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NTE 보고서로 본 글로벌 질서의 재편과 한국의 전략 공백
[KtN 임우경기자] 디지털 무역은 더 이상 기술산업의 하위 카테고리가 아니다. 미국의 2025년 국별 무역장벽보고서(NTE)는 디지털 규제를 중심으로 새로운 통상 규범을 정립하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했다. 규제 설계의 정당성과 데이터 이전의 자유가 새로운 무역장벽의 기준으로 제시되고 있는 가운데, 한국은 기술주권과 국제 정합성 사이에서 전략적 응답이 요구되는 임계점에 도달했다.
'디지털 무역장벽'이라는 이름의 질서 재편
2025년 NTE 보고서에서 디지털 무역 분야는 전례 없이 확장되었다. 단순히 ‘비관세장벽’의 부속 항목으로 취급되던 과거와 달리, 이번 보고서에서는 디지털 전자상거래, 개인정보 이전, 온라인플랫폼 규제, 클라우드 보안 정책 등 광범위한 영역을 독립된 이슈로 설정했다. 이는 디지털 경제의 질서 자체를 미국이 자국의 무역규범 안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전략적 선언이다.
특히 “위치기반 데이터의 수출 허가제”, “해외 콘텐츠 제공자 대상 망 사용료 부과 추진”, “국외 이전 개인정보 규제 강화”, “외국 클라우드 서비스 제공업체에 대한 기술 제한”은 한국이 주도한 디지털 규제가 글로벌 무역규범과 충돌하고 있음을 선명히 보여준다.
규제의 정당성에서 ‘국제적 투명성’으로
문제는 한국의 디지털 규제가 모두 공공의 이익, 정보보호, 독점 해소를 명분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이 규제를 ‘공정 시장 접근을 저해하는 요소’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규제의 목적이 아닌, 그 설계 방식과 투명성이 글로벌 기준과 얼마나 정합적인지를 평가 기준으로 삼고 있음을 뜻한다.
즉, 규제 자체의 필요성보다, 그것이 어떤 기준과 메커니즘 하에 작동하느냐가 국제 무역질서의 정당성 판단에 결정적인 요소가 되고 있다. 미국은 자국 기업이 해외에서 ‘차별적 대우’를 받는다고 판단하는 순간, 해당 국가의 규제를 무역장벽으로 재정의하고 있다.
유럽연합(EU)과 미국: 규범 경쟁의 두 축
흥미로운 것은 유럽연합도 디지털 시장 규범을 강화하고 있지만, 그 접근 방식은 미국과 상이하다는 점이다. 유럽은 Digital Markets Act, Digital Services Act 등으로 플랫폼 독점에 대한 구조적 개입을 시도하고 있으며, 개인정보보호 분야에서는 GDPR을 통해 오히려 미국보다 강력한 규제를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EU의 규제를 ‘국가안보’ 또는 ‘공정 경쟁’과 연계하기보다, 자국 플랫폼 기업의 시장 접근성 보호에 초점을 맞춘다. 이 지점에서 미국은 통상보고서를 통해 글로벌 디지털 규범의 기준을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재정의하려 한다. NTE 보고서는 이러한 미국식 규범 수출의 대표적 도구이다.
플랫폼 규제의 딜레마: 국내 이해관계와 글로벌 기준 사이
한국이 직면한 문제는 ‘국내 이해관계의 타당성’과 ‘글로벌 통상 기준’의 충돌이다. 국내에서는 플랫폼 기업에 대한 사전 규제를 통해 시장 구조의 개선을 모색하고 있으나, NTE 보고서는 이를 특정 기업(주로 미국계)에 대한 차별로 간주한다. 이 충돌은 곧 디지털 규제의 정치화를 의미하며, 더 이상 기술적 또는 소비자 보호 논리로만 대응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미국은 한국의 공정위 및 국회의 디지털 플랫폼 규제 논의를 “규제의 불명확성과 선택적 적용”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는 국내 입법이 글로벌 통상 맥락에서 어떤 외교적 후폭풍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드러내는 대목이다.
한국의 전략 공백: 디지털 통상외교의 부재
디지털 규제를 둘러싼 국제 통상질서가 급속히 재편되는 가운데, 한국은 여전히 규제 설계의 내치(內治)적 관점에 머물러 있다. 국가안보, 공공성, 소비자 권익을 고려한 규제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이 국제 규범과 어떻게 충돌하거나 조응하는지를 면밀히 분석하고 외교 전략으로 연결하는 체계는 취약하다.
현재와 같은 환경에서는 ‘국가 디지털 규제 전략’과 ‘디지털 통상외교 전략’이 분리되어 작동해서는 안 된다. 각 부처의 정책 조율과 산업계 의견 수렴을 넘어서, 국가 차원의 규범 외교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
기술주권의 외교화를 위한 규범 내재화
한국은 이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국내 정책의 정당성을 유지하면서도, 글로벌 규범과 충돌하지 않도록 정책 설계의 국제적 언어화가 절실하다. 단순히 “우리 방식”을 고수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글로벌 통상 언어 속에서 어떻게 번역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기술주권은 방어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외부의 통상 압박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내부의 규범 체계를 글로벌 언어로 구조화하고, 이를 전략적으로 설득하는 외교력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규제의 국제 경쟁력이다. 그것은 규제의 완화가 아니라, 규범 설계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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