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빌리 와일더·레이먼드 챈들러 각색…로스앤젤레스의 어둠과 고백형 서사, 보험회사 직원을 범죄자로 세운 할리우드 누아르의 전환

[영화 인사이트⑤] ‘Double Indemnity’, 욕망과 보험범죄가 만든 필름 누아르의 문법. 사진=Jay's Classic Movie
[영화 인사이트⑤] ‘Double Indemnity’, 욕망과 보험범죄가 만든 필름 누아르의 문법. 사진=Jay's Classic Movie

[KtN 최유식기자]목발을 짚은 남자의 검은 실루엣이 앞으로 다가온다. 밤의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자동차 한 대가 신호를 무시한 채 질주한다. 운전자는 보험회사 직원 월터 네프. 총상을 입은 네프는 회사 사무실에 도착해 녹음기 앞에 앉는다. 살인과 보험사기에 가담한 남자가 이미 파국에 도달한 뒤 자신의 범죄를 되짚는 순간부터 ‘Double Indemnity’는 시작한다.

1944년 4월 공개된 빌리 와일더(Billy Wilder)의 ‘Double Indemnity’는 범인이 누구인지 감추는 영화가 아니다. 결말에 가까운 순간을 먼저 제시하고, 프레드 맥머리(Fred MacMurray)가 연기한 월터 네프의 고백을 따라 과거로 돌아간다. 관객이 지켜보는 것은 범죄의 성공 여부보다 평범한 보험회사 직원이 어느 순간부터 되돌아올 수 없는 선택으로 들어갔는지에 가깝다.

[영화 인사이트⑤] ‘Double Indemnity’, 욕망과 보험범죄가 만든 필름 누아르의 문법. 사진=Jay's Classic Movie
[영화 인사이트⑤] ‘Double Indemnity’, 욕망과 보험범죄가 만든 필름 누아르의 문법. 사진=Jay's Classic Movie

월터가 고객의 집을 찾으면서 범죄는 시작된다. 바버라 스탠윅(Barbara Stanwyck)이 연기한 필리스 디트릭슨은 남편이 없는 집에서 월터를 맞는다. 보험계약을 설명하던 대화는 남편 몰래 상해보험을 들 수 있느냐는 질문으로 넘어간다. 보험금을 둘러싼 살인의 의도를 눈치챈 월터는 처음에는 집을 나서지만 다시 필리스를 찾아간다.

제임스 M. 케인(James M. Cain)의 범죄소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는 보험이라는 평범한 산업을 살인의 설계도로 바꿨다. 월터는 범죄조직의 일원도, 전문 살인범도 아니다. 어떤 사고에 보험금이 지급되고 보험회사가 사망 사건을 어떻게 조사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직장인이다. 범죄를 막는 데 쓰여야 할 전문지식이 완전범죄를 설계하는 수단으로 뒤집힌다.

제목의 ‘Double Indemnity’도 보험계약에서 나왔다. 일정한 사고 조건에서 보험금을 배액 지급하는 조항이다. 필리스와 월터는 남편을 죽이고 사고사로 위장해 더 많은 보험금을 받는 계획을 세운다. 살인의 방법과 시점, 시신을 발견하게 만드는 과정까지 보험회사의 규정을 거꾸로 이용한다.

[영화 인사이트⑤] ‘Double Indemnity’, 욕망과 보험범죄가 만든 필름 누아르의 문법. 사진=Jay's Classic Movie
[영화 인사이트⑤] ‘Double Indemnity’, 욕망과 보험범죄가 만든 필름 누아르의 문법. 사진=Jay's Classic Movie

1930년대 할리우드 갱스터 영화가 조직폭력배와 범죄조직을 전면에 세웠다면 ‘Double Indemnity’의 범죄자는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 회사원이다. 주택가와 사무실, 식료품점, 자동차 안처럼 일상적인 공간이 욕망과 돈이 끼어드는 순간 범죄의 장소로 변한다.

영화화 과정에서는 검열 문제가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원작은 1930년대 중반부터 영화화 가능성이 거론됐지만 살인과 불륜, 보험사기 과정이 구체적으로 등장하면서 당시 제작규정과 충돌했다. 파라마운트가 다시 영화화를 추진한 뒤에도 범죄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가 각색의 중요한 조건으로 남았다.

빌리 와일더는 원작자인 케인과 함께 각본을 쓰려 했지만 케인이 다른 스튜디오와 계약돼 있어 작업이 성사되지 않았다. 대신 ‘The Big Sleep’, ‘Farewell, My Lovely’의 작가 레이먼드 챈들러(Raymond Chandler)가 참여했다. 케인의 범죄 구조 위에 챈들러 특유의 빠른 대사와 와일더의 영화적 구성이 더해졌다.

