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예술이라 칭하는 럭셔리 시계의 멸종
[KtN 임우경기자]시계 산업이 오랜 시간 동안 지켜온 언어는 정밀함이었다. 오차를 줄이는 기술, 움직임을 안정시키는 구조, 부품의 조립과 마감에서 드러나는 완벽함이 신뢰의 근거였다. 그러나 정밀함의 한계에 도달한 지금, 시계는 더 이상 시간을 정확히 재는 도구가 아니다. 바쉐론 콘스탄틴이 270주년을 맞아 발표한 ‘라 케트(La Quête)’ 시리즈는 이 변화의 상징이다. 시간의 측정이 아니라 시간의 해석, 기술의 경쟁이 아니라 서사의 경쟁으로 이동한 산업의 단면을 선명히 보여준다.
라 케트 시리즈는 천문학, 신화, 전쟁, 영웅 서사를 한 무대에 올렸다. 각각의 시계가 하나의 세계를 구성한다. ‘셀레스티아’는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를 품고, ‘에픽 워리어스’는 알렉산더 대왕과 사사키 모리츠나 같은 전사들의 초상을 새겼다. ‘문 더스트’는 다이아몬드 200여 개로 달의 광채를 시각화했고, ‘미스 오브 더 플레이아데스’는 별자리의 움직임을 기계로 옮겼다. 이 모든 구조는 시간의 기록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인간의 사유를 장식의 형태로 고정했다. 시계가 표현하는 것은 순간의 흐름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인간의 방식이다.
시계 산업은 기술적 진보의 경주를 오래전 끝냈다. 초당 오차 몇 초 단위의 경쟁은 더 이상 브랜드를 구분하지 못한다. 정확성의 끝에서 남은 것은 의미의 설계다. 브랜드는 기능 대신 이야기로 차별화한다. 신화와 천문학, 역사와 예술을 불러내어 시계의 외형 안에 세계관을 구축한다. 라 케트 시리즈는 이 전략의 극단이다. 하나의 모델을 제작하기 위해 수백 시간의 수공과 수년의 연구가 투입되고, 단 한 점만 생산된다. 기술의 정점에서 브랜드는 노동의 시간을 미학의 언어로 전환하고, 예술의 가치를 권력의 언어로 변환한다.
바쉐론 콘스탄틴의 시계는 세계의 질서를 인간의 손목으로 옮기는 시도처럼 보인다. 천체의 궤도, 별의 운동, 신화의 영웅이 하나의 기계 장치 안에서 움직인다. 그러나 천문학적 정밀함이 드러내는 것은 우주에 대한 경외가 아니라, 통제의 욕망이다. 인간이 하늘의 질서를 계산 가능한 구조로 환원하면서, 우주는 더 이상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소유의 대상으로 변한다. 시계는 자연을 흉내 내는 기계이지만, 그 기계는 결국 인간의 지위를 상징한다.
라 케트 시리즈에 투입된 시간은 숫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450시간에 달하는 인그레이빙, 1,000개가 넘는 부품 조립, 수백 시간의 에나멜 소성 과정. 이 모든 노동은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계급의 신호로 작동한다. 장인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세밀한 조각은 노동의 미학으로 포장되지만, 현실적으로는 초소수의 수집가를 위한 권위의 기호로 귀결된다. 예술이 권력을 정당화하는 구조가 산업의 핵심이 된 셈이다.
오늘날의 초고가 시계는 기술보다 이야기로 움직인다. 기능이 아니라 상징이 가격을 결정한다. 브랜드는 수공의 시간을 ‘유일성’으로 포장하고, 희소성을 절대 가치로 전환한다. 장인의 손이 거친 부품 하나하나가 브랜드의 역사와 결합되며, 시간의 기계는 역사적 서사로 완성된다. 그러나 그 과정은 민주적이지 않다. 예술과 권력이 결합한 형태의 사치품은 본질적으로 닫힌 구조를 가진다. 몇 명의 구매자만이 접근할 수 있는 시장에서 시간의 미학은 경제적 위계의 언어로 바뀐다.
