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산맥과 흰 집, 두 마리 말로 압축한 키르기스의 풍경…관찰과 색채 실험에서 신화적 조형세계로 이어진 초기 판화
[KtN 박준식기자]푸른 산맥이 길게 누워 있고, 산 아래 완만한 구릉이 이어진다. 오른쪽에는 흰 집 한 채가 크게 자리한다. 붉은 지붕에는 긴 사다리가 비스듬히 기대 있고, 집 뒤편에는 말 두 마리가 서 있다. 사람은 없다. 태양도 그리지 않았다. 유리 스탄벡 쉬가예프(Yuristanbek Shygaev)의 ‘햇빛 비친 집(House shone by sun)’은 인물과 사건을 앞세우지 않고 산 아래 이어지는 생활을 색과 선으로 붙잡는다.
쉬가예프의 작품 세계를 길게 놓고 보면 소박한 풍경의 의미가 달라진다. 후기 작업에서 전통 신화와 원형,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복합적인 형상으로 다뤘던 작가의 출발점에는 현실을 오래 바라보는 시간이 있었다. 키르기스의 산과 마을,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동물이 초기 판화와 드로잉에 들어왔고, 사실적인 관찰은 점차 형태의 압축과 색채 실험으로 옮겨갔다. 신화적 상징이 등장하기 전부터 현실을 그대로 옮기지 않고 필요한 형상만 골라 다시 구성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산은 작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면서도 주인공처럼 앞으로 나오지 않는다. 청자색에 가까운 산맥은 뒤쪽으로 길게 물러나 있고, 능선을 가르는 흰 선 몇 개만 남았다. 암벽과 골짜기, 식생을 세밀하게 새기지 않았다. 산이라는 존재를 알아볼 수 있는 형태만 남긴 뒤 복잡한 정보는 걷어냈다.
산 아래 구릉에서는 올리브색과 푸른색이 넓게 만난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지형 위에 가느다란 선이 드문드문 지나가며 경사의 방향을 만든다. 가까운 땅으로 내려오면 선의 수가 많아진다. 황갈색과 연두색 사이를 오가는 전경에는 짧고 거친 선이 여러 방향으로 퍼져 있다. 풀과 돌, 흙을 하나씩 설명하지 않아도 땅의 거친 감촉이 살아난다.
멀리 있는 산에서는 선을 줄이고 가까운 땅에서는 선을 늘렸다. 세밀한 원근 묘사 대신 선의 밀도로 거리를 만든 셈이다. 색면 역시 같은 역할을 맡는다. 짙은 산과 밝은 전경, 푸른 하늘과 황갈색 땅이 겹을 이루며 공간의 깊이를 나눈다.
쉬가예프의 초기 그래픽 작업에는 직접 관찰한 현실과 생활의 경험이 강하게 남아 있다. 키르기스 여러 지역을 오가며 만난 풍경과 사람들의 일상이 판화와 드로잉의 소재가 됐다. 도시와 마을, 농촌의 생활과 가족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면서도 눈앞의 대상을 그대로 옮기는 데 머물지는 않았다. 관찰한 현실 가운데 무엇을 남길지 고르고, 선택한 대상을 판화에 맞는 선과 면으로 다시 조직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햇빛 비친 집’에는 관찰과 압축이 함께 들어 있다. 산과 집, 말은 현실에서 알아볼 수 있는 형태를 유지한다. 반면 풍경을 이루는 세부는 상당 부분 덜어냈다. 산은 긴 색면으로 줄었고, 집은 몇 개의 기하학적인 면으로 정리됐다. 땅의 표면은 짧은 선으로 바뀌었다. 현실을 떠나지 않으면서 재현에만 머물지 않는 쉬가예프 초기 작업의 성격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흰 집에서는 색과 형태의 압축이 더욱 강하다. 벽에는 창문과 외벽의 세부를 촘촘하게 넣지 않았다. 넓게 남겨둔 흰 면 자체가 집의 몸체가 된다. 적갈색 지붕은 삼각형과 사각형이 맞물린 단단한 덩어리를 만들고, 지붕 아래 출입구에는 짙은 남색이 들어가 깊이를 만든다.
흰색과 붉은색, 남색의 관계만으로 건물의 앞과 뒤가 갈리고 밝음과 어둠이 생긴다. 명암을 여러 단계로 쌓아 부피를 만드는 방식과 다르다. 색의 경계를 분명하게 나누고 면적을 조절하면서 건축물의 존재감을 세웠다.
제목에 들어간 햇빛도 같은 방식으로 다뤘다. 작품 어디에도 태양은 없다. 강렬한 햇살이나 극적인 그림자를 따로 묘사하지도 않았다. 빛은 흰 벽의 밝기와 황색을 머금은 땅, 산 가까이 내려갈수록 밝아지는 푸른 하늘에 퍼져 있다.
