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한대행 체제가 뒤흔든 헌정 질서…제왕적 권력의 그늘 속, 시스템은 어떻게 무너졌는가
[KtN 김 규운기자] 대통령 파면 이후 한국 정치 시스템이 흔들리고 있다. 헌법재판관 임명 논란, 외교권 행사, 대권 도전 시사 등 권한대행 체제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단순한 권력 오남용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형 대통령제의 구조적 결함이 국가 시스템 전반을 위기로 몰아넣은 결정적 징후다.
이번 사태는 ‘권한대행 체제의 정치화’라는 새로운 변수로 시작됐지만, 실제로는 지난 수십 년간 누적돼 온 헌법 설계 미비, 권력 집중 구조, 정치문화의 실패가 총체적으로 드러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지금 한국 정치가 마주한 것은 한 사람의 일탈이 아닌 ‘제도 설계의 실패’라는 구조적 비극이다.
제도는 있었지만, 설계는 없었다
1987년 체제 이후 대한민국은 대통령 직선제를 통해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한 정치 구조를 구축했다. 그러나 문제는 권력 승계와 긴급 체제 운영에 관한 ‘시스템 설계’가 부재했다는 점이다. 현행 헌법은 대통령 유고 시 국무총리가 권한을 대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권한의 범위는 어디까지 허용되는가에 대해서는 사실상 아무런 명문 규정도, 관행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결과, 권한대행 체제가 사실상 대통령 권한 전반을 모방하거나 넘보는 사태가 반복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구조적 불안이 내재된 채 방치돼 왔다. 이번 한덕수 총리 권한대행 체제가 보여준 ‘위헌적 권력 행사’는 그 구조적 공백이 현실화된 대표적 사례다.
‘제왕적 대통령제’, 그 설계의 부작용
대한민국 대통령제의 핵심은 절대적 권력 집중 구조에 있다. 외교, 인사, 안보, 재정, 국정조정 등 거의 모든 국가 핵심 기능이 대통령에게 일극적으로 몰려 있는 구조다.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이 곧 정부 전체의 방향성을 좌우하는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제’의 전형이다.
이 같은 권력 구조는 대통령이 정상적인 상태에 있을 때는 통치 효율성을 발휘하지만, 대통령이 유고 상태에 빠지거나 파면되는 극한 상황에서는 전면적 시스템 붕괴를 야기한다. 실제로 권한대행 체제가 대통령의 전권을 고스란히 대행할 수 있도록 열려 있는 제도적 구조는, 권한 통제 장치가 사라졌을 때 얼마나 시스템 전체가 취약해지는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국회, 사법부, 독립기관 등 헌정 질서를 견제할 기관들도 제왕적 구조 앞에서는 속수무책이 되기 쉽다. 한덕수 총리가 보여준 헌법재판관 임명 강행 사례는 대통령제 권력 구조의 일극 집중이 어떠한 시스템 리스크를 낳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권력 승계 시스템, 왜 설계되지 않았는가
정치 시스템의 핵심은 권력 이전의 안정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권력의 정상 상태’에만 초점을 맞추어 제도를 설계해 왔다. 권력 공백, 파면, 유고와 같은 비상 상황은 ‘예외적 사태’로 취급됐고, 그에 대한 헌법적·법률적 장치는 여전히 모호하거나 미비하다.
한덕수 권한대행 체제는 바로 그 미비점의 산물이다.누구도 대통령이 파면된 후 권한대행이 헌법재판관을 지명하고, 외국 정상과 통화하며, 대권 도전설까지 점화시키는 상황을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스템은 상상을 포함하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는다.
제도는 예외상황에서도 정교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설계돼야 하며, 특히 권력을 가진 자가 그 예외성을 악용할 수 없도록 촘촘하게 제한되어야 한다. 이번 사태는 제도 설계의 부재가 시스템 전체를 어떻게 마비시키는지를 보여주는 구조적 사례다.
선진국의 대응, 한국은 왜 다르지 않았는가
선진 민주주의 국가는 유사한 상황에서 어떤 대응을 해왔을까. 미국의 경우, 대통령이 궐위되면 부통령이 직을 승계하지만, 그 권한은 엄격한 법률 통제 하에 있다. 외교권 행사, 전시권 발동, 사법 인사 등 주요 결정은 모두 의회의 동의를 필요로 하며, ‘비상 리더십’은 철저히 제한적이다.
프랑스나 독일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유고될 경우 권한대행 체제는 상징적 관리자로서 역할을 수행할 뿐, 정치적 결정은 엄격하게 금지된다. 심지어 일부 국가는 권한대행이 대권에 도전할 수 없도록 명문 규정을 두고 있다. 권력 공백 상황에서 시스템이 스스로 정치화되는 것을 원천 봉쇄하기 위한 장치다.
반면 한국은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에 대한 규율도, 정치적 윤리도, 문화적 관행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결과, 헌정 시스템 전체가 권력의 유혹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는 것이다.
“리더십의 문제 아닌 시스템의 문제”
이번 권한대행 사태는 더 이상 ‘개인의 욕심’으로 해석될 문제가 아니다. 대통령이 누가 되든, 어떤 정당이 집권하든 반복될 수 있는 구조적 위기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리더십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지금 한국 정치에 필요한 것은 특정 인물을 향한 비난이 아니라, 그 인물이 출현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제도적 구조를 해체하고 재설계하는 일이다.
정치 시스템은 신뢰를 전제로 작동한다. 그러나 신뢰는 오직 ‘제한된 권력’ 위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 권력이 무제한으로 행사될 수 있는 구조라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구조적 독재로의 전환에 가깝다.
정치는 설계다, 시스템은 리더십을 가늠한다
권한대행 체제가 보여준 이번 사태는 헌정 질서의 파괴가 아니라, 시스템 자체의 붕괴다. 한국형 대통령제의 구조적 한계는 더 이상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시스템 설계와 운영의 문제이며, 민주주의 자체의 존속 가능성과 직결된 질문이다.
이제 한국 정치가 풀어야 할 숙제는 분명하다. 제왕적 권력을 해체하고, 비상 상황에 대한 제도적 가이드라인을 명문화하며, 무엇보다 ‘권한대행’이라는 예외 상황에 권력의 유혹이 개입할 수 없도록 헌정 시스템을 다시 설계하는 일이다.
정치는 권력의 예술이 아니라 시스템의 공학이다. 그리고 한국형 대통령제는 지금, 그 공학적 설계의 실패를 반복해서 입증하고 있다.
후원=NH농협 302-1678-6497-21 위대한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