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자’·‘사랑의 종말’ 연작 단막극…2009년 일본 연기 워크숍에서 시작된 THEATRE ATMAN 협업, 7월 30일 인천 이어 8월 5일 서울
“작년 작품이 꽤나 무거웠으니 올해는 조금 가벼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KtN 박준식기자]지난해 ‘TUKO! TUKO!’로 전쟁과 역사적 상처를 다룬 이재상 연출이 사랑에 관한 단막 코미디 두 편을 새로 썼다. 최근 도쿄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이재상 연출은 “1년이 지나는 동안 지구는 좀 더 더워지고, 세계는 좀 더 어수선해진 느낌”이라며 “세상이 어두울수록 사랑과 웃음이 더욱 밝게 빛나는 법”이라고 새 작품의 출발점을 밝혔다.
Theatre M.I.R와 일본 THEATRE ATMAN의 한일 합동공연 ‘정류장-두 개의 이야기’는 7월 30일부터 8월 1일까지 인천 문학시어터에서 공연된다. 8월 5일부터 9일까지는 서울 대학로 드림시어터로 무대를 옮긴다. 이재상이 쓰고 연출한 ‘도망자’와 ‘사랑의 종말’을 한 공연에서 연달아 선보인다. 한국과 일본 배우들은 대사를 한 언어로 통일하지 않고 각자의 모국어로 연기하며, 일본어 대사에는 한글 자막을 붙인다.
지난해의 전쟁에서 올해의 사랑으로 소재는 달라졌지만, 이재상 작품이 오랫동안 다뤄온 인간의 선택과 그 선택이 남기는 결과는 ‘정류장’에도 이어진다. 현실의 외진 정류장과 저승으로 향하는 정류장에서 각자의 삶을 안고 온 사람들이 만나고, 우연처럼 시작된 대화가 인물의 운명을 바꾼다. 사랑을 웃음의 소재로 가져오면서도 관계 안에 함께 존재하는 다정함과 집착, 구원과 속박을 블랙코미디 안에 배치했다.
이재상 연출이 말한 ‘가벼운 이야기’는 다루는 내용의 무게보다 표현 방식과 가깝다. 두 단막에는 저승과 죽음, 도망과 종말이 등장한다. 버스가 오지 않는 정류장에 갇힌 인물들은 쉽게 떠날 수 없고, 상대를 외면한 채 대화를 끝내기도 어렵다. 웃음의 비중은 커졌지만 사랑을 선택한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책임까지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떠나려는 사람과 기다리는 사람
정류장은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에 놓인 공간이다. 집처럼 머무는 곳도 아니고, 목적지처럼 도착이 완료된 곳도 아니다.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같은 방향의 버스를 기다리거나,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잠시 서 있는 곳이다. ‘정류장-두 개의 이야기’는 떠나기 직전의 짧은 시간을 늘려 인물들이 감춰둔 사정을 꺼내도록 한다.
무대 중앙에는 흰 벤치가 놓이고 한쪽에는 정류장 표지판이 선다. 검은 벽면과 최소한의 무대 장치 사이에서 배우의 위치와 거리가 관계를 드러낸다. 벤치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이 같은 곳을 바라보는지, 몸을 돌려 상대를 마주하는지, 한 사람이 벤치를 떠나 서 있는지에 따라 대화의 긴장이 달라진다.
주황빛과 청색 계열 조명도 같은 정류장의 온도를 바꾼다. 무대 구조를 크게 바꾸지 않은 채 빛과 배우의 배치로 현실의 정류장과 저승으로 가는 정류장을 나누는 구성이다. 두 공간의 경계가 명확히 갈라지기보다, 평범한 기다림이 어느 순간 낯선 상황으로 넘어가도록 만든다.
첫 번째 단막 ‘도망자’는 외진 곳의 한적한 정류장에서 시작한다. 버스는 오지 않고, 젊은 여자가 청년을 찾아온다. 곤란한 처지에 놓인 듯한 남자와 찾아온 목적을 곧바로 밝히지 않는 여자가 대화를 시작한다. 떠나려는 사람과 직접 찾아온 사람이 같은 벤치에 머무르면서 두 사람의 관계와 도망의 사정이 조금씩 드러난다.
남자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지만 여자는 버스가 아니라 남자를 찾아왔다. 같은 장소에 도착한 이유가 처음부터 다르다. 제목에 놓인 ‘도망자’가 누구인지,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려는지, 여자가 도망을 막으러 왔는지 함께 떠나기 위해 왔는지는 줄거리에서 미리 설명하지 않는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두 사람의 말과 행동 사이에 감춰졌던 관계가 드러나는 구조다.
