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본으로 새긴 밀의 촉감과 겹겹이 스민 하늘…'어린 왕자'의 서사를 관계 이후의 풍경으로 확장
[KtN 박준식기자]강석태의 '밀밭에 구름이 분다'에는 푸른 하늘과 밀밭이 수평으로 길게 이어진다. 밀 이삭은 한 방향으로 몸을 낮추고, 흰 구름은 바람을 따라 느슨하게 흩어진다. 바람은 형태를 갖지 않지만 기울어진 줄기와 번지는 구름 사이에서 끊임없이 움직인다. 인물 하나 없는 풍경에 누군가 지나간 시간과 아직 남아 있는 기억이 포개진다.
장지에 옮긴 밀의 흔적은 붓으로 정교하게 묘사한 선과 다르다. 탁본으로 드러난 줄기와 이삭에는 대상이 종이에 닿았던 순간의 압력과 마찰이 고스란히 남는다. 검은 선은 또렷하게 솟아오르다가 희미하게 끊기고, 서로 겹치며 밀밭 특유의 촘촘한 결을 만든다. 같은 방향으로 반복되는 형태도 농도와 간격이 조금씩 달라 기계적인 문양으로 굳지 않는다.
밀 이삭의 기울기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완만한 흐름을 만든다. 개별 줄기를 따라가던 시선은 어느 순간 밀밭 전체를 훑는 바람의 방향과 나란해진다. 작가는 보이지 않는 바람을 그리는 대신 바람을 받아낸 사물의 변화를 새겼다. 움직임이 지나간 뒤의 흔적이 작품의 리듬을 결정한다.
탁본은 대상의 외형만 옮기지 않는다. 손의 힘과 종이의 상태, 재료가 맞닿은 시간까지 결과에 개입한다. 강석태는 선명한 흔적과 불완전한 자국을 한데 두어 밀밭을 재현과 기억의 경계에 놓았다. 형태가 흐려진 부분에서는 시간이 멀어진 기억이, 검게 남은 부분에서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감각이 떠오른다.
밀밭 위로는 넓은 하늘이 열려 있다. 푸른색은 한 번에 평평하게 칠해지지 않고 짙고 옅은 층으로 쌓였다. 붓질과 번짐, 닦여나간 흔적이 겹치면서 하늘은 깊이를 얻는다. 흰 구름도 단단한 윤곽을 갖지 않는다. 푸른 바탕 안으로 스며들거나 가장자리부터 흩어지며 머무름과 소멸 사이의 상태를 드러낸다.
하늘과 밀밭은 같은 푸른색을 공유하면서도 서로 다른 물성으로 구분된다. 하늘에서는 채색의 번짐과 여백이 넓은 호흡을 만들고, 밀밭에서는 탁본의 검은 선과 반복이 조밀한 밀도를 형성한다. 자유롭게 흩어지는 구름과 일정한 방향으로 기운 이삭이 위아래에서 마주하며 고요한 풍경 안에 미세한 긴장을 남긴다.
폭이 길게 펼쳐진 형식은 작품을 한눈에 압축하기보다 천천히 따라가게 한다. 밀 이삭의 밀도는 구간마다 달라지고, 구름도 서로 다른 속도로 이동하는 듯 이어진다. 관람자의 시선은 수평선을 따라 움직이며 하나의 장소에서 여러 순간을 통과한다. 긴 구도는 바람이 머물고 기억이 지속될 시간을 확보한다.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éry)의 '어린 왕자'에서 밀밭은 관계를 맺은 뒤 비로소 특별해진다. 여우에게 황금빛 밀은 어린 왕자의 머리카락을 떠올리게 하고, 평범했던 풍경은 한 존재를 기억하는 표지가 된다. 강석태는 밀밭의 의미를 직접적인 삽화나 서사적 묘사로 옮기지 않는다. 인물을 비운 자리에 밀과 바람, 구름을 남겨 관계가 지나간 뒤 달라진 풍경을 그린다.
작품 속 밀밭은 익숙한 황금색 대신 푸른색으로 물들어 있다. 현실의 계절과 자연색에서 벗어난 파랑은 밀밭을 특정 장소가 아닌 내면의 영역으로 옮긴다. 하늘과 땅은 수평선으로 나뉘지만 같은 색 안에서 연결되고, 검은 밀 이삭과 흰 구름은 푸른 공간의 아래와 위에서 서로 다른 시간의 결을 만든다.
인물의 부재는 서사를 지우기보다 감각을 넓힌다. 어린 왕자의 모습이나 소설의 한 대목을 재현하지 않아도 밀밭은 만남과 이별, 기억의 흐름을 불러낸다. 비어 있는 풍경에는 떠난 존재와 남겨진 사람이 함께 머문다. 말로 설명되지 않은 관계의 흔적이 반복된 밀 이삭과 구름의 여백 사이에 놓인다.
2002년 첫 개인전 '별을 찾아가다'부터 어린 왕자를 소재로 작업해 온 강석태에게 문학은 도상을 빌려오는 원천에 그치지 않는다. '밀밭에 구름이 분다'는 소설 속 밀밭을 작가가 지나온 시간과 기억의 풍경으로 옮긴다. 탁본은 한때 맞닿았던 존재의 촉감을 남기고, 푸른 채색은 시간이 흐르며 겹쳐진 감정을 품는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기울어진 밀의 방향이 남고, 구름이 흩어진 자리에는 옅은 흰빛이 번진다. 강석태는 사라지는 순간을 붙들어 고정하기보다 움직임이 남긴 자국을 길게 펼쳐 보인다. '밀밭에 구름이 분다'는 관계가 끝난 뒤에도 일상의 풍경 속에서 되살아나는 기억의 지속을 탁본의 촉감과 푸른색의 깊이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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