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술집의 즉석 노래 대결…투르게네프 원작·무대본 즉흥연기·35㎜ 필름으로 담아낸 외로운 남자들의 밤

 

[KtN 박준식기자]100달러와 맥주 한 잔이 상품으로 걸리자 낡은 술집에 앉아 있던 남자들이 차례로 노래를 부른다. 술 한 잔을 더 얻으려던 흥정은 즉석 대결로 번지고, 손님들은 누가 가장 잘 부를지를 지켜보기 시작한다. 몇 곡이 이어진 뒤에는 승부를 따지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웃고 떠들던 남자들이 입을 다물고, 술잔을 들던 손도 멈춘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술집을 채우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린다.

샘 A. 데이비스(Sam A. Davis) 감독의 ‘가수들(The Singers)’은 허름한 술집에서 벌어진 노래 대결을 다룬 18분짜리 단편영화다. 2025년 3월 미국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SXSW) 영화·TV 페스티벌에서 처음 상영됐으며, 넷플릭스에는 2026년 2월 13일 공개됐다. 같은 해 3월 15일 열린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서로 침을 교환하는 두 사람(Two People Exchanging Saliva)’과 함께 실사 단편영화상 수상작으로 기록됐다.

넷플릭스는 ‘가수들’을 청소년 관람불가 드라마로 공개했다. 외로운 사람들이 허름한 술집에서 즉석 노래 대결을 벌이며 서로의 진심을 마주하는 이야기다. 뉴욕 지하철에서 오랫동안 노래한 마이크 영(Mike Yung)을 비롯해 포크·블루스 음악가 크리스 스미더(Chris Smither), 호주 오디션 프로그램 ‘더 보이스’ 우승자 주다 켈리(Judah Kelly), 거리 피아니스트 윌 해링턴(Will Harrington), 성악가 매슈 코커런(Matthew Corcoran)이 출연했다.

노래보다 먼저 달라지는 청중의 얼굴

술집 손님들은 한 공간에 모여 있지만 서로의 생활에는 큰 관심이 없다. 술과 돈을 둘러싼 말, 오래된 농담, 몸의 통증과 죽은 사람에 대한 기억이 별다른 순서 없이 오간다. 대화가 끊기면 남자들은 다시 술잔이나 어두운 구석으로 시선을 돌린다.

노래 대결이 시작되면서 흩어졌던 시선이 한곳으로 모인다. 영화는 참가자를 소개하거나 사연을 설명하지 않는다. 점수를 매기는 심사위원도 없고, 우승자를 기다리게 하는 자막과 음악도 사용하지 않는다. 누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얼굴과 목소리, 짧은 대화만으로 드러난다.

카메라는 노래하는 사람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공연을 지켜보던 사람의 눈빛과 굳어진 입술, 미세하게 움직이는 고개를 함께 담는다. 노래가 끝난 직후 찾아오는 정적도 서둘러 잘라내지 않는다. 한 곡을 들은 사람들이 이전과 다른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이 이어진다.

영국 영화 매체 ‘아이 포 필름(Eye for Film)’도 출연진의 가창력과 함께 주름과 거친 피부를 감추지 않은 촬영을 짚었다. 조명 아래 드러난 얼굴이 각 인물의 생활과 세월을 대신 말하며, 노래가 시작된 뒤 낯선 사람들이 잠시 하나의 무리로 바뀐다고 평가했다.

술집 밖의 형편은 달라지지 않는다. 건강이 나아지거나 생활고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영화는 음악을 인생을 뒤집는 기적으로 밀어 올리지 않는다. 같은 공간에 앉아 있으면서도 서로를 외면하던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노래를 끝까지 듣게 된 변화만 남긴다.

마이크 영은 후반부까지 바텐더 자리를 지킨다. 술집을 관리하고 대결을 제안했던 인물이 직접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평가하는 사람과 평가받는 사람의 경계가 사라진다. 다른 손님들의 노래를 듣던 바텐더에게도 말로 꺼내지 않은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이 목소리와 청중의 반응을 통해 전해진다.