태양을 그리지 않고 햇빛을 표현한 선택은 작품의 색을 더욱 중요하게 만든다. 흰 벽이 밝아지면서 붉은 지붕의 색은 강해지고, 짙은 출입구는 한층 깊어진다. 뒤편의 청자색 산과 앞쪽의 황갈색 땅도 흰 집을 사이에 두고 명확하게 갈린다. 빛은 하나의 자연현상을 설명하기보다 서로 다른 색의 간격을 벌려 놓는다.
색채는 이후 쉬가예프의 작업에서도 중요한 조형언어로 확장된다. 초기 그래픽에서 판화의 평면성을 넘어 색의 깊이와 부피를 확보하려는 실험이 이어졌고, 자연을 관찰하며 얻은 색채 감각은 점차 대상의 고유색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색은 사물을 설명하는 수단에서 작품 전체의 구조를 만드는 요소로 이동했다.
‘햇빛 비친 집’에서도 변화의 초기 흔적을 읽을 수 있다. 하늘의 파랑과 산의 청자색, 구릉의 올리브색, 전경의 황색, 지붕의 붉은색은 자연에서 출발했지만 단순한 자연색의 복제에 머물지 않는다. 각각의 색이 차지하는 면적과 위치가 작품의 균형을 결정한다.
오른쪽에 크게 놓인 집은 상당한 시각적 무게를 갖는다. 쉬가예프는 집을 중앙으로 옮겨 안정적인 구도를 만들지 않았다. 오른쪽 가장자리 가까이 밀어 넣어 지붕이 작품 밖으로 이어질 듯 배치했다. 왼쪽에는 낮은 건물과 넓은 땅을 남겼다.
좌우의 불균형을 잡는 것은 색이다. 오른쪽 지붕의 붉은색과 왼쪽 건물 주변의 붉은 색면이 멀리 떨어져 서로 호응한다. 크기가 다른 건축물을 대칭으로 맞추는 대신 붉은색의 위치와 면적으로 균형을 잡았다.
시선은 왼쪽 낮은 건물에서 붉은 색면을 지나 중앙의 말 두 마리로 향한다. 말에서 흰 집으로 이동한 뒤 사다리를 따라 위로 올라간다. 지붕의 경사를 타고 다시 산과 하늘로 이어진다. 수평과 수직, 사선이 번갈아 나타나면서 정적인 풍경 안에 느린 움직임을 만든다.
사다리는 작은 요소지만 구도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크다. 산과 구릉은 수평으로 길게 뻗고 집의 벽은 수직과 수평으로 정리돼 있다. 사다리만 긴 대각선으로 놓였다. 지붕의 경사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사선이 만나면서 오른쪽에 집중된 건축물의 무게를 풀어준다.
사다리는 생활의 흔적이기도 하다. 인물이 없는 집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가장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물건이다. 지붕 아래 깊게 들어간 출입구와 집 뒤에 서 있는 말도 사람의 존재를 대신한다. 쉬가예프는 사람을 직접 그리지 않고 사람이 머문 자리를 남겼다.
말 두 마리는 작품 중앙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작게 처리됐다. 산과 집 사이에 놓인 말은 기념비적인 동물상도, 화면을 지배하는 상징도 아니다. 일상의 공간에서 살아가는 동물이다. 집과 산을 연결하는 중간 지점에 자리하면서 자연과 생활의 거리를 좁힌다.
쉬가예프의 후기 회화를 알고 있다면 말의 존재는 더욱 눈에 들어온다. 후기 작품에서 인간과 동물은 현실의 관계를 넘어 신화와 원형의 영역까지 확장된다. 신화적 동물이 등장하고 인간과 자연, 생명과 운명의 관계가 복합적인 형상으로 펼쳐진다.
‘햇빛 비친 집’의 말을 후기의 신화적 동물과 곧바로 연결해서는 안 된다. 초기 판화의 말은 현실의 생활에 속한다. 다만 인간의 삶과 자연, 동물을 별개의 세계로 떼어놓지 않는 시선은 초기부터 자리하고 있다. 집과 말, 산과 땅이 서로 다른 비중을 가지면서도 하나의 생활 공간 안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사람을 작품에서 비운 선택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인물이 들어왔다면 이야기는 사람의 행동과 표정으로 집중됐을 가능성이 크다. 인물이 사라지면서 집과 사다리, 말과 산, 땅이 각각의 존재감을 갖는다. 생활을 대표하는 주인공을 따로 세우지 않았다.
쉬가예프의 작업은 이후 사실적인 관찰에 머물지 않고 표현의 범위를 크게 넓혔다. 1980년대 후반에는 구체적인 형상을 해체하고 검은 얼룩과 날카로운 선, 파편화된 형태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현실의 대상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감각과 기억을 다른 조형언어로 옮기는 작업이 본격화됐다.
변화는 추상적 실험으로 끝나지 않았다. 전통 신화와 시적 형상이 작품의 중심으로 들어왔고, 인간과 동물의 관계도 새로운 층위를 얻었다. 전통 문양과 전사, 신화적 동물, 세계산과 생명나무를 연상시키는 형상들이 독자적인 기호 체계를 이루면서 쉬가예프 특유의 조형세계가 깊어졌다.