라 케트 시리즈는 예술적 완성도와 기술적 완벽함을 동시에 구현했지만, 바로 그 완벽함이 문제의 중심이다. 기술의 완성은 더 이상 발전을 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완성된 구조는 반복만 낳고, 반복은 권태를 만든다. 브랜드는 그 권태를 덮기 위해 서사를 확장한다. 신화와 철학, 천문학과 과학을 끌어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지만, 그 의미는 결국 자본의 장식으로 귀결된다. 예술이 아니라 소유의 언어, 창조가 아니라 축적의 형식이다.
시계는 한때 기술의 진보를 상징했다. 인류가 시간을 정밀하게 다루기 시작했을 때, 시계는 과학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이 모든 기능을 압도한 오늘, 기계식 시계는 실용의 도구가 아니라 상징의 장치로 남았다. 라 케트 시리즈는 이 시대의 정직한 초상이다. 기술이 사라진 자리에 의미가 들어섰고, 의미가 상품이 되었다. 인간이 시간을 잃은 자리에 브랜드가 신화를 세웠다.
바쉐론 콘스탄틴이 선택한 방향은 예술의 형태를 한 자본의 진화다. 고도의 수공예는 장인의 노동을 예술의 언어로 번역하지만, 동시에 그 노동을 희소성의 수단으로 활용한다. 기술의 언어가 미학으로, 미학의 언어가 권력으로 변환된다. 시계는 더 이상 시간을 말하지 않는다. 브랜드의 철학, 구매자의 지위, 사회의 위계를 보여주는 언어로만 작동한다.
이 변화는 시계 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산업 자본주의의 모든 영역에서 비슷한 구조가 반복된다. 자동차가 이동 수단에서 정체성의 상징으로 변했고, 건축이 주거 공간에서 사회적 신분의 증명으로 바뀌었다. 시계는 이 흐름의 선두에 섰다. 기술이 완성된 이후 남은 것은 이야기뿐이고, 이야기가 팔릴 때 예술은 상품으로 전락한다. 바쉐론 콘스탄틴의 라 케트는 그 전환을 예술적으로 포장한 산업의 선언문이다.
그러나 모든 신화는 언젠가 믿음을 잃는다. 과잉된 상징 구조, 과도한 장식, 극단적인 희소성은 스스로의 존재 근거를 잠식한다. 예술의 이름으로 포장된 권위는 시간이 지나면 공허로 드러난다. 시계가 시간의 철학을 잃는 순간, 남는 것은 가격표뿐이다. 기술의 시대가 끝나고 의미의 시대가 찾아왔지만, 그 의미는 진정한 사유가 아니라 자본의 수사였다.
우리 시대의 시계는 정지하지 않는다. 여전히 움직인다. 그러나 그 움직임은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상징의 회전이다. 바쉐론 콘스탄틴이 남긴 라 케트 시리즈는 기술의 정점에서 예술의 언어를 호출했고, 예술의 언어를 통해 권력의 구조를 재확인했다. 초정밀 기계의 내부에서 인간은 여전히 신화를 필요로 했다. 그 신화가 기술을 정당화하고, 기술이 권력을 미화했다.
이제 럭셔리 시계는 사라지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극단의 수공예가 남긴 유산은 장인 정신이 아니라, 자본이 예술을 소유한 구조다. 시계는 더 이상 시대의 상징이 아니라, 사라져가는 권위의 화석이다. 아름다움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아름다움이 말하는 것은 시간의 철학이 아니라 권력의 잔향이다.
기술이 완성된 자리에 의미가 들어섰고, 의미가 소유의 언어로 바뀌는 과정에서 예술은 멸종을 준비하고 있다. 시계 산업은 여전히 찬란하지만, 그 찬란함은 석양의 빛과 같다. 바쉐론 콘스탄틴의 라 케트는 그 석양 속에서 마지막으로 반짝인 불빛이다. 시간은 흘러가지만, 시계의 신화는 이제 멈춰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