데이비스 감독이 작품을 구상한 계기도 마이크 영의 목소리였다. 러시아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Ivan Turgenev)의 동명 단편을 읽던 중 소셜미디어에서 영이 ‘언체인드 멜로디(Unchained Melody)’를 부르는 영상을 접했다. 19세기 러시아 선술집의 노래 대결과 뉴욕 지하철 가수의 공연이 현대 미국 술집을 배경으로 한 영화로 이어졌다.

크리스 스미더와 주다 켈리, 윌 해링턴, 매슈 코커런이 부르는 노래는 한 가지 음악적 색깔로 묶이지 않는다. 포크와 블루스, 대중음악, 피아노 연주와 성악이 술집 안에서 이어진다. 각자의 음색과 창법이 다른 만큼 공연의 분위기도 고르게 정리되지 않는다. 술집은 잘 짜인 음악회장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온 사람들이 잠시 목소리를 꺼내 놓는 장소로 남는다.

넷플릭스 ‘가수들’, 100달러와 맥주 한 잔이 오스카로 번진 18분. 사진=영화스틸,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넷플릭스 ‘가수들’, 100달러와 맥주 한 잔이 오스카로 번진 18분. 사진=영화스틸,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투르게네프의 화자를 지우고 술집 안으로 들어간 관객

투르게네프가 1850년에 발표한 원작에는 농촌 선술집에서 벌어지는 노래 대결과 이를 지켜보는 부유한 사냥꾼 화자가 등장한다. 데이비스 감독은 조지 손더스(George Saunders)의 문학 강의서 ‘어 스윔 인 어 폰드 인 더 레인(A Swim in a Pond in the Rain)’을 통해 작품을 접했다.

영화는 원작의 화자를 없앴다. 술집 손님들의 생활을 바깥에서 설명하거나 평가하는 목소리가 사라지면서 관객은 인물들과 같은 높이에 놓인다. 술집 안에서 오가는 말과 노래를 직접 듣고, 사람들의 반응을 따라가야 한다.

고전소설의 시대와 장소만 현대 미국으로 바꾼 각색과는 차이가 있다. 원작에서 선술집을 관찰하던 외부인의 자리를 비워 두고, 카메라와 관객을 손님들 곁에 앉혔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구경하던 시선보다 같은 공간에서 한 곡을 함께 듣는 시간이 앞에 놓였다.

영화 매체 ‘시네 비주(Cine Bijou)’는 화자를 지운 선택을 작품의 중요한 변화로 평가했다. 관객이 술집 손님들을 내려다보지 않고 옆자리에서 바라보게 됐으며, 즉흥적인 대화가 첫 노래가 나오기 전까지 인물의 성격과 술집의 분위기를 쌓아 올린다고 분석했다.

투르게네프 원작에 담긴 계급과 농촌의 생활 조건은 영화에서 상당 부분 줄었다. 현대판 ‘가수들’은 인물들의 노동과 가족관계, 경제적 처지를 깊이 파고들지 않는다. 남자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술집에 모였는지도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인물의 생활을 넓게 펼치기보다 한밤중에 노래를 부르고 듣는 동안 달라진 태도에 집중한다.

설명을 줄인 선택은 18분이라는 길이 안에서 감정을 모으는 데 효과를 낸다. 동시에 인물의 삶이 노래 한 곡과 얼굴에 남은 세월로 압축됐다는 한계도 남는다. 관객은 출연자들의 상실과 외로움을 짐작할 수 있지만, 해당 감정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까지 알기는 어렵다.

넷플릭스 ‘가수들’, 100달러와 맥주 한 잔이 오스카로 번진 18분. 사진=영화스틸,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넷플릭스 ‘가수들’, 100달러와 맥주 한 잔이 오스카로 번진 18분. 사진=영화스틸,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소셜미디어에서 찾은 얼굴, 대본 없이 진행한 나흘

제작진은 1년 반 동안 소셜미디어와 온라인 영상을 살피며 출연진을 모았다. 데이비스 감독과 캐스팅 디렉터 내털리 린(Natalie Lin)은 기존 영화 오디션에서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직접 연락했다. 온라인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유명인을 섭외하기보다 오랫동안 노래해 왔지만 대중적인 주목을 충분히 받지 못했던 인물들을 찾았다.

