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8억 배상은 국민 세금, 연금은 손해 입고도 침묵… 공적 자산의 책임 경영은 어디에 있었나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당시, 국민연금은 양사의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사진=2024.06.11 국민연금공단.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당시, 국민연금은 양사의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사진=2024.06.11 국민연금공단.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박준식기자]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당시, 국민연금은 양사의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 결정은 결과적으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경영권 승계에 유리하게 작용했고, 국민연금의 투자수익에는 손실로 이어졌다. 그로부터 9년. 2024년 9월, 국민연금은 뒤늦게 삼성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이미 국제사회에서는 대한민국 정부에 손해배상 책임을 묻는 ISDS 판결이 두 차례나 내려진 상태였다. 국민연금의 침묵과 지연은 단순한 ‘행정적 판단 미비’로 설명되기 어려운 문제다.
이는 공적 자산의 책무성과 의사결정 투명성이 부재한 구조, 그리고 정치적 영향력의 그늘을 그대로 드러낸다.

9년간 침묵한 연기금… 손해는 ‘시민 몫’이었지만 책임자는 없었다

2015년 당시 국민연금은 삼성물산의 주주였고, 합병 비율이 삼성물산 주주에게 불리하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분석에서 제기된 바 있다. 그럼에도 연금은 내부 자문기구의 의견을 무시하고, 합병에 찬성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 홍완선, 당시 복지부 장관 문형표는 직권남용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즉, 연금의 결정은 ‘범죄 행위에 기반한 공적 의결권 행사’였다는 점이 법적으로 확정됐다. 그럼에도 국민연금은 수년간 삼성에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았다. 그 사이 삼성은 합병을 통해 지배구조를 안정시켰고, 국민연금은 평가손실을 입었다.

이 손실은 단순한 투자 실패가 아니라, 불법 개입에 따른 결과라는 점에서 ‘구상 가능한 손해’였다. 그럼에도 국민연금은 2024년 9월에 이르러서야 민사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늦어도 너무 늦은 대응이다.

‘기금 독립성’은 어디로 갔는가… 정치와 경영의 경계 실종

국민연금의 지연 대응은 단순한 업무소홀로 볼 수 없다. 이는 기금운용이 독립적이지 못했고, 정치·재계 권력의 압박에 조직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2015년에는 청와대와 보건복지부가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에 개입했다. 사건 이후, 연금 내부의 감시·책임 구조는 사실상 정비되지 않았다. 감사원이나 국회도 연금의 손해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즉, ‘국민의 노후를 책임진다’는 연금 기금이 자신이 입은 손해에조차 침묵하는 비정상적 구조가 고착된 셈이다. 더욱이 2023년과 2024년 형사 1·2심 법원에서 삼성 합병이 ‘불법이 아니다’라는 판단이 나오면서, 국민연금 내부에서는 "소송을 제기해도 승산이 없다"는 판단이 우세했다는 전언도 있다. 하지만 대법원은 여전히 국정농단 관련자들의 유죄를 확정하고 있다. 법적 근거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공적 자산에 대한 책임 경영, 지금도 유예되는가

지금도 국민연금은 1,000조 원이 넘는 자산을 운용 중이다. 이 연금의 주인은 명백히 시민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그 연금의 운영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비투명한 방식으로 결정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공적 자산의 운용은 기술이 아니라 철학의 문제다. 정치로부터의 독립성, 외부 압력에 대한 저항력, 그리고 무엇보다 투자 손실에 대한 즉각적 대응 능력이 갖춰지지 않으면, 또 다른 ‘삼성 합병 사태’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늦은 소송’은 반성이 아닌 회피의 산물일 수 있다

국민연금이 9년 만에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은 반가운 조치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왜 지금이냐’는 질문이 따라붙는다.

▶왜 손해를 입은 직후가 아니라, 거의 10년 가까이 지난 시점인가.

▶왜 책임자들의 형사 유죄 확정 이후에도 아무런 민사조치가 없었는가.

▶왜 정부는 이 배상 판결에 대해 별도 대응 없이 국민 세금으로 감당하고 있는가.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그리고 공적 자산의 손실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 조직은, 공공기관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 국민연금은 이제라도 ‘제 역할’을 해야 하며, 더는 침묵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