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다이어리로 되돌아온 종이와 펜…구띠커피갤러리 ‘첫담’과 ‘남과 여’ 게시판에 머무는 아날로그 기억
[KtN 박준식기자]사람을 찾는 일은 빨라졌다. 오래전 알고 지낸 사람도 이름 몇 글자를 검색하면 흔적을 만날 가능성이 커졌고, 연락처가 남아 있다면 몇 초 안에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 사진과 영상도 곧바로 전달된다. 그런데 구띠커피갤러리의 ‘첫사랑찾기’는 빠른 연락 대신 손으로 이름을 쓰는 데서 시작한다.
카페로 들어가는 붉은 벽돌길 ‘첫담(첫사랑 담벼락)’에는 첫사랑의 기억을 글로 남긴다. 첫담을 지나 실내로 들어가면 작품이 전시되는 갤러리 공간에 별도의 ‘남과 여’ 게시판이 마련된다. 게시판에는 첫사랑에게 남기고 싶은 메모가 포스트잇 형태로 놓이게 된다.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사실과 다시 연락한다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이름을 검색할 수 있어도 검색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연락처를 알고 있어도 메시지를 보내지 않는 관계가 있다.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지만 현재의 삶으로 다시 불러들이고 싶지는 않은 사람도 있다.
손글씨는 두 행동 사이에 여백을 둔다. 이름을 쓰고, 기억을 적고, 담이나 게시판에 남긴 뒤 돌아설 수 있다. 상대방에게 알림이 가지 않고 답장을 기다리는 창도 열리지 않는다. 한 사람을 기억했다는 사실만 현실의 공간에 남는다.
종이와 펜을 다시 찾는 움직임은 최근 한국의 문화 소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2025년에는 책의 문장을 직접 옮겨 쓰는 필사가 젊은 층을 중심으로 확산됐고, 필사를 위해 별도로 제작된 책과 문구류도 잇따라 등장했다. 디지털 콘텐츠를 눈으로 넘기는 데서 벗어나 종이를 만지고 직접 글자를 적는 경험을 찾는 흐름과 맞물렸다.
문구 소비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국내 온라인 플랫폼 29CM가 2025년 2월 1일부터 12일까지 집계한 문구·사무용품 거래액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75% 증가했다. 고급 만년필·볼펜·연필 판매는 2.4배, 다이어리와 플래너는 64%, 노트는 43% 늘었다. 디지털 기기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세대가 종이 기록을 동시에 소비하는 흐름이 수치에도 잡혔다.
아날로그 기록을 디지털의 반대편에만 놓기도 어렵다. 손으로 쓴 필사와 꾸민 다이어리를 다시 SNS에 올리고, 온라인에서 본 기록 방식을 종이 위에서 따라 하는 경우도 많다. 종이와 화면 가운데 하나를 버리는 변화라기보다 화면에서 발견한 것을 손으로 옮기고 다시 디지털 공간에서 공유하는 순환에 가깝다. 최근 아날로그 저널링 연구에서도 종이 기록은 사용하는 재료와 개인의 상황,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함께 작용하는 문화적 행위로 다뤄지고 있다.
첫사랑이라는 기억을 포스트잇에 적는 행위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휴대전화 메모장에 입력한 이름은 기기 안에 머물지만, 손으로 쓴 이름에는 작성자의 흔적이 남는다. 크게 눌러 쓴 글씨와 작게 적은 문장, 한동안 머뭇거린 뒤 고쳐 쓴 자국까지 모두 기록의 일부가 된다.
첫담의 붉은 벽돌은 이런 기록에 물성을 더한다. 담은 스크롤을 내리면 지나가는 게시물이 아니다. 글을 남기려면 직접 그 장소까지 와야 하고, 기록을 마친 뒤에도 벽은 같은 자리에 남는다.
담벼락에 이름을 쓰던 문화에는 오래된 기억도 겹쳐 있다. 학교 담장이나 골목길, 여행지의 벽에서 누군가의 이름과 날짜, 짧은 문장을 발견하던 시대가 있었다. 첫담은 무분별한 낙서를 되살리는 방식이 아니라 지정된 공간 안에서 첫사랑의 기억을 기록하는 문화 장치로 구상된다.
카페 내부의 ‘남과 여’ 게시판은 담벼락과 다른 역할을 맡는다. 첫담이 자신에게 남아 있는 기억을 꺼내는 곳이라면, 실내 게시판에는 특정한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메모가 모인다. 같은 첫사랑을 다루면서도 담의 글은 기억에, 포스트잇은 전달의 가능성에 조금 더 가까이 놓인다.
게시판이 들어서는 곳이 일반 카페의 이벤트 벽이 아니라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 공간이라는 점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벽에는 작가가 완성한 작품이 놓이고, 별도로 마련된 게시판에는 방문객이 직접 쓴 문장이 쌓인다. 미술 작품과 사적인 메모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섞기보다 각자의 자리를 분명히 두는 편이 중요하다.
