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0억 달러 대미 투자와 통상·노무 리스크
[KtN 박준식기자]한국 자동차 산업은 지난해 미국에 347억 4천만 달러 규모를 수출했다. 전체 수출의 절반이 미국 시장에서 나온다. 트럼프 행정부가 부과한 25% 관세는 이 흐름에 직격탄을 날렸고, 완성차 업체들은 이익의 상당 부분을 잠식당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7월 말 미국과의 협상에서 관세율을 15%로 낮추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일단 숨통이 트였다는 평가가 나왔다. 그러나 같은 시점 발표된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약속은 새로운 논란을 불러왔다. 단기적 호재와 장기적 부담이 동시에 걸려 있는 셈이다.
관세 인하: 즉각적인 효과와 상징성
관세율 10%포인트 인하는 단순한 세율 조정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한국 자동차의 대미 수출 경쟁력이 곧장 회복된다는 점에서 시장 반응은 긍정적이다. 업계에서는 연간 약 35억 달러 수준의 절감 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추산한다. 더 중요한 지점은 상징성이다. 무역전쟁으로 불렸던 2020년대 초 통상 분쟁 이후, 한국이 다시 미국 시장에서 ‘신뢰할 수 있는 공급자’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기대가 커졌다.
워싱턴과의 합의는 정치적 성과이기도 하다. 계엄령과 탄핵으로 출범한 정권이 국제 통상 현안에서 성과를 내면서, 혼란의 이미지를 일정 부분 희석할 수 있었다.
투자 약속: 호재인가, 덫인가
문제는 그 대가다. 한국 정부와 기업이 약속한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에는 현대차 전기차 공장, 삼성과 SK의 반도체·배터리 설비 확충, 그리고 스타트업 투자 기금 조성이 포함돼 있다. 한국 GDP의 약 15%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기업계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반응과 “과도한 부담”이라는 우려가 엇갈린다. 투자 규모가 워낙 커서 향후 5~10년간 국내 산업·재정 구조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 현지 법·제도 환경이 불안정하다는 점이 리스크로 꼽힌다. 이민 단속, 친환경 규제, 노동조합 협상 등 예상치 못한 비용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노무 리스크: 조지아 공장의 충격
실제 사례는 이미 발생했다. 지난 7월, 미국 조지아주 현대차-LG 배터리 합작 공장에서 대규모 이민 단속이 벌어졌다. 500명 이상이 불법 체류 의혹으로 체포됐고, 공정 라인은 일시적으로 중단됐다. 이 사건은 관세 인하로 얻은 혜택이 현지 법적·노무 변수에 의해 순식간에 무력화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기업들은 단순히 투자만으로는 안정성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현지 노동시장 구조, 이민정책, 정치 변화가 투자 효과를 갉아먹을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됐다.
산업 구조와 사회적 파급
관세 협상은 한국 자동차 산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파급력은 더 넓다. 3,500억 달러 투자 계획에는 배터리, 반도체, AI 스타트업까지 포함돼 있어 ‘통상 패키지’ 성격을 띤다. 통상 정책과 산업 전략이 한 묶음으로 연결되면서, 특정 산업의 문제가 국가 전체의 리스크로 번질 가능성이 커졌다.
재계에서는 “투자가 해외로 빠져나가면 국내 일자리 창출 효과가 줄어든다”는 우려가 나온다. 반면 정부는 “대미 투자가 관세 협상뿐 아니라 글로벌 공급망에서 한국의 입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투자와 협상이 국내 정치에서 쟁점화될 수 있는 배경이다.
국제정치적 의미
관세 인하는 단순히 통상 성과가 아니라 외교적 신호다. 미국이 한국을 전략적 동맹으로 인정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된다. 동시에 거액의 투자는 한미 관계의 불균형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도 따른다. 한국이 얻는 혜택은 ‘단기적 관세 인하’, 미국이 얻는 이익은 ‘장기적 산업 투자’라는 구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중국과 일본, 유럽의 시선도 복잡하다. 중국은 한국의 대미 투자 확대를 경계할 수밖에 없고, 일본은 한미 협상 구도가 자국 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하고 있다. 글로벌 무역 질서 속에서 한국이 선택한 ‘미국 중심 전략’은 향후 외교·통상 전반에 중대한 파급을 불러올 수 있다.
양날의 검
관세 협상은 숨통을 틔운 동시에 거대한 부담을 남겼다. 자동차 산업은 단기적 수혜를 입지만, 3,500억 달러 투자 약속은 향후 한국 경제와 산업 구조를 압박할 가능성이 크다.
정치적으로는 리더십의 안정성을 보여주는 성과지만, 경제적으로는 ‘호재와 덫’이 교차하는 결과물이다. 통상과 투자가 불가분의 관계로 엮인 지금, 한국의 수출 엔진이 과연 재가동될 수 있을지는 투자 리스크 관리 능력에 달려 있다. 대통령이 말한 ‘리부트 코리아’가 지속 가능한 성장으로 이어지려면, 협상 이후의 관리가 협상 자체만큼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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