출연진 상당수에게 영화 연기는 처음이었다. 데이비스 감독은 정해진 대사를 전달하지 않고 자신의 말투와 경험을 가져와 연기하도록 했다. 촬영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약 40분 떨어진 라하브라 무스 로지(La Habra Moose Lodge)에서 나흘 동안 진행됐다. SXSW에 등록된 제작 정보에도 별도의 각본 없이 완성된 작품으로 적혀 있다.

대본이 없었다고 해서 촬영 전체가 우연에 맡겨진 것은 아니다. 출연진을 고르고 술집을 꾸민 뒤 노래와 인물의 순서를 정하는 과정에는 제작진의 판단이 들어갔다. 즉흥적으로 쌓인 대화와 반응 가운데 어떤 부분을 남길지도 편집 과정에서 결정됐다. 데이비스 감독은 촬영과 편집을 함께 맡았다.

출연자들이 자신의 말과 기억을 사용하면서 대화는 매끄럽게 정리되지 않는다. 말이 겹치고, 한동안 아무도 말을 잇지 못하는 순간도 생긴다. 일반 극영화였다면 덜어냈을 법한 공백이 술집에 실제 사람들이 모여 있는 듯한 분위기를 만든다.

촬영에는 35㎜ 필름이 사용됐다. 휴대전화로 촬영된 온라인 영상에서 출연자를 발견한 제작진은 영화 안에서 같은 얼굴을 필름으로 기록했다. 데이비스 감독은 작은 휴대전화 영상에 머물렀던 출연자들을 큰 스크린에서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갈색과 금색이 섞인 조명, 담배 연기, 주름과 거친 피부가 필름 위에 그대로 남는다. 낡고 어두운 술집을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으면서도 출연진의 얼굴을 초라한 배경의 일부로 밀어내지 않는다. 노래를 시작한 사람은 술집 한쪽에 있던 손님에서 영화의 중심 인물로 옮겨간다.

소셜미디어와 필름을 결합한 제작 방식은 최근 영화산업에서 온라인 플랫폼이 맡는 역할도 넓혀 놓는다. 소셜미디어는 완성된 영화를 홍보하는 통로에 그치지 않고 출연자를 찾고 관계를 쌓는 사전 제작 공간으로 쓰였다. 온라인에서 사람을 찾은 뒤 가장 오래된 촬영 방식 가운데 하나인 필름으로 얼굴을 기록했다.

호평이 모인 얼굴, 평가가 갈린 느린 호흡

해외 리뷰들은 술집의 색과 출연진의 얼굴, 노래가 끝난 뒤의 침묵을 작품의 강점으로 꼽았다. ‘인디 쇼츠 매거진(Indie Shorts Mag)’은 갈색과 금색으로 채운 술집이 처음에는 오래되고 쇠락한 공간으로 다가오지만, 노래가 이어지면서 인물들이 서로에게 다가가는 온기를 담는 색으로 달라진다고 평가했다. 크리스 스미더의 깊은 음색과 주다 켈리의 조심스러운 태도, 마이크 영의 후반부 공연에도 높은 비중을 뒀다.

호평의 상당 부분은 음악이 사람들에게 존엄과 공동체를 되돌려 준다는 해석으로 이어졌다. 술집 안의 변화는 분명하지만 삶 전체가 회복됐다고 볼 근거는 없다. 영화가 담아낸 범위는 몇 곡의 노래가 이어지는 한밤중이다. 생활 형편과 병, 상실은 그대로 남고, 사람들의 태도만 잠시 달라진다.

‘타임스 오브 인디아(The Times of India)’는 5점 만점에 4점을 주면서도 초반부의 평범한 대화와 느린 진행이 관객의 인내를 요구한다고 지적했다. 인물의 배경과 갈등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고 술집의 소음과 침묵을 길게 남긴 탓에 모든 대목이 같은 힘으로 전달되지는 않는다는 평가다.

