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독백에서 진짜와 가짜의 추적으로…살아 있는 문재를 사회 밖으로 밀어낸 현대의 존재론

둥근 거울 앞에 선 문재와 거울에 비친 형상. 하나의 몸과 두 개의 모습이 겹치며 자기 인식과 사회적 정체성의 균열을 드러낸다. 사진=넷플릭스
둥근 거울 앞에 선 문재와 거울에 비친 형상. 하나의 몸과 두 개의 모습이 겹치며 자기 인식과 사회적 정체성의 균열을 드러낸다. 사진=넷플릭스

[KtN 신미희 · 박준식기자]문재는 살아 있다. 심장은 뛰고 기억은 이어지며 자기 이름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러나 은행은 지문을 받아들이지 않고, 집과 전화번호는 더 이상 문재의 것이 아니다. 주변 사람들마저 다른 얼굴을 문재로 인정한다.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는 문재는 사회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넷플릭스 시리즈 ‘들쥐’가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은 여기서 시작된다. “To be, or not to be”로 이어지는 햄릿의 독백은 삶을 견딜 것인지 죽음으로 고통을 끝낼 것인지를 둘러싼 사유다. 한국어로는 주로 ‘사느냐 죽느냐’로 번역되지만,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라는 뜻도 문장 안에 함께 놓여 있다.

‘들쥐’는 햄릿의 독백을 디지털 신원 사회로 옮긴다. 문재 앞에 놓인 갈림길은 삶과 죽음만이 아니다. 살아 있으면서 존재를 인정받을 것인지, 기록에서 지워진 가짜로 남을 것인지가 먼저다. 햄릿이 자기 안에서 존재의 지속 여부를 사유한다면 문재는 타인과 제도 앞에서 존재의 사실부터 입증해야 한다.

두 작품 사이에는 긴 시간과 장르의 차이가 놓여 있다. ‘햄릿’은 덴마크 왕실의 복수 비극이고, ‘들쥐’는 개인정보와 신분 세탁을 다룬 현대의 추적 스릴러다. 서로 다른 서사를 관통하는 공통점은 외부의 적을 찾아 나선 인물이 마침내 자신의 내부로 돌아온다는 데 있다. 복수와 추적은 타인을 처벌하는 행동에서 시작하지만, 끝내 자기 기억과 책임을 심판하는 과정으로 바뀐다.

사진=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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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유령과 문재의 또 다른 얼굴

‘햄릿’의 사건은 죽은 선왕의 유령이 나타나면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유령은 햄릿에게 자신의 죽음이 독살이었다고 알리고, 왕위를 차지한 클로디어스에게 복수하라고 명한다. 햄릿은 유령의 말을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 죽은 아버지의 증언이 진실인지 확인하려 하고, 복수의 정당성과 자신의 역할을 반복해 검토한다.

‘들쥐’에는 초자연적인 유령이 등장하지 않는다. 문재 앞에는 자신과 같은 얼굴로 살아가는 인물이 나타난다. 들쥐는 죽은 과거를 전하는 존재가 아니라 문재가 버리고 떠난 과거를 현재의 몸으로 되돌려 놓는 존재다.

햄릿에게 유령은 아버지이면서 복수를 명령하는 권위다. 문재에게 들쥐는 가해자이면서 자기 삶의 빈틈을 드러내는 거울이다. 유령이 햄릿을 과거의 죽음으로 끌고 간다면, 들쥐는 문재를 사라진 친구와 대학 시절의 기억, 오래전 시작된 관계로 데려간다.

두 인물은 외부에서 나타난 존재를 따라가며 자신이 알고 있던 현실을 의심한다. 햄릿은 덴마크 왕실의 질서와 어머니의 재혼, 삼촌의 왕위 계승을 다시 본다. 문재는 자기 이름과 얼굴, 재산과 인간관계가 정말 온전히 자신의 것이었는지를 되짚는다. 익숙했던 세계는 유령과 들쥐의 등장 이후 다른 의미를 얻는다.

