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본대지진 이후 완성한 'In the Milky Lake / Thinking One'…추정가 1000만~1500만 달러, 14년 만에 미술시장 등장
[KtN 임민정기자]일본 현대미술가 나라 요시토모(Yoshitomo Nara)가 2011년 제작한 대형 회화 'In the Milky Lake / Thinking One'이 오는 11월 19일 미국 뉴욕 경매에 오른다. 추정가는 1000만~1500만 달러다. 세로 259.2㎝, 가로 181.8㎝의 캔버스에 눈을 감은 소녀를 그린 작품으로, 2011년 동일본대지진 이후 나라 요시토모의 회화가 변화한 시기를 대표한다. 14년 동안 개인 소장품으로 남아 있던 작품이 뉴욕의 경매 플랫폼 페어 워닝(Fair Warning)을 통해 시장에 나온다.
2011년은 나라 요시토모의 작품 세계에서 중요한 전환이 일어난 해다. 3월 11일 일본 동북부를 강타한 대지진과 쓰나미, 이어진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아오모리현에서 성장한 작가에게 깊은 충격을 남겼다. 재난 이후 한동안 회화 작업을 이어가지 못했던 나라 요시토모는 점토를 직접 빚는 조각 작업에 몰두하며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In the Milky Lake / Thinking One'은 당시 완성한 유일한 주요 대형 회화다.
연녹색 옷을 입은 소녀가 눈을 감고 서 있다. 둥근 얼굴을 감싼 적갈색 머리카락은 양쪽 끝이 바깥으로 짧게 뻗어 있고, 고개는 아래로 살짝 기울어져 있다. 가느다란 눈꺼풀 아래로 작은 코와 굳게 다문 입술이 놓였다. 양팔은 몸에 붙어 있으며, 어깨는 조금 올라가 있다. 무릎 아래까지 이어지는 신체는 유백색 물속에 잠긴 듯 희미해진다.
커다란 얼굴과 작은 신체, 단순화된 이목구비는 나라 요시토모가 오랫동안 사용해 온 인물 표현이다. 그러나 소녀의 눈매와 입술, 몸의 자세를 살펴보면 이전 작품에서 두드러졌던 반항적인 태도와는 다른 정서가 드러난다.
1990년대와 2000년대 나라 요시토모의 소녀들은 눈을 치켜뜨고 정면을 노려보거나 날카로운 표정으로 관람자를 응시했다. 일부 작품에서는 칼이나 무기를 든 어린아이가 등장했다. 어린아이의 친숙한 외형에 분노와 저항, 불안과 고독을 결합하면서 작가는 자신만의 인물상을 구축했다.
'In the Milky Lake / Thinking One'에서는 정면을 향하던 시선이 사라지고, 감긴 눈과 작은 입술이 얼굴의 중심을 차지한다. 눈꼬리에서 아래로 이어지는 가는 곡선은 얼굴에 차분한 인상을 남긴다. 고개를 숙인 자세와 약간 올라간 어깨에서는 피로와 체념에 가까운 감정도 읽힌다. 표정의 변화가 크지 않은 만큼 눈꺼풀과 입술의 미세한 형태가 인물의 정서를 더욱 섬세하게 전달한다.
소녀의 얼굴을 둘러싼 색채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연한 크림색 바탕 위로 옅은 분홍빛과 노란빛이 겹쳐 있고, 얼굴의 윤곽을 따라 부드러운 색의 변화가 이어진다. 붉은 갈색 머리카락과 연녹색 옷은 비교적 뚜렷하지만, 어깨와 팔을 지나 몸의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색이 흐려진다.
물과 인물의 경계는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옷의 아래쪽은 흰색에 가까운 바탕과 섞이고, 신체의 윤곽도 점차 사라진다. 그림 아래에 넓게 펼쳐진 유백색 공간은 물의 깊이나 움직임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기보다 소녀가 놓인 공간 전체를 부드럽게 감싼다.
나라 요시토모는 아크릴 물감을 얇게 겹쳐 바르며 인물과 배경의 색을 조절했다. 여러 색층을 통과하는 빛과 미세한 농도 차이가 얼굴에 깊이를 만들고, 선명한 윤곽에 의존하지 않는 인물 표현으로 이어진다. 붓질의 흔적과 색의 중첩은 단순해 보이는 소녀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을 담는 회화적 요소로 작용한다.
