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정책의 한계와 실물경제의 비효율이 만들어낸 정체의 시대
[KtN 최기형기자] 2025년 현재, 글로벌 경제는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으로 성장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답이 갈린다. 주요 선진국은 아직 마이너스 성장을 벗어났고, 개도국은 기술 수입과 인프라 투자로 회복세를 보이지만, 시장은 더 이상 과거처럼 활기를 띠지 않는다. 그 핵심에는 ‘유동성 없는 성장(Liquidity-less Growth)’이라는 구조적 변화가 놓여 있다.
탈(脫)유동성 시대: 돈은 있는데, 풀리지 않는다
팬데믹 이후 세계는 사상 최대 규모의 통화 공급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 자금은 실물경제가 아니라 자산시장에만 흘렀고, 공급망 교란과 맞물리며 ‘수요가 아닌 비용 중심의 인플레이션’만을 증폭시켰다. 그 결과는 명확하다. 실질 성장 없이, 물가만 올린 정책 효과의 한계였다.
2024년 후반부터 주요국은 긴축 완화를 시도하고 있으나, 정책금리를 낮춘다고 해서 자금이 자동으로 실물에 유입되는 구조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민간 부문은 이미 과잉부채에 노출돼 있고, 기업은 불확실한 수요 전망 속에서 신규 투자에 소극적이다. 자금이 존재하지만, 실질적인 ‘신용 창출’이 이루어지지 않는 역설적 상황이다.
‘성장률-시장 수익률’ 괴리: 자산만 오르는 왜곡된 회복
시장에서는 여전히 기술주, 일부 고정자산, 에너지 관련 종목에 대한 관심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 기반은 실물의 회복이 아닌, 기대심리와 포지션 이동에 의존하고 있다. 이는 과거 신자유주의적 성장 모델—자산 가격 상승이 소비와 투자를 자극하는 순환 구조—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특히 최근의 미국 증시는 GDP 성장률이 1% 내외에 머무는 동안에도 주요 지수는 고점을 경신했고, 투자자금은 실제 수익성보다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자산으로만 몰리는 ‘서사 기반 자본시장’의 왜곡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실질 생산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자산가격 상승의 한계, 즉 ‘금융화된 성장(Financialized Growth)’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낸다.
비생산적 자본 집중: 기술, 인프라, 고용의 비대칭
문제는 자금이 머무는 지점에도 있다. AI, 반도체, 클라우드, 그린 에너지 등 일부 고도 기술 산업에는 천문학적 자금이 유입되고 있지만, 그 파급효과는 한정적이다. 일자리는 줄고, 소비자 후방 효과도 제한적이며, 성장 잠재력을 대중적 체감으로 전환시키지 못하는 분절적 자본주의가 고착화되고 있다.
반면, 공공 인프라, 기초 기술, 사회안전망과 같은 분야는 여전히 ‘재정 적자’의 논리 아래 방치되고 있다. 국가가 자금을 풀지 못하고, 민간은 리스크를 감당하지 못하며, 자본은 소수 산업에 집중되는 구조는 장기적으로 사회적 불균형과 정치 리스크까지 자극하는 내재적 불안 요소로 작용한다.
자본 없는 자본주의: 생산과 투자 사이의 단절
전통적으로 자본주의는 생산과 축적, 재투자라는 선순환을 기반으로 작동해왔다. 그러나 현재는 그 연결고리가 약화되고 있다. 자산의 수익률은 실물 투자보다 금융 상품에서 더 높고, 노동은 기술에 의해 대체되며, 기업은 성장보다 자사주 매입과 배당 확대를 통한 ‘주주 가치 회수’에 집중한다.
이러한 흐름은 결국 ‘자본은 축적되지만 생산성은 향상되지 않는 시스템’, 즉 자본 없는 자본주의(Post-Capital Capitalism)로의 전이를 가속화하고 있다. 이는 자본의 존재가 아니라, 자본의 활동성(active capital)이 경제를 움직였던 과거와의 단절을 뜻한다.
유동성 없는 성장 시대,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요구하다
단순한 금리 조정이나 재정 확대는 성장의 해답이 아니다. 실질적 파급력을 가지는 ‘질적 자본 분배’와 ‘신뢰 기반의 정책 설계’가 요구된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매크로 지표보다 산업별·자산별 ‘비대칭 회복’을 감안한 분산 전략이 필요하다.
기업의 이익이 사회 전체로 확산되지 않는다면, 결국 시장은 ‘성장 피로’에 직면할 것이다.
이제 경제는 자본의 양이 아니라, 자본이 머무는 방식과 순환 구조의 설계로 평가받게 된다.
‘유동성 없는 성장’은 단순한 경기 사이클이 아닌, 경제 구조 그 자체의 변동성을 의미한다. 이 시대를 맞이한 투자자와 정책 결정자는 이제 ‘언제 회복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구조를 회복할 것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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