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에서 권력의 무대로

부산국제영화제(BIFF).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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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N 신명준기자]부산국제영화제(BIFF)는 지난 30년 동안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문화 브랜드 가운데 하나로 성장했다. 1996년 시작 당시만 해도 아시아 영화의 가능성을 모으는 실험적 축제에 불과했지만, 곧 한국 민주화 이후 첫 대규모 국제문화행사로 자리 잡았다. 관객 친화적 운영, 젊은 감독 발굴, 아시아 영화 연대라는 특징은 BIFF가 다른 유럽 중심 영화제와 차별화되는 지점이었다.

그러나 30년 동안 유지되어온 비경쟁 원칙은 영화제의 정체성이자 한계로 작동했다. 작품을 서열화하지 않고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명분은 분명 긍정적인 의미를 가졌지만, 동시에 국제적 권위와 영향력을 확보하지 못하게 만드는 구조적 약점이 되었다. 그 결과 BIFF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영화제”라는 평가를 얻으면서도, 세계적 권위라는 지점에서는 늘 부족하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웠다.

30주년을 맞은 BIFF는 드디어 오랜 논쟁 끝에 공식 경쟁부문을 신설했다. 이는 단순히 프로그램의 변화가 아니라 영화제 철학 자체의 수정에 해당한다. 비경쟁의 자유를 넘어 경쟁의 권위를 수용하는 전환은 BIFF가 스스로 어떤 정체성을 가질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 선택을 의미한다.

부산국제영화제(BIFF). 사진=부산국제영화제,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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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경쟁 철학의 명암

BIFF의 비경쟁 구조는 출범 당시에는 혁신적인 실험이었다. 유럽 영화제가 권위적 심사와 배타적 운영으로 비판받던 시기에, BIFF는 자유롭고 개방적인 무대를 표방했다. 신인 감독의 첫 작품부터 사회적 논쟁작까지 다양한 영화가 서열 없이 초청될 수 있었고, 이는 곧 아시아 영화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힘이 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이 실험은 구조적 한계를 드러냈다. 세계 언론은 여전히 칸, 베니스, 베를린 같은 유럽 영화제를 중심으로 서사를 구축했고, BIFF는 작품의 국제적 권위를 보증하지 못하는 영화제로 인식됐다. 상의 부재는 곧 산업적 영향력의 부족으로 이어졌다. 아시아 영화인들이 모여 교류할 수 있는 장은 마련되었지만, 영화제가 영화인의 경력을 전환시키는 권위 있는 관문으로 작동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BIFF는 관객 친화적 축제라는 평가를 얻는 대신, 국제적 위상은 제한적이었다. 한국영화가 세계적으로 약진하던 시기에도, BIFF는 이를 제도적으로 끌어올릴 장치를 마련하지 못했다.

경쟁부문 신설의 배경

올해 신설된 ‘부산 어워드(Busan Awards)’는 이러한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다. 아시아 신작 14편이 경쟁 후보로 선정되었고, 다섯 개 부문에서 상이 수여된다. 심사위원단은 국제적 명성을 가진 영화인들로 구성되며, 수상작에는 배급·투자와 연계될 가능성이 열린다.

이는 BIFF가 30년 만에 스스로의 정체성을 재정의하려는 행위다. 아시아 영화의 허브라는 상징성을 이제 제도적 권위와 결합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전환이 실제로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경쟁부문이 도입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칸의 황금종려상이나 베니스의 황금사자상과 같은 권위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는 단기간에 축적되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경쟁의 도입이 BIFF의 기존 강점과 충돌할 가능성이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초청 구조가 서열화되는 순간, 영화제 내부에서 새로운 위계가 만들어진다. 프로그래머의 권한은 강화되지만, 초청작 사이의 격차는 심화된다. 이는 BIFF가 자랑해온 ‘다양성과 평등성’의 가치와 모순된다.

부산국제영화제(BIFF).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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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로 드러나는 구조적 변화

올해 BIFF는 총 328편의 작품을 상영한다. 이 가운데 공식 초청작은 241편으로 지난해보다 17편 늘었다. 그러나 실제 관심은 경쟁부문 후보작과 일부 스타 감독 작품에 집중될 가능성이 크다. 역대 최대 규모인 33편을 모은 아이콘 섹션 역시 사실상 비공식 경쟁처럼 작동한다.

이런 상황은 영화제 내부에서 이중 경쟁 구조를 만든다. 공식 경쟁은 부산 어워드이고, 실질적 주목도는 아이콘 섹션에 집중된다. 그 결과 수백 편의 영화는 여전히 관심의 변두리에 머무르게 된다. 다양성을 내세우지만, 결국 관심은 특정 섹션에 쏠리는 구조적 모순이 드러난다.

유럽 모델의 모방과 독자성의 위기

BIFF는 오랫동안 유럽 영화제와 차별화된 정체성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이번 경쟁부문 신설은 BIFF가 결국 유럽 모델을 따라가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칸은 스타 시스템, 베니스는 거장의 귀환, 베를린은 정치적 담론을 통해 권위를 확보했다. BIFF는 관객 친화성과 아시아 네트워크라는 차별성을 가졌지만, 그것만으로는 세계적 위상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불안이 늘 존재했다.

부산 어워드의 도입은 결국 이러한 불안의 산물이다. 하지만 경쟁을 도입하면서도 독자적 색깔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는 여전히 과제로 남는다. 단순한 모방으로는 독자적 위상을 구축하기 어렵다. BIFF가 스스로의 길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경쟁부문은 또 하나의 제스처로 끝날 수 있다.

부산국제영화제(BIFF).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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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변화와 영화제의 대응

OTT 플랫폼이 주도하는 시대, 영화제의 존재 이유는 점점 더 불분명해지고 있다. 많은 작품이 온라인 공개를 전제로 제작되는 상황에서, 영화제를 통해 세계에 첫선을 보이는 방식은 점차 힘을 잃고 있다. BIFF는 경쟁을 통해 권위를 확보하고, 포럼을 통해 산업적 담론을 선도하려 하지만, 이는 영화제를 다시 권력의 무대로 만들 위험이 있다.

영화제가 산업적 권위를 강조하는 순간, 관객 친화적 축제라는 본래의 매력이 약화될 수 있다. BIFF가 경쟁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국제적 권위지만, 잃을 수 있는 것은 개방성과 다양성이다.

권위와 자유 사이의 모순

부산국제영화제가 경쟁부문을 신설한 것은 30년 만에 내려진 중대한 결정이다. 이는 아시아 영화의 허브로서 BIFF가 더 이상 비경쟁의 자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경쟁이 영화제를 반드시 더 나은 무대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경쟁은 권위를 부여하는 동시에 새로운 위계와 배제를 낳는다.

앞으로의 BIFF는 두 가지 상반된 과제를 동시에 떠안게 됐다. 경쟁을 도입하면서도 기존의 관객 친화성과 아시아 영화 연대라는 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유럽 중심 영화제와 차별화된 독자적 모델을 제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30회를 기점으로 BIFF는 더 이상 과거의 선택에 머물 수 없다. 경쟁이라는 도구가 정체성을 강화할지, 아니면 혼란을 심화시킬지는 영화제 운영과 산업적 지원 구조에 달려 있다. BIFF의 다음 30년은 바로 이 모순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