월터와 필리스의 첫 대면부터 대사는 보험 설명과 성적 긴장을 동시에 품는다. 자동차 속도와 교통법규를 이야기하는 듯한 문장은 서로의 관심을 떠보는 말로 바뀐다. 직접적인 감정 표현보다 우회적인 대화가 두 사람의 관계를 밀어간다.

당시 제작규정 아래에서는 간통과 성적 관계를 노골적으로 묘사하기 어려웠다. ‘Double Indemnity’는 제한된 표현을 대사와 편집, 인물의 자세와 공간 변화로 대신했다. 월터의 아파트를 찾은 필리스와 관계가 깊어진 사실도 모든 행동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 말과 행동 사이의 빈칸을 관객이 읽도록 만드는 방식이 이어진다.

바버라 스탠윅이 연기한 필리스는 이후 필름 누아르의 팜파탈(femme fatale)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 됐다. 남편의 보험을 먼저 꺼내고 월터의 욕망과 전문지식을 이용해 살인으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월터를 필리스에게 휘둘린 피해자로만 놓으면 영화의 구조는 단순해진다.

[영화 인사이트⑤] ‘Double Indemnity’, 욕망과 보험범죄가 만든 필름 누아르의 문법. 사진=Jay's Classic Movie
[영화 인사이트⑤] ‘Double Indemnity’, 욕망과 보험범죄가 만든 필름 누아르의 문법. 사진=Jay's Classic Movie

월터는 필리스가 살인을 명확히 요구하기 전부터 의도를 알아챈다. 집을 나선 뒤 다시 돌아가고, 보험에 관한 지식을 동원해 계획을 구체적으로 설계한다.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월터에게 있다. 필리스의 욕망과 월터의 자만이 만나면서 범죄가 실행된다.

프레드 맥머리의 캐스팅은 이런 설정을 더 낯설게 만들었다. 당시 맥머리는 로맨틱 코미디와 비교적 가벼운 작품에서 친근한 남성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었다. 살인에 가담하는 월터 네프는 기존 이미지와 거리가 컸다.

월터에게 처음부터 범죄자의 외형을 부여하지 않은 선택은 영화와 맞아떨어졌다. 보험을 팔고 상사와 농담을 나누며 혼자 아파트에서 생활하는 평범한 직장인이 욕망과 자신감을 따라 살인 안으로 들어간다. 범죄는 특별한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시작된다.

에드워드 G. 로빈슨(Edward G. Robinson)이 맡은 바턴 키스는 월터와 반대편에 서 있다. 보험사기를 찾아내는 조사 책임자로, 통계와 경험을 통해 거짓말을 잡아낸다. 월터는 키스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키스가 지키는 보험제도를 이용해 살인을 감추려 한다.

[영화 인사이트⑤] ‘Double Indemnity’, 욕망과 보험범죄가 만든 필름 누아르의 문법. 사진=Jay's Classic Movie
[영화 인사이트⑤] ‘Double Indemnity’, 욕망과 보험범죄가 만든 필름 누아르의 문법. 사진=Jay's Classic Movie

월터와 필리스의 관계가 욕망과 범죄로 이어진다면 월터와 키스 사이에는 오랜 업무 관계와 신뢰가 놓여 있다. 영화가 후반으로 갈수록 필리스와 월터의 결속은 무너지고 키스와 월터의 관계가 전면으로 올라온다. 살인과 보험사기 뒤에는 자신을 믿었던 동료를 배신한 문제가 남는다.

촬영감독 존 F. 사이츠(John F. Seitz)는 로스앤젤레스를 밝은 도시로 담지 않았다. 낮의 실내에도 블라인드를 통과한 빛이 줄무늬 그림자를 만들고, 얼굴과 벽을 여러 갈래로 나눈다. 밤거리에서는 인물의 일부만 빛을 받고 나머지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필리스의 집은 넓지만 개방적인 느낌보다 무거운 그림자가 먼저 들어온다. 월터의 아파트와 보험회사 사무실, 늦은 시간의 식료품점과 자동차 내부에서도 문틀과 난간, 블라인드가 인물을 잘게 나눈다. 밝은 캘리포니아의 이미지 대신 도시의 일상 공간을 불안과 욕망이 스며든 장소로 바꿨다.

살인을 보여주는 방식도 같은 방향을 택한다.

필리스의 남편이 자동차 안에서 살해되는 동안 카메라는 공격 장면을 자세히 따라가지 않는다. 월터가 옆자리에서 남편을 죽이는 순간 카메라는 필리스의 얼굴에 머문다. 바로 곁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표정과 몸의 긴장으로 전달된다.

직접 보이지 않는 살인을 관객이 완성하도록 만든다.

영화 초반부터 월터의 파국을 알고 있다는 사실도 긴장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총상을 입은 월터가 고백을 시작하는 순간 범죄가 실패했다는 사실은 이미 드러난다. 이후의 긴장은 살인이 성공하느냐가 아니라 완벽하다고 믿었던 계획이 어느 부분에서 어긋나기 시작하는지를 따라간다.