 

죽음을 사유하는 햄릿, 사회적 죽음을 겪는 문재

햄릿의 독백에는 삶의 고통과 죽음 이후의 불확실성이 함께 들어 있다. 살아가는 일은 세상의 모욕과 억압, 사랑의 고통과 권력의 부당함을 견디는 과정이다. 죽음은 고통을 끝낼 수 있지만 누구도 돌아와 설명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다. 햄릿은 죽음 자체보다 죽음 이후를 알 수 없다는 두려움 때문에 행동을 멈춘다.

문재가 겪는 죽음은 신체의 소멸이 아니다. 이름과 사회적 자리를 빼앗긴 상태에서 살아남는 사회적 죽음에 가깝다. 문재의 몸은 거리와 집, 금융기관 앞에 서 있지만 어느 곳도 문재를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생체정보와 기록이 신체의 증언을 부정하면서 살아 있는 인간과 사회가 인정하는 인간이 갈라진다.

햄릿에게 존재의 중단은 죽음이지만 문재에게 존재의 중단은 인증 실패로 시작된다. 한쪽에서는 칼과 독약이 생명을 위협하고, 다른 쪽에서는 데이터와 타인의 인식이 사회적 생명을 지운다. 시대가 바뀌면서 존재를 위협하는 수단도 신체적 폭력에서 정보의 박탈로 넓어진다.

문재가 겪는 신원 강탈은 죽음보다 복잡한 고통을 남긴다. 죽은 사람에게는 자신을 증명할 의무가 없지만, 사회적 신분을 잃은 문재는 살아 있는 동안 계속해서 진짜임을 주장해야 한다. 주장이 거듭될수록 주변의 의심도 커진다. 진실을 말하는 행동이 오히려 사칭범이라는 혐의를 강화한다.

행동을 미루는 왕자와 세상 밖으로 나온 소설가

햄릿의 비극은 행동의 지연과 떨어지지 않는다. 복수의 명령을 받았지만 유령의 증언을 확인하고, 클로디어스의 반응을 살피고,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분석한다. 연극을 이용해 왕의 죄책감을 확인한 뒤에도 즉시 복수하지 않는다. 확실한 진실과 완전한 정당성을 얻으려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주변의 죽음은 늘어난다.

문재의 지연은 햄릿과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문재는 들쥐가 등장하기 오래전부터 세상과의 관계를 멈췄다. 집 안에 머물며 타인과 거리를 두고, 자기 삶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기억과 관계를 바깥에 남겨 둔다. 행동하지 않는 시간이 들쥐가 문재의 사회적 자리를 차지할 여지를 만든다.

햄릿은 복수할 능력이 있으면서도 행동의 의미를 따진다. 문재는 행동을 피하며 만들어진 고립 속에서 삶의 통제권을 잃는다. 두 사람의 지연은 성격적 우유부단함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과 마주하지 않기 위해 시간을 멈춘 결과다.

햄릿에게 생각은 행동을 늦추는 힘이다. 문재에게 은둔은 삶의 참여를 늦추는 선택이다. 지연의 대가는 두 사람 모두 타인의 죽음과 파괴로 돌아온다. 외부의 적이 모든 비극을 단독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행동을 미룬 시간도 파국의 일부가 된다.

거울 속 얼굴과 갈라진 자아

어두운 실내에 앉은 인물 뒤로 불분명한 형상이 겹쳐진다. 전경의 인물과 뒤편의 형상은 현재의 자아와 떨쳐내지 못한 기억 사이에 거리를 만든다. 사진=넷플릭스
어두운 실내에 앉은 인물 뒤로 불분명한 형상이 겹쳐진다. 전경의 인물과 뒤편의 형상은 현재의 자아와 떨쳐내지 못한 기억 사이에 거리를 만든다. 사진=넷플릭스

햄릿은 왕자이면서 아들이고, 연인이면서 복수자다.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해야 하고, 왕위와 국가의 질서를 의식해야 하며, 오필리아와의 관계도 감당해야 한다. 각각의 역할은 하나의 행동으로 모이지 않는다. 아들로서 요구되는 복수와 왕자로서 필요한 판단, 연인으로서 지켜야 할 관계가 충돌한다.

문재에게도 여러 자아가 겹쳐 있다. 이름을 빼앗긴 피해자이면서 과거의 관계를 끊고 숨어 버린 당사자다. 들쥐를 추적하는 사람인 동시에 들쥐가 태어난 배경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인물이다.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진짜이면서 자기 생애의 일부를 받아들이지 못한 불완전한 주인이다.

