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과 추상, 통제와 우연이 교차한 2026년작…어린 왕자의 출발을 현재의 감각으로 재구성
[KtN 박준식기자]강석태의 '어린 왕자와 여행하기'에서 붉은 비행기는 옅은 푸른 하늘을 가로질러 왼쪽으로 향한다. 어린 왕자와 여우가 나란히 올라탔고, 파란 목도리는 비행 방향과 반대로 길게 뻗었다. 비행기 아래에는 비스듬히 기운 풀밭이 펼쳐진다. 하늘과 땅을 뒤덮은 수많은 색점과 선은 출발의 설렘만이 아니라 익숙한 세계를 벗어날 때 밀려오는 감각의 동요까지 끌어낸다.
작품의 중심은 중앙에서 비껴나 있다. 비행기를 상단 오른쪽에 배치하면서 앞쪽에는 넓은 공간을, 뒤쪽에는 지나온 자리를 남겼다. 어린 왕자가 향하는 곳은 비어 있고 목적지도 제시되지 않는다. 아직 이름 붙지 않은 공간을 향해 나아가는 비행기의 위치가 여행의 시작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붉은 동체와 회전하는 프로펠러, 뒤로 날리는 목도리는 움직임의 방향을 결정한다. 비행기의 둥글고 단순한 형태에서는 동화적 친근감이 묻어나지만, 진행 방향을 향해 모인 선은 속도감을 잃지 않는다. 어린 왕자는 몸을 곧게 세운 채 앞을 바라본다. 빠르게 이동하는 바깥 풍경과 차분한 자세가 대비되며 출발은 충동적인 탈출보다 스스로 받아들인 선택에 가까워진다.
옅은 푸른 바탕에는 분홍과 노랑, 초록, 보라, 파랑의 물감이 점과 선으로 흩어져 있다. 짧게 맺힌 색점과 가늘게 뻗은 선, 흘러내린 물감 자국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교차한다. 구름이나 별을 묘사하지 않은 하늘은 여백으로 머무르지 않고 색채가 발생하고 흩어지는 공간으로 바뀐다.
물감의 흔적에는 작가의 동작과 재료의 우연이 함께 남아 있다. 붓으로 통제한 인물의 윤곽과 달리 흩뿌려진 물감은 완전히 예측할 수 없는 모양으로 번지고 끊긴다. 또렷한 구상과 비정형의 색채가 한 작품에서 만나는 지점이다. 어린 왕자와 비행기는 이야기의 중심을 잡고, 주변으로 확산된 색은 여행이 불러오는 정서를 언어와 서사의 바깥까지 넓힌다.
풀밭은 촘촘한 선의 중첩으로 만들어졌다. 검은 바탕 위에 초록과 노랑의 선이 얽히고, 하늘에서 시작된 원색의 흔적이 풀 사이까지 파고든다. 하늘과 땅은 색과 밀도에서 구분되지만 완전히 갈라지지 않는다. 물감 자국이 경계를 넘나들면서 여행 전과 여행 후, 현실과 상상 사이의 구획도 느슨해진다.
비스듬히 흐르는 언덕은 작품에 안정된 수평을 허용하지 않는다. 풀밭의 경사와 비행기의 진행 방향은 서로 어긋나며 긴장을 만들고, 아래쪽의 조밀한 선과 위쪽의 넓은 푸른색은 무게와 개방감을 나눠 가진다. 비행기는 땅의 밀도에서 벗어나 열린 공간으로 진입하지만, 풀밭에 흩어진 색은 떠나온 세계와 하늘이 여전히 이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강한 붉은색은 작품 전반의 시선을 비행기로 모은다. 노란 머리카락과 여우, 보라색 옷, 파란 목도리는 주변에 흩어진 색채와 호응한다. 중심 형상의 색이 바깥으로 번져나간 듯한 배열은 여행을 단순한 공간 이동에서 감각의 변화로 확장한다. 익숙했던 세계는 출발과 함께 이전보다 더 많은 색을 갖게 된다.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éry)의 '어린 왕자'에서 여행은 만남을 거치며 관계와 책임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강석태는 소설의 특정 삽화를 옮기기보다 별을 떠나는 마음에 집중한다. 세상에 하나뿐인 장미와 노을을 바라보던 의자를 뒤로하고 미지의 세계로 향한 용기는 붉은 비행기의 전진하는 형태와 열린 여백에 담겼다.
여우를 어린 왕자의 동행자로 배치한 점도 원작의 서사를 새롭게 읽게 한다. 소설에서 여우는 관계를 맺는 일의 의미를 일깨우는 존재다. 작품에서는 만남 이후 기억으로 남는 대신 어린 왕자와 같은 비행기에 오른다. 관계를 통해 얻은 깨달음은 떠남을 막는 무게가 아니라 다음 여정을 함께 건너는 힘으로 전환된다.
장지는 아크릴 물감의 선명도를 받아내면서 색을 지나치게 매끈하게 만들지 않는다. 종이의 부드러운 질감 위에 윤곽선과 짧은 붓질, 흩뿌린 물감이 층을 이루며 서로 다른 시간성을 드러낸다. 인물과 비행기에는 형태를 완성하는 시간이, 풀밭에는 선을 축적하는 시간이, 색점에는 찰나의 동작이 남아 있다. 한 작품 안에서 느린 제작과 순간적인 행위가 교차한다.
강석태는 2002년 첫 개인전 '별을 찾아가다'부터 어린 왕자를 소재로 작업해 왔다. 2026년작 '어린 왕자와 여행하기'는 오래 다뤄온 문학적 인물을 밝은 색과 분방한 물감의 움직임 속에 다시 놓는다. 어린 왕자는 과거의 순수를 회상하는 표상에 머물지 않고, 현재도 여행을 계속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붉은 비행기 앞에는 아직 채워지지 않은 푸른 공간이 펼쳐져 있다. 뒤편에서는 물감의 선들이 비행의 흔적처럼 길게 이어지고, 아래의 풀밭은 출발 이전의 시간을 단단히 붙든다. 강석태는 떠나는 순간과 남겨진 기억을 한쪽으로 가르지 않는다. 관계를 품고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마음이 구상의 명료함과 추상의 자유로움 사이에서 생생한 색의 궤적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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