두 번째 단막 ‘사랑의 종말’에서는 말끔하게 차려입은 중년 남자가 외진 곳의 허름한 정류장에서 누군가를 기다린다. 평범한 약속처럼 시작된 기다림에 섬뜩한 대화가 끼어들고, 현실의 질서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 이어진다. ‘도망자’가 찾아온 사람과 떠나려는 사람을 마주 세운다면, ‘사랑의 종말’은 기다림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을 무대에 남긴다.
두 단막은 젊은 남녀와 중년 남자, 찾아옴과 기다림, 현실과 저승을 나란히 놓는다. ‘도망자’의 정류장에서는 앞으로 움직이려는 욕망이 중심에 놓이고, ‘사랑의 종말’의 정류장에서는 이미 지나간 관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시간이 부각된다.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과 끝나는 순간을 차례대로 보여주기보다, 관계를 붙잡는 사람과 벗어나려는 사람의 위치를 바꾸며 사랑의 양면성을 살핀다.
제목도 두 작품의 방향을 압축한다. ‘도망자’는 이동과 탈출을 전제하고, ‘사랑의 종말’은 관계의 끝을 먼저 알린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 인물이 원하는 때에 버스가 오지 않는 정류장을 배경으로 삼는다. 떠나거나 끝내려는 의지가 곧바로 실행되지 않는 상황에서 인물들은 상대의 말을 들어야 하고, 자신의 선택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전쟁과 AI에서 사랑으로 옮겨온 블랙코미디
이재상 연출의 전작들은 인간이 통제하기 어려운 거대한 질서와 개인의 선택을 함께 다뤘다. 2024년 아시아 세계 희곡작가 축제에서는 페르난도 아라발(Fernando Arrabal)의 ‘AI 기도’와 ‘이야기 카페 vol.1-전쟁터의 피크닉’을 연출했다. ‘AI 기도’는 2053년을 배경으로 인공지능과 인간의 관계를 다뤘고, ‘전쟁터의 피크닉’은 전쟁의 무익함과 인간의 어리석음을 한국 근현대사와 결합해 풀었다. 양창완, 양은영, 유무선과 일본 배우 시미즈 쿠미, 고모리 사토시도 당시 한일 합동 무대에 참여했다.
2025년 ‘TUKO! TUKO!’에서는 범위가 한국과 일본을 넘어 필리핀까지 넓어졌다. 필리핀 극작가 안톤 후안(Anton Juan)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국과 일본 배우들이 각자의 모국어로 연기했고, 전쟁의 상흔과 가해·피해의 역사, 현재에도 다른 모습으로 반복되는 여성의 고통을 무대에 올렸다. 인천과 서울을 거쳐 일본 도쿄까지 이어진 국제 공동작업이었다.
‘정류장’에서는 국가와 역사, 전쟁과 기술문명에서 남녀 사이의 관계로 범위가 좁아진다. 인물 수와 공간도 줄었지만 선택이 운명을 바꾼다는 기존 작업의 흐름은 남아 있다. 전작에서 개인은 전쟁과 기술, 역사라는 거대한 질서 앞에 놓였다. 이번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붙잡거나 떠나고, 기다리거나 포기하는 개인의 결정이 서사를 움직인다.
블랙코미디도 전작과 신작을 잇는다. ‘전쟁터의 피크닉’이 전쟁의 참혹함과 철없는 행동을 충돌시켜 웃음을 만들었다면, ‘정류장’은 사랑이라는 익숙한 감정과 도망·저승·종말이라는 불안한 조건을 맞붙인다. 상황은 위험하거나 섬뜩하지만 인물의 말과 반응은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웃음이 긴장을 낮추는 순간에도 인물이 처한 상황은 사라지지 않는다.
전쟁을 다룬 뒤 사랑을 택한 변화는 현실에서 눈을 돌리는 선택과는 거리가 있다. 이재상 연출은 더워진 지구와 어수선해진 세계를 언급한 뒤 사랑과 웃음을 새 작품의 언어로 제시했다. 현실의 무게를 반복해서 재현하기보다, 어두운 상황에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감정과 웃음의 역할을 살피는 쪽으로 이동했다.
2009년 워크숍에서 시작된 한일 공동작업
Theatre M.I.R와 THEATRE ATMAN의 협업은 공연 한 편을 위해 배우를 교환하는 단기 프로젝트가 아니다. THEATRE ATMAN은 2009년 이재상 연출의 일본 연기 워크숍에 참가했던 배우들을 중심으로 결성됐다. 초대 대표 야마구치 타쿠야(Yamaguchi Takuya)에 이어 시미즈 쿠미(Shimizu Kumi)가 극단을 맡고 있으며, 이후 두 단체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공동작업을 이어왔다.