[영화 인사이트⑤] ‘Double Indemnity’, 욕망과 보험범죄가 만든 필름 누아르의 문법. 사진=Jay's Classic Movie
[영화 인사이트⑤] ‘Double Indemnity’, 욕망과 보험범죄가 만든 필름 누아르의 문법. 사진=Jay's Classic Movie

월터가 자신감을 보일수록 예정된 실패와의 거리는 좁아진다.

미클로시 로자(Miklós Rózsa)의 음악도 처음부터 불안을 끌고 들어온다. 부드러운 로맨스를 강조하기보다 낮은 금관과 강한 리듬이 월터의 고백 이전부터 파국을 예고한다. 이후 필름 누아르와 심리 스릴러에서 익숙해진 어둡고 불안한 음악적 분위기와 연결되는 부분이다.

촬영이 진행된 뒤에도 제작규정과의 충돌은 끝나지 않았다. 처음 촬영한 결말에는 체포된 월터가 가스실에서 처형되는 내용이 있었다. 실제 촬영까지 마쳤지만 최종 개봉본에서는 빠졌다.

처형 장면이 사라지면서 마지막에는 월터와 키스가 남았다.

상처를 입은 월터가 보험회사 사무실에서 고백을 끝내고 빠져나가려 할 때 키스가 나타난다. 살인범과 보험조사관이라는 관계보다 오랜 시간 함께 일했던 두 사람의 관계가 마지막에 놓인다. 범죄에 대한 법적 처벌보다 자신을 믿었던 사람과 마주하는 순간이 더 오래 남는 결말이 됐다.

[영화 인사이트⑤] ‘Double Indemnity’, 욕망과 보험범죄가 만든 필름 누아르의 문법. 사진=Jay's Classic Movie
[영화 인사이트⑤] ‘Double Indemnity’, 욕망과 보험범죄가 만든 필름 누아르의 문법. 사진=Jay's Classic Movie

‘Double Indemnity’가 제작된 1944년에는 ‘필름 누아르’라는 장르명이 할리우드에서 통용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영화가 프랑스에 다시 소개되면서 프랑스 비평가들이 전쟁 전 작품과 달라진 어둡고 냉소적인 미국 범죄영화들을 묶어 ‘필름 누아르(film noir)’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Double Indemnity’에는 훗날 필름 누아르를 설명할 때 반복해서 등장하는 요소들이 이미 밀집해 있었다. 남성 주인공의 고백형 내레이션, 과거로 되돌아가는 플래시백, 낮은 조명과 블라인드 그림자, 도시의 밤, 도덕적으로 흔들리는 주인공, 돈과 욕망으로 연결된 범죄, 팜파탈이 한 작품 안에 겹쳤다.

모든 기법을 ‘Double Indemnity’가 처음 만든 것은 아니다. 중요한 변화는 흩어져 있던 요소들을 하나의 이야기와 시각체계 안에 밀도 높게 결합했다는 데 있다.

1945년 열린 제1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작품상과 감독상, 바버라 스탠윅의 여우주연상, 존 사이츠의 흑백 촬영상, 빌리 와일더와 레이먼드 챈들러의 각본상, 미클로시 로자의 음악상, 음향상 등 7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수상작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영화 인사이트⑤] ‘Double Indemnity’, 욕망과 보험범죄가 만든 필름 누아르의 문법. 사진=Jay's Classic Movie
[영화 인사이트⑤] ‘Double Indemnity’, 욕망과 보험범죄가 만든 필름 누아르의 문법. 사진=Jay's Classic Movie

제임스 M. 케인의 작품은 이후에도 1940년대 미국영화의 어두운 흐름과 연결됐다. ‘Mildred Pierce’가 1945년, ‘The Postman Always Rings Twice’가 1946년 영화화됐다. 평범한 미국인의 삶과 돈, 욕망, 범죄를 결합한 케인의 이야기가 연이어 스크린으로 옮겨진 시기였다.

‘Double Indemnity’는 1992년 미국 의회도서관 국가영화등기부(National Film Registry) 보존작으로 선정됐다.

1944년 영화에는 사건을 해결하고 질서를 회복하는 탐정이 중심에 서지 않는다. 관객은 범죄자의 자동차에 함께 올라타고 월터의 목소리를 따라 이미 실패한 살인의 시간을 거슬러 간다. 보험회사와 주택가, 식료품점과 출근길처럼 익숙한 공간도 돈과 욕망이 개입하는 순간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낮에도 벽을 가르는 블라인드의 그림자와 밤거리를 달리는 자동차, 파국을 먼저 밝히고 시작하는 고백은 이후 수많은 범죄영화에서 되풀이됐다. ‘필름 누아르’라는 이름이 붙기 전인 1944년, ‘Double Indemnity’는 훗날 누아르를 설명하게 될 인물과 공간, 빛과 서사의 상당 부분을 이미 한 편의 영화 안에 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