초기 풍경과 후기 신화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 거리를 단순한 양식 변화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현실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남기며, 남겨진 형태에 어느 정도의 의미를 맡길 것인가를 끊임없이 바꿔간 과정에 가깝다.
‘햇빛 비친 집’에서는 선택의 출발점이 비교적 또렷하다. 산의 세부를 덜어내고 집을 큰 색면으로 묶었다. 땅의 질감은 선으로 바꾸고 사람은 작품에서 비웠다. 말은 작게 남겼다. 태양은 없앴지만 빛은 색 속에 남겨뒀다.
리놀륨 판화라는 매체는 선택과 생략을 더욱 분명하게 만든다. 판을 새길 때는 남길 부분과 걷어낼 부분을 결정해야 한다. 선 하나와 색면 하나가 우연히 더해지기 어렵다. 쉬가예프는 풍경을 이루는 정보를 줄이면서 오히려 산과 집, 땅과 말 사이의 관계를 선명하게 만들었다.
하늘은 작품에서 가장 넓은 여백을 제공한다. 짙은 파랑은 아래로 내려오면서 밝아지고, 판화 특유의 미세한 흔적이 넓은 색면에 남는다. 하늘 아래에는 산, 구릉, 생활 공간이 차례로 겹쳐진다. 여러 층의 수평 구조를 오른쪽 집과 사다리가 끊어주면서 작품의 리듬이 만들어진다.
키르기스의 자연은 쉬가예프에게 사람의 생활과 떨어진 풍광으로 남지 않았다. 산 아래에는 집이 있고, 집 곁에는 말이 있으며, 지붕에는 사람이 사용했을 사다리가 걸려 있다. 거대한 자연과 소박한 생활을 대립시키지 않고 같은 공간 안에 놓았다.
목가적인 농촌 풍경으로만 보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산을 장엄하게 꾸미지 않았고 생활을 낭만적으로 포장하지도 않았다. 건물은 소박하고 땅은 거칠다. 말은 작고 산은 멀다. 쉬가예프가 관심을 둔 대상은 아름다운 풍경의 완성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삶이 자리 잡는 방식에 가까웠다.
후기 작업으로 갈수록 현실의 산과 동물은 더욱 압축되고 변형된다. 직접 관찰했던 세계는 신화와 기억을 통과하면서 다른 형상을 얻는다. 자연은 단순한 배경에서 벗어나고 동물은 상징적 존재로 확장된다. 전통의 오래된 형상도 현대적인 조형언어 안에서 새롭게 배열된다.
그러나 후기의 복잡한 상징만으로 쉬가예프를 시작하면 초기 작업에 남아 있는 중요한 과정 하나를 놓치게 된다. 신화적 형상을 만들기 전에 현실의 형태를 오래 관찰했고, 상징을 구축하기 전에 산과 집과 사람의 생활을 판화로 옮겼다. 추상과 신화는 현실과 단절하면서 만들어진 세계가 아니라 현실을 압축하고 변형해온 긴 작업 끝에 자리 잡았다.
‘햇빛 비친 집’은 바로 그 변화의 앞쪽에 놓여 있다.
태양을 그리지 않고 햇빛을 남겼다. 사람을 그리지 않고 생활을 남겼다. 거대한 산을 두고도 산의 웅장함을 앞세우지 않았다. 흰 집과 붉은 지붕, 말 두 마리와 사다리, 황갈색 땅만으로 산 아래 이어지는 하루를 구성했다.
쉬가예프의 후기 작품에서 신화와 원형이 강하게 나타날수록 초기 판화의 현실은 오히려 중요해진다. 신화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상징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먼저 키르기스의 산이 있었고, 사람이 살아가는 집과 동물이 있었다. 자연과 생활을 오래 바라본 시간이 있었다.
‘햇빛 비친 집’에는 완성된 쉬가예프의 세계보다 앞으로 달라질 가능성이 더 많이 들어 있다. 현실을 그대로 복제하지 않고 필요한 형태를 골라내는 시선, 색으로 공간의 무게를 조절하는 감각, 자연과 생활을 하나의 질서 안에 놓는 태도가 이미 자리한다.
산 아래 흰 집은 그래서 작지 않다. 쉬가예프가 훗날 신화와 원형의 깊은 층으로 들어가기 전에 현실을 어떤 방식으로 바라봤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평범한 풍경에서 형태를 덜어내고 색을 남겼으며, 사람을 비우고도 삶을 남겼다.
신화 이전에 삶의 풍경이 있었다. 쉬가예프의 긴 작업을 거슬러 올라가면 ‘햇빛 비친 집’에서 만나는 것은 바로 그 출발점이다. 자연을 바라보던 눈이 형식을 만들고, 형식에 대한 탐구가 상징으로 깊어지며, 오랜 시간 축적된 상징이 마침내 쉬가예프만의 신화적 세계로 확장되는 흐름이다. ‘햇빛 비친 집’의 고요한 풍경은 그 긴 변화가 시작된 자리에 놓여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