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성장의 두 얼굴 중산층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린다
[KtN 박준식기자]AI를 향한 세계적 투자는 거대한 파도로 밀려오고 있다. 데이터센터와 고성능 칩 확보전이 이어지고 자본시장은 미래 전망에 들떠 있다. 그러나 실물경제에서는 소비 둔화와 고용 불안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거대한 자본지출이 경제 전반을 끌어올릴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소비 기반은 약해지고 있다. 이 대조적 흐름이 AI 슈퍼사이클의 역설을 형성한다. 기술의 성장은 가속화되지만 경제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모순이 구조적으로 드러난다.
AI 인프라 투자 규모는 이전 기술혁명과 비교해도 이례적이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에서는 모델 성능 경쟁과 시장 선점 압박 속에서 기업들이 앞다퉈 GPU와 데이터센터를 구축하고 있다. 투자 규모는 이미 조 단위로 치솟았고 정부까지 참여하며 전력 인프라 확충에 나서고 있다. 미래 수익을 전제로 지금 지출이 한꺼번에 던져지는 이 흐름은 냉전 시대 군비 경쟁에 가까운 구조다. 경쟁에서 뒤처지는 순간 시장을 잃는다는 압박이 자본을 강제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 대규모 투자가 고용과 소비를 촉진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데이터센터는 건설 과정에서는 수백 명 규모의 일용직과 시공 인력이 필요하지만 운영 단계에 접어들면 자동화 비중이 매우 높아 상시 고용은 극히 적다. 반면 AI 도입은 사무직과 서비스직 같은 중간 숙련도가 높은 중산층 일자리를 직접적으로 대체한다. 이러한 흐름은 비용 절감을 목표로 하는 대기업일수록 강하게 나타난다. 글로벌 주요 기업들은 AI 자동화 전환 과정에서 인력을 빠르게 줄이고 있으며 직종별 타격은 특정 계층에 집중된다.
중산층 소비는 미국 경제의 핵심 동력이다. 국내총생산의 약 70퍼센트를 차지하는 민간소비의 중심은 중산층 가구다. 이 계층의 지갑이 닫히기 시작하면 전체 경제에 연쇄적 영향을 준다. 매출이 줄고 기업 실적이 둔화되며 주가가 흔들린다. 소비 위축이 장기화되면 고용 축소가 반복되고 다시 소비가 줄어드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실물경제와 자산시장이 괴리되는 현상은 바로 이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낸다.
AI 투자 확대는 인프라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다. 데이터센터 부지 확보 경쟁이 심화되면서 지역별 토지 가격이 뛰고 전력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미국 남부와 동남아 일부 국가에서는 전력망 확충 속도가 AI 인프라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공급 제약이 실물 위험으로 떠오르고 있다. 전력요금과 냉각 비용이 상승해 운영비 부담이 커지면 단일 프로젝트의 수익성이 흔들릴 가능성도 크다. 인프라 투자 자체가 지출을 통해 단기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지만 장기적으로 내수의 체력이 떨어질 경우 이 성장률은 쉽게 지속되지 못한다.
소비 관련 지표에서는 이미 위험 신호가 나타나고 있다. 미국 중저가 외식 브랜드의 방문 빈도가 떨어지고 객단가가 낮아지고 있다. 할인 메뉴 선호가 늘고 현금 흐름이 좋지 않은 가구가 지출을 줄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가장 먼저 실물경제의 체온을 보여주는 영역에서 포착된다. 반면 고가 식당과 럭셔리 매장은 일시적으로 안정적인 매출을 유지하는데 이는 상위 계층의 소비가 버텨주는 상황일 뿐 중산층 기반이 약화되면 결국 고급 소비에서도 조정이 나타나는 구조가 반복됐다. 과거 금융위기와 닷컴버블 붕괴 시기에도 같은 패턴이 관찰됐다.
AI 자동화가 일자리를 바꾸는 방식은 기술 발전의 속도보다 노동 이동의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더 큰 불균형을 만든다. 새로운 일자리들은 고숙련 전문직이거나 고도의 인간 감정 이해를 요구하는 직무라 진입장벽이 높다. 기존 일자리에서 밀려난 근로자들이 단기간에 이 영역으로 이동하기 어렵다. 그 결과 노동시장의 양극화가 심해지고 중간 계층이 두터움을 잃는다. 중산층이 얇아지는 경제는 소비 기반이 약해지고 사회적 갈등이 확대되며 장기적으로 성장의 내구성이 떨어진다.
AI 슈퍼사이클이 지속되려면 투자가 소비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필요하다. AI가 생산성을 높이고 비용을 절감한 만큼 그 혜택이 임금이나 가격 인하 혹은 세제 정책을 통해 다시 중산층 가계로 환류돼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투자가 주로 기업과 상위 계층의 자산가치 상승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강했다. AI 모델 개발과 데이터센터 구축 경쟁은 거대 기업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어 자연스럽게 독점 구조가 강화된다. AI 관련 칩과 인프라 기술을 보유한 소수 기업들이 시장 전체의 흐름을 좌우하는 상황에서 창출되는 생산성 이익이 경제 전반에 고르게 분배되기 어렵다.
정책적 개입 없이 민간 자본만으로 이 불균형을 해결하기는 어렵다. 인력 전환을 위한 교육과 재훈련이 필요하고, 사회 안전망이 강화돼야 노동 이동의 충격이 완화된다. 중소기업이 AI를 활용해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산업 전체의 경쟁력이 고르게 성장할 수 있다. 독점적 플랫폼이 생산성 이익을 흡수하는 구조를 조정해 기술 혁신의 혜택이 더 넓은 계층에 확산되도록 유도하는 것도 중요하다. 정책이 분배의 경로를 설계하지 않으면 기술 발전이 곧바로 사회적 충돌로 이어질 수 있다.
AI 슈퍼사이클의 성패는 기술 자체에 달려 있지 않다. AI 모델이 얼마나 뛰어나고 데이터센터가 얼마나 늘어나느냐가 궁극적 지속성을 결정하지 않는다. 핵심은 소비다. 중산층의 소비가 살아 있어야 투자가 의미를 갖는다. AI가 경제의 새로운 축이 되려면 기술의 발전만큼 분배와 연결의 구조도 새롭게 설계돼야 한다. 지금 나타나는 역설은 단기적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의 신호다. 성장의 속도를 높이기보다 성장의 기반을 단단히 다지는 것이 우선이라는 사실이 더욱 선명해지고 있다.
AI 슈퍼사이클의 중심에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의 지갑이 있다. 소비의 기반이 살아 있지 않으면 어떤 혁신도 지속될 수 없다. 경제의 체력이 회복되고 중산층이 다시 안정적인 소득을 확보할 때 비로소 AI 투자와 실물경제의 간극이 좁혀질 것이다. AI 시대의 경제는 결국 소비·고용·분배라는 고전적 요소와 기술 혁신이 어떻게 균형을 이루느냐에 달려 있다.
후원=NH농협 302-1678-6497-21 위대한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