‘남과 여’ 게시판에 붙는 메모 가운데에는 첫사랑을 위해 미리 마련한 스페셜 블렌드와 연결되는 기록도 들어갈 예정이다. 선결제 커피의 구체적인 방식은 별도의 이야기지만, 포스트잇이 단순한 감상문에서 누군가에게 남겨둔 약속으로 성격을 달리하는 대목은 기록문화와도 맞닿아 있다.
게시판에 글을 남긴 뒤에도 작성자가 상대를 직접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포스트잇은 연락을 대신하지 않는다. 읽는 사람이 나타날 가능성을 열어둔 채 공간에 머문다. 즉시 전송되는 메시지와 가장 다른 부분이다.
온라인에서는 글을 올린 뒤 반응을 확인하는 일이 자연스럽다. 조회 수와 댓글, 읽음 표시가 기록의 다음 행동을 재촉한다. 담과 포스트잇에는 그런 숫자가 없다. 누가 읽었는지 알 수 없고, 읽은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도 확인되지 않을 수 있다.
반응이 보이지 않는다고 기록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종이에 적는 행위 자체가 생각을 정리하고 기억을 붙잡는 방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25년 한국에서 필사 문화가 확산된 배경에도 빠르게 콘텐츠를 넘겨보는 것과 달리 한 문장을 손으로 천천히 옮겨 쓰는 경험에 대한 관심이 자리했다.
첫사랑을 적는 일은 책의 문장을 베껴 쓰는 필사와는 다르다. 가져올 원문이 없다. 이름을 쓸지, 장소를 적을지, 미안하다는 말을 남길지 스스로 정해야 한다. 오래전 기억에서 어떤 문장을 꺼낼 것인지 선택하는 시간이 손끝에 먼저 걸린다.
짧은 포스트잇은 긴 사연보다 오히려 선택을 요구한다. 한 사람과 보낸 몇 년을 몇 줄에 모두 옮길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남는 것은 작성자가 지금까지도 기억하는 이름이나 장소, 가장 늦게까지 마음에 남은 한마디일 가능성이 크다.
첫사랑을 지나치게 낭만화하지 않는 태도도 필요하다. 모든 사람이 첫사랑을 아름답게 기억하지 않으며, 누군가에게는 다시 꺼내고 싶지 않은 관계일 수 있다. 첫담과 게시판은 참여하고 싶은 사람에게 기록의 공간을 제공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쓰지 않을 자유와 답하지 않을 자유도 함께 남아 있어야 한다.
손글씨 문화의 흥미로운 대목도 강제하지 않는 데 있다. 모두가 아날로그로 돌아가야 한다는 흐름이 아니다. 빠른 디지털 기록이 필요한 순간이 있고, 굳이 천천히 써보고 싶은 기억도 있다. 2025년 종이책과 아날로그 미디어를 다룬 국내 연구 역시 디지털 환경 속에서도 종이가 촉각과 물질성, 집중의 경험을 별도로 갖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구띠커피갤러리의 첫담과 ‘남과 여’ 게시판은 이런 문화적 흐름을 카페라는 장소에 옮긴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스마트폰에 기록하는 대신 펜을 들고, 온라인 계정에 공개하는 대신 실제 벽과 게시판에 흔적을 남긴다.
카페라는 장소도 기록에 시간을 부여한다. 집에서 혼자 써서 서랍에 넣는 일과 달리 자신이 남긴 글이 다른 사람의 시선이 오가는 공간에 놓인다. 공개된 기록이지만 누구에게 즉시 전달되는 메시지는 아니다. 사적인 기억과 열린 공간 사이에 머무는 독특한 위치다.
첫담을 지나 ‘남과 여’ 게시판에 붙은 포스트잇이 늘어난다면 흥미로운 것은 메모의 개수보다 어떤 말이 반복되는가일 것이다. ‘보고 싶다’보다 ‘고맙다’가 많을 수도 있고, 재회를 원하는 말보다 잘 지내기를 바라는 문장이 더 많이 남을 수도 있다. 실제 기록이 쌓인 뒤에는 첫사랑을 기억하는 오늘의 언어도 읽어볼 수 있다.
첫사랑을 찾는 가장 빠른 방법은 검색일 가능성이 높다. 구띠커피갤러리가 택한 방법은 빠르지 않다. 붉은 벽돌에 흔적을 남기고, 종이에 몇 글자를 쓰고, 갤러리 한쪽에 붙여둔다.
찾을 수 있는 시대에 곧바로 찾지 않고, 보낼 수 있는 시대에 잠시 보내지 않는 선택이다. ‘첫사랑찾기’의 두 번째 문화적 결은 사람을 얼마나 빨리 연결하느냐보다 오래된 기억을 어떤 속도로 다시 꺼내는가에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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