2005년 무렵부터 나라 요시토모의 초상화에는 슬픔과 분노, 평온이 뒤섞인 표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린아이의 얼굴을 통해 감정을 직접 표현하던 방식은 점차 미세한 눈매와 입술의 변화, 색채의 깊이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2011년의 재난은 이미 진행되고 있던 회화적 변화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In the Milky Lake / Thinking One'의 인물은 몸을 크게 움직이지 않는다. 손을 들어 보이거나 외부를 향해 의사를 표현하는 행동도 없다. 두 눈을 감은 채 고요하게 서 있는 자세와 점차 흐려지는 신체는 움직임보다 정지된 상태에 집중한다. 259㎝가 넘는 캔버스에 인물 한 명을 배치한 구성은 작은 얼굴의 표정과 넓은 여백 사이의 대비를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은 나라 요시토모가 자신의 예술과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일본 동북부 지역을 휩쓴 쓰나미와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작가가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지역의 풍경과 일상을 크게 바꿔놓았다. 나라 요시토모는 당시 지진이나 전쟁과 같은 대규모 파괴가 평소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을 일시적으로 비추기도 한다고 말했다.
재난 이후 제작된 회화에는 이전보다 차분한 인물과 부드러운 색채가 나타났다. 작품에서 직접적인 사건 묘사보다 인물의 내면과 감정의 변화가 중요해졌고, 외부 세계에 대한 저항과 반발을 표현하던 소녀들의 얼굴에도 새로운 정서가 더해졌다.
2012년 제작된 'Miss Spring'에서는 커다란 눈을 뜬 소녀가 분홍색 바탕을 배경으로 정면을 바라본다. 눈동자에는 눈물방울처럼 빛나는 색채가 표현돼 있다. 작품은 같은 해 일본의 반핵 운동과 연결되며 류이치 사카모토(Ryuichi Sakamoto)의 'No Nukes 2012' 관련 출판물 표지에도 사용됐다.
'In the Milky Lake / Thinking One'과 'Miss Spring'은 서로 다른 얼굴을 통해 재난 이후의 감정을 표현한다. 눈을 감은 소녀가 고요한 침묵과 내면의 사색에 가까운 정서를 담았다면, 정면을 바라보는 소녀의 눈에는 슬픔과 함께 외부 세계를 마주하는 태도가 나타난다. 두 작품은 나라 요시토모가 2011년 이후 발전시킨 인물 표현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회화다.
'In the Milky Lake / Thinking One'은 2012년 일본 요코하마와 아오모리, 구마모토를 순회한 주요 전시에 등장했다. 2015년에는 나라 요시토모가 직접 작품을 선정한 화집 'Self-Selected Works: Paintings'에도 수록됐다.
이후 국제적인 회고전을 거치며 작품의 전시 이력도 축적됐다. 202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LACMA)에서 열린 회고전을 비롯해 2024년 스페인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 독일 프리더 부르다 미술관, 2025년 영국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 전시에서도 소개됐다.
나라 요시토모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소녀 이미지를 반복하면서도 제작 시기에 따라 표정과 색채, 신체의 비례를 변화시켜 왔다. 초기 작품에서 강한 윤곽선과 치켜뜬 눈매가 감정을 표현하는 주요 수단이었다면, 2010년대 이후의 회화에서는 여러 겹의 색채와 부드러운 명암, 얼굴의 미세한 표정 변화가 더욱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미술시장에서 나라 요시토모의 대표작은 오랫동안 높은 가격에 거래돼 왔다. 최고 낙찰 기록은 2019년 10월 홍콩 소더비에서 약 1억9569만 홍콩달러, 당시 약 2490만 달러에 팔린 2000년작 'Knife Behind Back'이다.
'Knife Behind Back'은 세로 234㎝, 가로 208㎝의 대형 회화다. 노란색 옷을 입은 소녀가 날카로운 눈매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제목에는 등 뒤에 숨긴 칼이 등장하지만 그림에는 칼이 드러나지 않는다. 어린아이의 외형과 공격적인 표정, 숨겨진 무기의 존재가 결합한 작품으로, 나라 요시토모의 2000년대 회화를 대표하는 이미지 가운데 하나다.
2023년 4월 홍콩 소더비에서는 2012년작 'In the Milky Lake'가 약 1억56만 홍콩달러, 당시 약 1280만 달러에 거래됐다. 연녹색 옷을 입은 소녀가 유백색 물속에 잠겨 있는 회화로, 이번 뉴욕 경매에 출품되는 2011년작과 인물 및 공간 구성이 연결된다.
2012년작 'In the Milky Lake'는 세로 197㎝, 가로 194㎝ 크기다. 소녀의 커다란 눈과 얼굴, 물 위로 드러난 상체가 중심을 이루며, 2011년작보다 인물의 표정과 물의 형태가 구체적으로 표현돼 있다. 두 작품에서는 비슷한 색채와 구성이 사용되지만 소녀의 눈과 입술, 주변 공간을 처리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도 나라 요시토모의 대형 회화가 국내 미술품 경매 최고가를 경신했다. 지난 3월 31일 서울옥션의 '컨템포러리 아트 세일'에서 2016년작 'Nothing about it'이 150억원에 낙찰됐다. 국내 미술품 경매에서 낙찰가가 100억원을 넘어선 첫 거래였다.