‘햄릿’은 독백을 통해 갈라진 자아를 언어로 드러낸다. 햄릿은 혼자 남을 때 자신의 의심과 두려움, 분노와 혐오를 입 밖으로 꺼낸다. ‘들쥐’는 자아의 분열을 같은 얼굴을 가진 두 인물로 시각화한다. 문재의 내부에 머물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자아가 별도의 몸을 얻어 문재 앞에 선다.

류준열의 1인 2역은 문재와 들쥐를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분리하지 않는다. 두 인물 사이에는 목소리와 눈빛, 자세와 말의 속도에서 차이가 나타나지만 하나의 뿌리에서 갈라졌다는 인상도 남는다. 문재가 들쥐를 바라보는 일은 타인의 얼굴을 보는 동시에 자신이 살아 보지 않은 또 다른 삶을 마주하는 일이 된다.

거울은 같은 외형을 되돌려주지만 존재의 동일성을 보증하지 않는다. 들쥐가 문재의 얼굴을 완벽하게 복제해도 문재의 기억과 책임까지 자동으로 얻는 것은 아니다. 문재 역시 원래 얼굴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생애 전체를 성실하게 소유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같은 얼굴을 사이에 둔 대립은 어느 쪽이 진짜인지 판정하는 단계에서 누가 자기 삶을 감당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단계로 이동한다.

광기라는 가면과 정상성의 연기

햄릿은 진실을 찾기 위해 광기를 가장한다.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면 왕실의 감시를 피하고 상대의 반응을 살필 수 있다. 그러나 가장된 광기가 오래 이어지면서 연기와 실제 감정의 경계도 흐려진다. 거친 말과 행동은 오필리아를 비롯한 주변 인물에게 실제 상처를 남긴다.

‘들쥐’에서는 반대 방향의 연기가 펼쳐진다. 들쥐는 비정상성을 드러내지 않고 사회가 신뢰할 만한 정상적인 문재를 수행한다. 정돈된 외모와 관계, 적절한 언어와 사회적 행동을 갖추면서 진짜보다 더 안정적인 인물로 받아들여진다.

햄릿은 광기를 연기해 진실에 접근하고, 들쥐는 정상성을 연기해 진실을 가린다. 두 작품 모두 인간의 정체성이 타인의 시선 앞에서 수행되는 역할과 연결돼 있음을 드러낸다. 사회가 광인으로 받아들이면 왕자도 광인이 되고, 사회가 문재로 인정하면 들쥐도 문재의 권리를 행사한다.

문재 역시 진짜라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자신에게는 당연했던 기억과 습관을 타인이 납득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하고, 분노와 공포를 억제해야 한다. 절박하게 행동할수록 불안정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짜가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 감정을 통제하고 행동을 연출해야 하는 역설이 생긴다.

진실을 밝히는 연극과 들쥐를 잡는 덫

햄릿은 극단을 불러 선왕의 독살과 닮은 연극을 상연한다. 클로디어스의 반응을 통해 유령의 증언이 사실인지 확인하려는 계획이다. 연극 안의 허구가 현실의 범죄를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문재와 노자도 들쥐를 잡기 위해 덫을 놓는다. 직접적인 증거가 부족한 상황에서 상대의 반응을 끌어내고, 감춰진 관계와 과거를 밖으로 드러내려 한다. 수동적으로 쫓기던 문재가 추적의 설계자로 이동하는 구간이다.

두 작품에서 연극과 덫은 진실을 확인하는 수단인 동시에 주인공의 변화를 드러낸다. 햄릿은 관찰자에서 연출자로 바뀌고, 문재는 은둔자에서 추적자로 이동한다. 상대를 움직이기 위해 만들어 낸 상황은 주인공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타인의 죄를 드러내기 위해 꾸민 무대에서 자신의 욕망과 잔혹함도 함께 노출된다.

진실은 누군가의 설명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상대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드러내는 반응과 행동이 필요하다. 햄릿과 문재가 선택한 방식은 진실을 말로 듣는 데 그치지 않고 재연과 함정을 통해 눈앞에 나타나게 하는 일이다.

