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비에 루스테잉이 증명한 패션의 경제학, 창의가 이익으로 전환되는 구조의 완성
창의가 산업이 되는 순간, 패션의 언어는 예술에서 경제로 이동한다
[KtN 임우경기자]패션은 늘 시대의 변화를 가장 먼저 감지하는 산업으로 평가받는다. 사회적 감수성이 바뀌면 옷의 실루엣이 변하고, 미학의 방향이 달라지면 소비의 기준도 재편된다. 그러나 럭셔리 산업이 예술을 넘어 하나의 거대한 비즈니스 생태계로 진화한 오늘, 패션의 리더십은 더 이상 미적 감각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창의가 자본의 구조 안에서 작동하고, 감성이 수익의 언어로 번역되는 시대에 리더십은 경영과 창의의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개념으로 정의되고 있다.
패션 경제에서 이러한 전환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인물은 발망의 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올리비에 루스테잉이다. 루스테잉은 2011년 24세의 나이로 발망을 이끌기 시작했다. 당시 발망은 전통적인 프랑스 오뜨 꾸뛰르 하우스로서의 명성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시장 확장성과 글로벌 인지도 면에서는 한계에 부딪혀 있었다. 루스테잉은 하우스를 단순한 럭셔리 브랜드가 아닌 ‘디지털 시대의 문화 기업’으로 전환시키는 전략을 택했다.
루스테잉은 럭셔리의 언어를 SNS의 언어로 바꾸었다. 인스타그램, 트위터, 유튜브, 틱톡 등 디지털 플랫폼을 중심으로 발망의 존재감을 구축했고, 기존 런웨이 중심의 홍보 구조를 해체했다. 온라인 이미지, 실시간 스트리밍, 셀러브리티 중심 콘텐츠가 브랜드의 핵심 자산으로 기능했다. 이러한 전환은 단순한 홍보 전략이 아니라, 럭셔리 산업의 비즈니스 모델을 바꾼 결정적 사건이었다.
루스테잉은 ‘발망 아미(Balmain Army)’라는 독자적 커뮤니티를 구축했다. 비욘세, 리하나, 킴 카다시안, 제니퍼 로페즈 같은 글로벌 셀러브리티가 발망의 옷을 입고 등장할 때마다 브랜드는 즉각적인 디지털 파급력을 얻었다. 팬덤 기반의 바이럴 구조는 광고비를 대체했고, 소비자는 단순히 제품을 구매하는 존재가 아니라 브랜드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팬덤이 소비의 형태로 작동하면서 발망은 럭셔리 하우스 중에서도 유례없는 온라인 충성도를 형성했다.
루스테잉의 전략은 결과적으로 발망의 재무 구조를 바꿨다. 2011년 3천만 유로 수준이던 연매출은 2024년 3억 유로를 넘어섰다. 매출의 10배 성장은 단순한 디자인의 성공이 아니라 시스템의 혁신이었다. 전통적인 컬렉션 중심 수익 구조에 협업, 라이선스, 디지털 자산이 결합됐다. 브랜드는 제품 판매뿐 아니라 이미지와 콘텐츠로도 수익을 창출했다. 루스테잉은 패션 하우스를 미디어 기업의 수익 모델로 변환시켰다.
2015년 진행된 H&M 협업은 이러한 구조의 정점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럭셔리 브랜드가 매스마켓과 협업하는 전례는 드물었다. 그러나 발망은 고급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전략을 택했다. 협업 컬렉션은 출시와 동시에 전 세계 매장에서 완판됐다. 제품의 직접 수익보다 브랜드 인지도 상승 효과가 훨씬 컸다. 하루 만에 글로벌 검색량이 폭증했고, SNS에서 발망은 24시간 동안 가장 많이 언급된 브랜드가 됐다.
협업의 성공은 럭셔리 산업 전체의 인식을 바꾸었다. 루스테잉은 럭셔리가 더 이상 폐쇄적인 상징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발망은 화려한 이미지 속에 참여 가능한 문화를 만들어냈다. 소비자는 ‘관람자’가 아닌 ‘참여자’로 이동했고, 브랜드의 가치 사슬은 생산에서 소통으로 확장됐다. 루스테잉은 패션의 민주화를 비즈니스의 언어로 번역했다.
발망의 경제 구조는 디지털 기반의 효율성을 극대화했다. 전통적 런웨이 광고 예산은 디지털 콘텐츠 제작비로 대체됐고, SNS 노출이 직접 매출로 연결됐다. 런웨이 공개 직후 온라인 스토어에서 동일 제품을 바로 구매할 수 있는 ‘즉시 판매 모델’이 도입됐다. 생산–홍보–판매의 간격이 단축되면서 회전율이 높아졌다. 고정비 비율이 감소하고, 디지털 콘텐츠가 자산으로 인식되면서 영업이익률은 20%대를 유지했다. 발망은 예술이자 산업, 브랜드이자 플랫폼으로 진화했다.
