한 현실이 국제 관객에게 익숙한 연대와 구출의 이야기로 정리될 위험도 있다.
작품의 평가는 여성 인물이 능동적으로 행동한다는 설정만으로 끝나기 어렵다. 인물들의 차이가 대사와 행동에서 충분히 드러나는지, 여성 공동체가 선한 집단으로 단순화되지 않는지, 유머가 전쟁의 무게를 덜어내는 장치로 소비되지 않는지는 실제 상영을 통해 확인해야 한다.
약 10년에 걸쳐 개발된 ‘정거장’은 2025년 베니스영화제 산업 프로그램 ‘파이널 컷 인 베니스’에서 베니스 비엔날레상을 받았다. 사라 이스하크 감독은 2011년 예멘 혁명을 기록한 단편 다큐멘터리 ‘카라마에는 벽이 없다’(Karama Has No Walls, 2012)로 제86회 아카데미영화상 최우수단편다큐멘터리 부문 후보에 올랐다. 첫 장편 다큐멘터리 ‘멀버리 하우스’(The Mulberry House, 2013)에 이어 ‘정거장’으로 첫 극영화 장편을 내놨다.
다큐멘터리 작업을 이어온 감독의 이력은 ‘정거장’의 제작 방식과 맞물린다. 사실을 직접 촬영하는 데서 출발했던 작업이 촬영 대상의 안전을 위해 허구의 서사로 바뀌었다. 실제 사건을 얼마나 그대로 재현했는지보다 기록할 수 없는 현실을 극영화 안에 어떻게 남겼는지가 작품의 주요 평가 지점이 된다.
깜박이는 이미지에서 감시 기계까지
공식 트레일러 ‘FLICKER’는 영화가 만들어지는 원리에서 출발한다. 프락시노스코프는 조금씩 다른 그림을 빠르게 돌려 정지된 그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초기 영상 장치다. 그림과 그림 사이의 끊김과 깜박임이 하나의 움직임을 만든다.
김미조 감독은 초기 영화의 떨리는 이미지를 오늘날의 매끄러운 보정 기술과 연결했다. 타자기와 텔레비전, CCTV를 한 공간에 놓고 기록과 전송, 감시로 이어진 기술의 변화를 압축했다. 트레일러 속 인물은 자신을 촬영하고 수정하는 장치 앞에 서 있다가 기계를 직접 파괴한다.
보정되지 않은 얼굴과 통제되지 않는 감정, 실패할 자유를 지키려는 인간의 반격을 담았다는 연출 설명도 올해 슬로건과 연결된다. 영화의 시작을 알린 깜박임이 결함이 아니라 움직임을 만드는 조건이었다는 점을 끌어와, 흔들리지 않는 결과만을 요구하는 사회적 기준을 되짚는다.
트레일러에 쓰인 상징은 직접적이다. CCTV는 감시를 나타내고, 파괴되는 기계는 통제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뜻한다. 아날로그 장치와 현대 기술을 함께 놓고 인간성을 말하는 방식도 영상 작업에서 여러 차례 사용돼 왔다. ‘FLICKER’가 익숙한 상징을 넘어 영화제의 문제의식을 얼마나 밀도 있게 담았는지는 전체 영상의 리듬과 반복 상영 과정에서 평가될 부분이다.
보정 기술을 사용하는 개인의 선택과 특정한 얼굴을 정상으로 규정하는 사회적 기준도 구분해야 한다. 보정하지 않은 얼굴만을 자연스럽고 진실한 얼굴로 내세우면 또 다른 기준이 생길 수 있다. ‘FLICKER’가 겨냥하는 대상은 개인의 보정 행위보다 얼굴과 감정을 끊임없이 평가하고 수정하도록 만드는 환경에 가깝다.
피해 재현에서 행동과 판단으로
‘정거장’과 ‘FLICKER’는 다루는 현실과 형식이 다르다. ‘정거장’에는 내전과 무장 세력, 소년병 강제 징집이라는 직접적인 생존의 위협이 놓여 있다. ‘FLICKER’는 감시와 보정, 완벽한 이미지를 요구하는 기술 환경을 다룬다.
영화제는 서로 다른 두 작품을 통제에 맞서는 행동으로 연결했다. ‘정거장’의 여성들은 외부의 폭력에서 생활 공간을 지키기 위해 규칙을 세운다. 규칙만으로 가족을 보호할 수 없게 되자 직접 계획을 마련한다. ‘FLICKER’의 인물은 자신을 관찰하는 기계를 부수고 관리되는 이미지에서 벗어나려 한다.
여성을 피해의 증거로만 내세우지 않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인물로 옮기려는 방향도 두 작품에서 함께 나타난다. 전쟁 피해 여성과 보정 대상이 된 얼굴이 각각 공간의 운영자와 기계를 파괴하는 인물로 바뀐다. 28회 영화제는 여성의 존재를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누가 규칙을 만들고 행동을 결정하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전쟁과 보정 기술을 같은 무게로 다룰 수는 없다. 내전과 강제 징집은 개인의 태도로 해결할 수 없는 정치·군사적 폭력이다. 얼굴과 감정을 관리하는 기술도 기계 하나를 부수는 행동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플랫폼과 산업, 노동과 사회적 기준이 함께 작동한다.
두 작품을 ‘실패’와 ‘흔들림’이라는 말로 넓게 묶을수록 각 사안이 지닌 구체적인 조건이 흐려질 가능성도 있다. 영화제의 슬로건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누가 실패할 기회를 얻는지, 실패한 뒤 다시 시작할 자원을 누가 갖는지, 여성의 선택을 제한하는 제도와 산업 구조가 무엇인지까지 프로그램 안에서 다뤄야 한다.
개막작 한 편과 트레일러 한 편
칸 비평가주간 초청작을 개막작으로 선정한 결정은 작품의 화제성과 영화제의 주제를 함께 확보하려는 선택이다. 국제영화제 이력은 관객의 관심을 높일 수 있지만, 해외 초청 경력만으로 서울 상영의 의미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예멘 내전과 여성 전용 주유소의 배경, 다큐멘터리에서 극영화로 바뀐 제작 과정이 국내 관객에게 얼마나 충분히 전달되는지가 중요하다.
공식 트레일러도 슬로건을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체 프로그램의 문제의식과 연결돼야 한다. 감시와 보정 기술이 여성 배우와 창작자의 노동, 이미지 사용, 제작 환경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까지 논의가 이어질 때 ‘FLICKER’의 상징은 영화제 안에서 구체성을 얻을 수 있다.
개막작과 공식 트레일러는 28회 영화제의 입구다. 전체 상영작이 국가와 세대, 계층, 노동 조건이 다른 여성들의 경험을 얼마나 폭넓게 담는지, 작품 상영 뒤 어떤 토론을 마련하는지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7월 28일 오후 3시 마포중앙도서관 세미나실에서 공식 기자간담회를 열고 전체 상영작과 주요 프로그램을 발표한다. 영화제는 8월 20일부터 26일까지 7일간 메가박스 신촌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다.
개막작에는 전쟁 속에서 생활의 경계를 세운 여성들이, 트레일러에는 보정 기계를 부수는 인물이 배치됐다. ‘F를 상상하다’가 선언을 넘어서는지는 이후 공개될 상영작과 포럼, 관객과의 대화에서 가려진다. 실패할 자유를 말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실패 뒤 다시 살아가고 작업할 조건까지 다룰 수 있는지가 28회 영화제의 방향을 결정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