첫 노래가 시작되기 전의 시간이 길게 느껴질 수 있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18분짜리 영화가 짧고 빠른 영상에 익숙한 시청자를 곧바로 붙잡지는 않는다. 해당 시간을 줄이면 후반부 공연은 뛰어난 가수들의 노래를 차례로 소개하는 영상에 가까워진다. 노래가 시작되기 전 술집의 무기력과 어색한 대화를 충분히 남겼기 때문에 목소리가 들어온 뒤 달라진 분위기도 감지할 수 있다.

출연진의 뛰어난 실력은 작품의 강점이면서 연출의 계산이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술집에 우연히 모인 평범한 손님들이 갑자기 놀라운 노래를 부른 듯 보이지만, 제작진은 1년 넘게 온라인을 뒤져 검증된 음악가와 거리 공연자를 모았다. 뒤로 갈수록 공연의 강도와 감정이 높아지는 순서에도 음악 경연 프로그램에서 익숙하게 봐 온 상승 구조가 남아 있다.

‘가수들’은 승자를 발표하지 않지만 더 강한 노래를 뒤쪽에 배치해 감정을 끌어올린다. 무대본 즉흥연기와 비전문 배우의 자연스러움 뒤에는 치밀한 캐스팅과 편집이 놓여 있다. 우연히 일어난 밤처럼 보이는 흐름은 오랜 준비를 거쳐 만들어졌다.

넷플릭스 ‘가수들’, 100달러와 맥주 한 잔이 오스카로 번진 18분. 사진=영화스틸,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넷플릭스 ‘가수들’, 100달러와 맥주 한 잔이 오스카로 번진 18분. 사진=영화스틸,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영화제에서 넷플릭스로 옮겨온 단편영화

‘가수들’은 2025년 한 해 동안 50개 영화제에서 상영돼 35개 상을 받았다. 영화제에서 평가를 쌓은 뒤 아카데미 후보에 올랐고, 시상식을 한 달 앞둔 2026년 2월 넷플릭스에서 공개됐다.

영화제 프로그램이나 단편영화 묶음 상영에서 만나야 했던 작품이 넷플릭스에서 독립된 제목과 작품 페이지를 얻었다. 한국 시청자도 별도의 영화제 일정이나 상영관을 찾지 않고 일반 영화와 같은 방식으로 선택할 수 있다. 아카데미 후보 발표와 넷플릭스 공개, 수상이 이어지면서 단편영화의 접근 범위도 넓어졌다.

18분이라는 길이만 놓고 보면 모바일 숏폼과 가까워 보이지만, 시간의 사용법은 다르다. 짧은 온라인 영상이 초반 몇 초 안에 갈등과 정보를 제시하는 데 비해 ‘가수들’은 첫 노래가 나오기 전까지 인물들의 말투와 침묵을 쌓는다. 상영시간을 빠른 전개에 쓰지 않고 설명을 걷어내는 데 사용했다.

단편영화가 세계 시청자에게 닿을 통로는 넓어졌으나 안정적인 유통 구조가 마련됐다고 판단하기에는 이르다. ‘가수들’은 영화제 수상과 아카데미 후보라는 성과를 확보한 뒤 넷플릭스에 들어왔다. 작품별 시청시간과 국가별 성적도 공개되지 않았다. 아카데미 수상이 일시적인 관심을 넘어 장기 시청으로 이어졌는지는 확인할 자료가 부족하다.

술과 상금을 차지하려고 시작한 대결은 마지막에 이르러 승자를 기다리지 않는 자리로 바뀐다. 남자들의 삶이 달라진 것도, 외로움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한 사람의 노래를 가볍게 넘기지 않고 끝까지 듣게 된 태도만 남는다.

넷플릭스는 현재 ‘가수들’을 독립 영화로 서비스하고 있다. 35개 영화제 수상과 아카데미 실사 단편영화상은 확인됐지만, 공개 이후 시청 성적과 후속 제작 계획은 알려지지 않았다. 영화제와 시상식에서 확보한 관심이 스트리밍 안에서 얼마나 오래 이어질지가 다음 기록으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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