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심사의 회피: 예비비 논리와 ‘정치적 비상구’
[KtN 박준식기자] 재난은 국가의 통치력을 시험하는 시험대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위기 앞에서 기민하게 대응하기보다는, 재난을 정치화하고 예산을 전유하며, 국회의 견제를 우회하는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 산불이라는 명백한 국가 재난은 추경이라는 이름으로 소환되었고, 국회의 심사는 ‘불필요한 지체’로 취급됐다. 재정은 통치의 도구가 되었고, 의회주의는 우회당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비상상황’을 통해 ‘비정상 재정’을 정당화하는 권력 구조 안에 있다.
산불, 추경, 그리고 '통치의 결핍'
경남 산청을 비롯한 영남권 일대의 대형 산불은 75명의 사상자와 2,100여 명의 이재민을 남겼다. 국토 면적의 상당 부분이 소실됐으며, 재난 대응 역량의 한계를 다시 한번 드러냈다. 그러나 정부는 이러한 상황을 계기로 10조 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을 전격 발표하면서 “국회 심사 생략”이라는 발언을 함께 내놓았다.
이는 단순한 절차상의 단축이 아니라, 국가 재정 운용의 권한을 입법부가 아닌 행정부가 장악하겠다는 위험한 신호다. 즉, 위기를 명분으로 의회를 우회하고, 재정을 통치 수단으로 활용하는 구조가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회 심사의 회피: 예비비 논리와 ‘정치적 비상구’
이재명 대표는 “이미 편성된 예비비만으로도 3조 5,600억 원의 긴급 대응이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산림청, 행정안전부, 기획재정부 등 관련 부처에는 각각 산불 대응 예비비가 존재하며, 이 중 상당 부분은 국회 동의 없이 즉시 집행이 가능한 항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추경을 추진하고, 국회 심사 생략을 언급한 것은 긴급 재정 집행이 목적이 아니라 정치적 의도, 즉 권력 행사의 재정적 수단화에 더 가깝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는 민주주의의 핵심 기능인 견제와 감시의 원리를 훼손하는 행위이며, 위기를 정치화한 대표적 사례로 기록될 수 있다.
재정 독점의 정치적 효과: 국민은 도구, 예산은 무기
재난을 대처하지 못한 정치권이 재난을 빌미로 재정을 장악하려는 순간, 국민의 고통은 정치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피해를 입은 주민은 구호와 회복의 주체가 아닌, 정치적 정당성 확보를 위한 대상화된 존재가 되고, 예산은 국민 지원이 아니라 정쟁용 정치 무기로 변질된다.
더 나아가 이 구조는 야당에 대한 책임 전가, 국회 무력화, 행정부 단독 운용이라는 전략적 효과를 낳는다. 재난 이후 ‘속도’를 강조하며 입법권을 무시하는 발언은 그 자체로 권력의 비상 통치화 경향을 보여주는 징후다.
통치권의 실종과 ‘의회주의의 백색 실종’
통치는 문제 해결의 과정이자 국민 설득의 구조다. 그러나 지금의 행정부는 위기 해결을 위한 대안보다는, 권한을 우회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에 더 치중하고 있다. 예비비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추경을 고집하고, 국회 심의를 ‘절차적 장애물’로 간주하는 태도는 의회민주주의를 형식으로만 유지하는 전형적 사례다.
이와 같은 ‘백색 실종’ 상태에서 통치란 결국 정치적 수사를 위한 이벤트성 대응으로 전락하게 된다. 정책의 정당성은 사라지고, 국민은 정보에서 배제되며, 통치는 현실을 다루지 않고 정치적 상징 조작에 몰두하는 통치부재 상태로 이어진다.
‘재정민주주의’가 붕괴되는 순간
재정은 단순한 예산 집행이 아니다. 그것은 국민의 동의와 통제를 전제로 한 통치의 사회적 합의 구조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은 이 구조가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다. 비상사태를 명분으로 재정을 통제하고, 정치적 반대파를 ‘국민의 고통을 방치한 세력’으로 규정하는 선전적 구도는, 정치가 재정으로 국민을 조작하는 시스템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국민은 돈이 아니라, 존중을 요구하고 있다. 예산이 아니라, 시스템을 요구하고 있다. 재정 권력을 통치 수단이 아니라 공적 책무로 되돌리는 일, 그것이 지금 이 위기 앞에 놓인 정치의 유일한 책임이다.
후원=NH농협 302-1678-6497-21 위대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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