사진=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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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가 자기심판으로 바뀌는 구조

햄릿은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처벌하려 하지만 복수 과정에서 폴로니어스를 죽이고 오필리아와의 관계를 파괴한다. 복수자는 타인의 죄를 심판하면서 자신의 폭력도 쌓아 간다. 클로디어스를 향하던 칼은 덴마크 왕실 전체의 파국을 거친 뒤에야 목적지에 도달한다.

문재도 들쥐에게 삶을 빼앗긴 피해자로 출발한다. 초반의 추적은 권리 회복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갖는다. 사라진 친구와 대학 시절의 기억, 들쥐가 머물렀던 공간으로 접근하면서 문재가 순수한 피해자라는 전제는 흔들린다. 들쥐를 만든 과거와 문재의 선택이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외부의 적을 붙잡는 일은 비교적 단순하다. 범인을 확인하고 범죄의 증거를 확보하면 된다. 자기 과거를 마주하는 일은 다른 문제다. 잘못을 인정하더라도 이미 일어난 사건과 상처를 원래 상태로 돌릴 수 없다. 문재가 들쥐의 정체에 가까워질수록 추적은 복수극에서 자기심판으로 바뀐다.

햄릿과 문재는 모두 진실을 원하지만 진실이 자신을 구해 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알지 못할 때는 행동할 수 없고, 알게 된 뒤에는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 진실은 해방의 열쇠이면서 자기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힘으로 작용한다.

기억과 기록 사이에 놓인 존재의 책임

햄릿의 존재론은 죽음 앞에서 삶을 지속할 근거를 찾는 데 닿아 있다. ‘들쥐’의 존재론은 사회적 기록이 사라진 뒤에도 같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는 근거를 좇는다.

문재는 자신의 기억을 진짜의 증거로 내세운다. 기억이 존재의 연속성을 만든다는 점에서는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기억은 권리만 보장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같은 존재라면 과거의 행동에 대한 책임도 같은 사람에게 돌아간다.

문재가 기억을 통해 자기 삶을 주장하려면 불리한 기억까지 함께 받아들여야 한다. 이름과 재산은 되찾으면서 과거의 책임만 들쥐에게 넘길 수는 없다. 생애의 소유권은 좋은 기억과 고통스러운 결과를 함께 감당할 때 성립한다.

들쥐도 문재의 기록을 차지했다고 문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행정상 신분과 사회적 관계를 수행할 수 있어도 문재가 살아온 시간 전체를 소유하지 못한다. 문재의 기록을 가진 들쥐와 문재의 기억을 가진 진짜 사이에는 각자 결여된 부분이 남는다.

‘들쥐’가 그리는 진짜 인간은 기록과 기억 가운데 하나만 가진 존재가 아니다. 자기 이름으로 살아온 시간을 기억하고, 행동의 결과를 받아들이며,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계속 같은 사람으로 확인되는 존재다.

사진=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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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속보다 어려워진 존재의 입증

햄릿에게 “To be, or not to be”는 고통을 견디며 삶을 지속할 것인지에 관한 독백이다. 문재에게 같은 문장은 다른 형태로 돌아온다. 살아 있는 상태에서 자기 이름을 지킬 수 있는지, 타인의 기록 속에서도 같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는지가 앞에 놓인다.

햄릿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지만 어떤 행동을 해야 그 정체에 부합하는지 고민한다. 문재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면서도 사회가 같은 사실을 인정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햄릿의 갈등이 존재와 행동 사이에 놓였다면 문재의 갈등은 존재와 증명 사이에 놓인다.

문재가 들쥐를 쫓는 과정은 빼앗긴 신분을 되찾는 추적이면서 자기 생애의 주인이 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시간이다. 들쥐의 얼굴을 벗겨 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문재가 버렸던 관계와 외면했던 기억까지 자기 이름 아래 다시 놓아야 한다.

살아 있는 인간에게 존재의 증명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이름과 얼굴은 출발점에 불과하다. 기억과 기록, 관계와 책임이 함께 이어질 때 한 사람의 생애가 성립한다. ‘햄릿’이 죽음을 앞에 두고 삶의 지속을 사유했다면, ‘들쥐’는 살아남은 인간에게 자기 삶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를 들이민다. 문재의 추적은 들쥐를 향해 나아가지만 마지막에 기다리는 대상은 지워진 자기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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