세로 194㎝, 가로 162㎝ 크기의 'Nothing about it'은 치켜뜬 눈매를 가진 소녀가 정면을 바라보는 작품이다. 추정가 147억~220억원에 출품돼 150억원에 거래됐다. 2025년 11월 마르크 샤갈의 '꽃다발'이 세운 종전 최고가 94억원을 넘어섰다.
서울에서 거래된 'Nothing about it'과 뉴욕에 출품되는 'In the Milky Lake / Thinking One'은 제작 시기뿐 아니라 인물의 정서와 회화적 구성에서도 차이가 있다. 2016년작이 강한 눈매와 정면 구도를 통해 인물의 존재를 부각한다면, 2011년작은 감긴 눈과 흐려지는 신체, 연한 색층을 통해 고요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나라 요시토모의 국제 경매 거래액은 최근 몇 년 사이 변화를 겪었다. 아트넷 경매 데이터에 따르면 올해 11월 초까지 출품된 작품 224점의 거래액은 약 5200만 달러다. 2019년부터 2023년까지 연평균 약 9900만 달러의 거래액을 기록했던 시기와 비교하면 고가 작품을 중심으로 거래 규모가 확대되던 흐름은 완화됐다.
이번 경매의 추정가 1000만~1500만 달러는 나라 요시토모의 역대 최고 낙찰가보다 낮지만, 2023년 거래된 'In the Milky Lake'를 비롯한 주요 회화의 가격대에 놓여 있다. 특히 2011년이라는 제작 시기와 대형 캔버스의 희소성, 국제 미술관에서 축적된 전시 이력은 작품의 시장 평가를 구성하는 요소다.
뉴욕 경매를 진행하는 페어 워닝은 크리스티의 전후·현대미술 부문에서 활동했던 로이크 구제르(Loïc Gouzer)가 2020년 설립했다. 여러 작품을 한꺼번에 출품하는 전통적인 경매와 달리 개별 작품에 집중하는 방식을 운영하고 있다.
페어 워닝은 이번 출품을 앞두고 뉴욕 첼시 웨스트 22번가 534번지에 전시 공간을 마련했다. 일본 사원의 차분한 분위기를 참고한 공간으로, 작품은 11월 6일부터 경매 당일인 19일까지 공개된다.
뉴욕 경매와 비슷한 시기 워싱턴DC에서는 나라 요시토모의 대형 조각 전시도 열리고 있다. 스미스소니언 허시혼미술관 조각정원에서는 지난 10월 31일 'Sentinels of Stillness'가 개막했다. 전시는 2027년 11월 7일까지 이어진다.
'Long Tall Peace Sister', 'Smiling', 'Tiny Bright Round Eyes' 등 세 점의 조각은 2021년 작가가 손으로 빚은 작은 점토 두상을 확대한 작품이다. 알루미늄으로 제작하고 흰색 우레탄 도장으로 마감한 형태는 둥근 얼굴과 단순화된 이목구비를 강조한다. 나라 요시토모가 어린 시절 경험한 눈 덮인 풍경도 조형적 배경으로 작용했다.
2011년 재난 이후 나라 요시토모는 회화에서 잠시 벗어나 손으로 흙을 빚는 작업에 집중했다. 회화의 색층과 표정을 통해 표현하던 인물의 내면은 조각에서는 얼굴의 굴곡과 재료의 질감, 빛에 따라 달라지는 형태로 이어졌다. 감긴 눈과 단순한 표정, 고요한 자세는 최근 조각에서도 반복되는 조형 요소다.
'In the Milky Lake / Thinking One'에는 2011년 이후 나라 요시토모가 발전시킨 회화의 특징이 응축돼 있다. 치켜뜬 눈 대신 내려앉은 눈꺼풀이, 단단한 윤곽선 대신 여러 겹의 연한 색채가 자리한다. 유백색 물속으로 희미해지는 소녀의 신체는 인물과 주변 공간을 하나의 색채로 연결한다.
11월 19일 뉴욕에서 열리는 경매는 개인 소장품으로 남아 있던 2011년 대형 회화가 처음 공개 거래되는 자리다. 2019년 'Knife Behind Back'의 약 2490만 달러, 2023년 'In the Milky Lake'의 약 1280만 달러, 올해 서울옥션에서 기록한 'Nothing about it'의 150억원이 비교 대상이다. 감긴 눈과 유백색 공간으로 표현한 2011년의 회화적 변화가 국제 미술시장에서 받을 가격 평가는 이번 경매에서 결정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