출발점이 연기 워크숍이었다는 사실은 두 단체의 관계를 설명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완성된 작품을 교환하는 데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배우가 몸과 목소리를 쓰는 방식을 함께 훈련한 뒤 극단과 공연으로 협업 범위를 넓혔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배우들이 오랜 기간 같은 무대에 설 수 있었던 배경에도 연기 방법과 공연 리듬을 공유해 온 시간이 놓여 있다.
‘기억의 방’과 ‘전쟁터의 피크닉’, ‘TUKO! TUKO!’를 거친 공동작업은 ‘정류장’에서 또 한 번 방향을 바꾼다. 앞선 무대들이 해외 희곡을 번역하거나 각색해 함께 해석하는 작업이었다면, ‘정류장’은 이재상 연출이 직접 쓴 신작을 한일 배우가 공동으로 공연한다. 협업의 중심이 기존 작품의 재해석에서 새로운 창작 레퍼토리 제작으로 옮겨간 셈이다.
Theatre M.I.R는 2008년 창단한 인천시 지정 전문 예술 공연 단체다. ‘기억의 방’, ‘시간의 저편’, ‘미드나이트 포장마차’, ‘물의 기억’, ‘별이 내려온다!’, ‘현자를 찾아서’ 등 창작극과 ‘바냐 아저씨’, ‘갈매기’, ‘보이체크’, ‘안티고네’ 등 고전을 공연해 왔다. 이미지극과 다중언어연극, 한일 공동작업도 극단의 주요 제작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2025년에는 극단 MIR 레퍼토리에서 Theatre M.I.R로 표기를 변경했다.
번역하지 않은 목소리, 자막으로 이어지는 대화
‘정류장’에는 양창완, 양은영, 유무선, 김지수와 시미즈 쿠미(Shimizu Kumi), 고모리 사토시(Komori Satoshi), 이치노세 카나데(Ichinose Kanade)가 출연한다. 조명은 이나구, 무대감독은 이강덕, 무대 제작은 예술터가 맡았다.
한국어와 일본어를 한 언어로 바꾸지 않는 방식은 언어 차이를 공연 밖으로 밀어내지 않는다. 관객은 일본 배우의 말뜻을 자막으로 읽지만, 감정의 높낮이와 말의 속도, 멈춤과 호흡은 배우의 목소리로 받아들인다. 번역된 문장과 실제로 들리는 목소리가 동시에 존재한다.
배우 사이에서도 언어는 연기의 조건이 된다. 상대의 대사를 단어로만 듣지 않고 표정과 호흡, 몸의 방향과 움직임으로 함께 받아야 한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가 오가는 짧은 간격은 공연의 결함이 아니라 한일 배우가 함께 만드는 리듬으로 남는다. 같은 말을 사용해서 가까워지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 다른 말을 들으면서 관계를 만들어 가는 무대다.
사랑을 다루는 작품에서 두 언어의 병치는 내용과도 맞닿는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도 말의 뜻이 언제나 정확히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해도 의도를 오해하고, 말하지 않은 감정을 짐작하며, 상대의 표정과 침묵을 해석한다. 한국어와 일본어가 교차하는 ‘정류장’에서는 관계 안에 존재하는 거리와 이해의 과정이 청각적으로도 드러난다.
인천 공연은 7월 30일과 31일 오후 7시30분, 8월 1일 오후 2시와 6시에 문학시어터에서 열린다. 서울 공연은 8월 5일부터 7일까지 오후 7시30분, 8월 8일 오후 2시와 6시, 8월 9일 오후 3시에 대학로 드림시어터에서 이어진다. 예매처 공연 일정에도 인천은 7월 30일부터 8월 1일, 서울은 8월 5일부터 9일로 등록됐다.
관람료는 전석 3만원이다. 복지 대상자와 중·고등학생, 10명 이상 단체는 2만1000원, 예술인패스 소지자는 1만원이다. Theatre M.I.R가 주최·주관하고 THEATRE ATMAN이 협력하며 인천광역시와 인천문화재단이 후원한다.
‘정류장’은 17년 가까이 이어진 한일 연극인들의 공동작업을 이재상 연출의 창작 단막극으로 확장한다. 전쟁과 역사, 인공지능을 지나 사랑으로 옮겨온 무대에는 떠나려는 사람과 기다리는 사람, 현실에 남은 사람과 저승을 향하는 사람이 차례로 들어선다. 인천에서 시작하는 열 차례의 국내 공연은 사랑과 웃음을 전면에 놓되, 선택 이후에 남는 책임과 관계의 끝까지 함께 다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