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임우경기자]제네바 시계 그랑프리 GPHG는 스위스 시계 산업의 권위를 대표하는 시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매년 시상식이 열리고, 세계 각국 브랜드가 후보에 오르고, 누군가는 트로피를 손에 넣는다. 소비자는 이를 통해 시계 산업의 미래를 엿본다. 그러나 이 무대가 정말로 산업 전체를 위한 공정한 평가의 장인지, 혹은 내부 권력 구조를 공고히 만드는 축제인지, 근본적 질문이 필요하다. 트로피가 주는 상징은 언제나 좋게 포장되지만, 그 표면 아래에 숨은 정치성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시계를 평가한다는 행위는 단순한 기능 비교가 아니다. 브랜드가 축적한 역사와 자본, 전문가 네트워크, 시장 영향력까지 모두 동원되는 경쟁이다. 그리고 그 경쟁의 방향이 산업의 문화를 결정한다.

2025년 수상작을 살펴보면 세 가지 흐름이 나타난다. 전통 회귀, 기술 과속, 접근성 확장. 그러나 이 세 가지가 모두 질문을 남긴다. 전통의 수호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기술 경쟁은 무엇을 향한 질주인가. 접근성 확대가 정말 소비자를 위한 변화인가.

황금 바늘상을 받은 브레게 Classique Souscription 2025는 역사에 기대는 전략의 대표적 사례다. 창립 250주년을 기념했다는 설명이 붙는다. 역사적 유산을 강조하면 권위는 자동으로 따라온다. 하지만 이 강조는 시장에서 특정 계층을 위한 배타적 접근성을 의미한다. 브레게의 자산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수상 자체가 역사적 정당성을 스스로 강화하는 방식이면, 그것은 과거의 힘을 이용한 독점에 가깝다. 시계 산업은 전통을 지키는 문화 산업이지만, 전통이 곧 높은 가격과 낮은 접근성으로 정의되는 순간 산업의 미래는 좁아진다.

기술 혁신 부문은 또 다른 문제를 드러낸다. Bvlgari Octo Finissimo Ultra Tourbillon의 얇기는 놀라운 기술 성취다. 하지만 극한 박형 기술의 대중적 필요는 제한적이다. 제품은 점점 더 실생활과 멀어진다. 시계가 산업적 경쟁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위한 쇼케이스가 되면, 기술은 실용이 아닌 과시로 소비된다. 소비자는 과시를 위해 비용을 지불하는가. 그 선택은 일부 컬렉터에게는 의미 있지만, 산업 전체에는 부담이 된다. 고가 모델이 많아질수록, 시장의 기반은 좁아진다.

접근성 확대를 압축한 사례로 MB&F M.A.D.2 Green이 있다. 기존 MB&F 핵심 라인업보다 낮은 가격으로 시장 저변을 넓히려 한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환영할 변화다. 기계식 시계라는 문화에 입장할 관문이 생긴다. 그러나 접근성을 확장하는 방식이 브랜드 최상위 가치와 충돌할 우려가 있다. 고유한 기술과 예술성으로 평가받아온 MB&F가 가격 하향 모델을 통해 브랜드 피라미드를 흔든다면 장기적 브랜드 전략이 흔들린다. 확장과 정체성 사이 균형은 아직 확실하게 정립되지 않았다.

산업 지형 변화라는 관점에서 가장 큰 논쟁을 불러온 사례는 Fam Al Hut Möbius의 Audacity Prize 수상이다. 중국 독립 제작자가 GPHG 공식 무대에서 인정받은 전례는 권위 체계의 지각 변동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국제적 신뢰 기반이 충분히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 수상이 전략적 제스처에 불과하다는 의심도 존재한다. 정치적 의미가 개입된 평가라면, 상의 권위는 손상될 수 있다. 상은 기술적 성취를 기준으로 부여되어야 하고, 국가적 균형 맞추기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산업의 공정성은 누구보다 GPHG 스스로 지켜야 할 가치다.

Chopard Alpine Eagle 41 SL Cadence 8HF의 고진동 시도는 기술적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안정성 검증이 충분하지 않은 기술을 실전 스포츠 워치에 탑재한 결정은 질문을 남긴다. 실험적 기술을 포상하는 시상 구조는 혁신을 자극할 수 있으나, 상업적 검증 이전 단계에서의 수상은 소비자 리스크를 키울 수 있다.

결국 수상작 대부분은 세 가지 속성을 공유한다. 높은 가격, 희소한 접근성, 착용 경험보다 상징 가치 중심 평가. 그렇다면 질문은 더욱 명확해진다. 상을 받는 시계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수집가의 과시 수단인가. 내부 전문 평가진의 자부심인가. 산업 전체를 위한 진정한 표준인가.

시계 산업은 스마트워치와 같은 전자기기와 직접 경쟁할 수 없다. 기능적 효율성에서는 이미 패배했다. 그럼에도 기계식 시계가 시장에 존재하는 이유는 미학적 경험, 문화적 자산, 역사적 의미다. 그러나 이 문화 자산이 시장과 분리되면 산업 전체의 생존이 위험해진다.

시상식은 산업의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시상 구조가 일부 고가 시장의 가치를 강화하는 데 치우쳐 있다면, GPHG는 산업의 공익적 존재가 아니라 염가로 포장된 권위 구조가 된다. 권위라는 이름이 소비자에게 실제 가치를 제공하지 못한다면, 권위는 빠르게 퇴색한다.

손목 위에서 작동하지 않는 시계는 기술의 박제다. 상이라는 장식만 남긴 채 시장과 멀어진다면, 산업의 미래는 좁아진다. 산업은 열린 무대를 요구한다. 접근 가능한 소비자 기반, 설득 가능한 기술, 반복 가능한 서비스 체계. 이 세 가지를 충족하는 시계가 늘어야 시장이 확장된다.

GPHG는 스스로 권위를 검증해야 한다. 수상 기준, 평가 과정, 산업 반영도. 이 세가지가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권위는 숨길수록 약해지고, 드러낼수록 단단해진다. 상을 받는 시계들이 진짜로 가치 있는 미래를 열고 있는지, 혹은 소수 상류층만을 위한 상징물이 되고 있는지, GPHG와 시계 산업 전체는 이 질문을 회피할 수 없다.

독점적 파티에서 벗어나 산업의 공익으로 이동하는 순간, GPHG는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권위는 단단해야 하지만, 단단함은 닫힘이 아니라 열림에서 나온다. 지금 필요한 것은 축하가 아니라 성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