루스테잉의 미학적 정체성은 분명했다. 강렬한 어깨선, 금장 단추, 시퀀 장식, 조각적 실루엣은 모두 발망의 상징이 됐다. 화려한 글램 미학은 자기 표현을 중시하는 세대의 욕망을 반영했다. 발망의 옷은 자신감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지속된 반복은 한계를 드러냈다. 유사한 디자인 코드가 이어지면서 컬렉션의 새로움이 약화됐고, 브랜드는 변주보다 반복으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강렬함이 정체성의 뿌리이자 피로의 원인이 된 셈이었다.
셀러브리티 중심 마케팅도 비슷한 문제를 낳았다. 유명인의 영향력은 단기적으로 폭발적인 홍보 효과를 가져왔지만, 럭셔리의 본질인 희소성과 절제된 품격은 상대적으로 약화됐다. 브랜드가 과도한 노출에 의존하면, 고급 소비층은 브랜드의 상징적 무게를 의심하게 된다. 발망은 대중성과 엘리트성이 충돌하는 경계 위에서 성장과 정체성을 동시에 경험했다.
루스테잉 체제의 성취는 분명하다. 발망은 디지털 시대 럭셔리의 표준이 됐다. 그러나 성공의 그림자는 시스템 리스크를 드러냈다. 브랜드의 정체성이 특정 인물의 감각에 결합되면, 디자이너 교체는 곧 브랜드의 정체성 위기로 이어진다. 루스테잉은 발망의 상징이었고, 동시에 브랜드의 구조적 의존 대상이었다. 이 구조는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다.
루스테잉 퇴임 이후 발망은 체질 전환에 착수했다. CEO 마테오 스가르보사는 “다음 시대의 발망은 개인의 비전보다 조직의 창의력에서 시작된다”고 밝혔다. 새로운 경영 체계는 스타 디자이너 중심 구조를 해체하고, 내부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를 중심으로 창의 시스템을 분산시키는 방향으로 재편되고 있다. 협업형 창의 구조가 패션 하우스의 표준 모델로 부상하고 있다.
패션 산업 전체가 유사한 전환을 경험하고 있다. 루이비통, 구찌, 보테가 베네타, 지방시 등 글로벌 하우스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교체 주기를 단축하고 있다. 브랜드의 정체성을 ‘디자이너의 서명’이 아닌 ‘조직의 언어’로 관리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디지털 전환, ESG 경영, AI 디자인, 고객 데이터 분석이 패션 경영의 핵심으로 자리 잡으면서, 패션 기업은 점점 기술기업의 구조를 닮아가고 있다.
루스테잉의 사례는 패션 리더십의 개념을 바꿨다. 전통적 리더는 새로운 트렌드를 제시하는 인물이었다. 이제 리더는 창의가 수익으로 전환되는 구조를 설계하는 인물로 평가된다. 루스테잉은 감각을 시스템으로, 미학을 자본으로 바꾸는 방식을 보여줬다. 창의와 경제가 결합된 모델이 발망의 14년을 이끌었다.
패션 경제의 리더십은 두 가지 원리 위에 서 있다. 하나는 창의성의 확장, 다른 하나는 수익 구조의 지속성이다. 루스테잉은 두 원리를 모두 구현했다. 예술적 표현이 브랜드의 정체성을 강화했고, 시스템적 구조가 지속 가능한 이익을 만들어냈다. 패션이 산업으로 기능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완벽하게 결합된 셈이다.
루스테잉이 구축한 발망의 경제 구조는 패션을 넘어 다른 산업에서도 참고 모델로 평가된다. 브랜드가 콘텐츠를 만들고, 팬덤이 이를 소비하며, 데이터가 새로운 가치를 생성하는 순환 구조는 ‘패션 미디어 이코노미’라는 개념으로 정의된다. 이 구조는 문화산업, 엔터테인먼트, IT 플랫폼에서도 유효하다. 창의가 자본과 연결되는 방식이 바뀌면서, 산업 전체의 가치사슬이 재편되고 있다.
발망의 다음 단계는 루스테잉이 남긴 시스템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운영하느냐에 달려 있다. 브랜드는 이미 글로벌 인지도, 충성 고객층, 디지털 네트워크라는 세 가지 자산을 확보했다. 향후 과제는 이 자산을 지속 가능한 수익으로 전환하는 일이다. 크리에이티브 조직의 효율적 운영, 협업 프로젝트의 다양화, 지속 가능성 중심 소재 개발, ESG 경영 강화가 핵심 전략으로 제시되고 있다.
패션 경제의 본질은 예술과 산업의 교차점에 존재한다. 창의가 사라지면 브랜드는 매력을 잃고, 수익이 사라지면 창의는 지속되지 않는다. 루스테잉은 두 세계의 균형을 유지한 인물이었다. 발망의 14년은 미학과 수익, 감성과 구조가 하나의 생태계로 작동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패션이 예술을 넘어 산업의 언어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창의가 자본을 설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루스테잉이 남긴 발망의 모델은 단순한 성공 사례가 아니다. 하나의 리더십 교과서다. 개인의 감각이 기업의 구조로 확장될 때, 창의는 지속 가능한 자산이 된다. 패션 경제의 리더는 유행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창의의 구조를 설계하는 사람이다. 예술의 감각으로 산업을 설계한 루스테잉의 시대는 끝났지만, 그가 구축한 시스템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패션의 미래는 한 사람의 영감이 아니라, 구조의 지속성 속에서 완성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