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 어린이날 맞아 세종실·충무실 개방…하루의 환대 넘어 ‘365일 놀 권리’가 과제
[KtN 박준식기자]2026년 5월 5일, 평소 국무회의와 주요 행사가 열리던 청와대 세종실과 충무실이 어린이들에게 열렸다. 녹지원에는 회전그네와 회전비행기, 에어바운스가 들어섰고, 컵케이크 만들기와 키링 만들기 같은 체험 프로그램도 마련됐다. 청와대는 이날 하루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공원이 됐다.
이재명 대통령과 김혜경 여사는 어린이와 보호자 200여 명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오후에는 서울 광진구 서울어린이대공원을 찾아 약 2시간 동안 시민들과 인사를 나눴다. 어린이날의 정치 일정은 청와대 안팎에서 이어졌다.
청와대라는 권력의 공간이 어린이에게 열린 장면은 단순한 기념행사를 넘어선다. 어린이를 통치의 대상이나 미래 노동력으로만 보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독립된 시민으로 존중해야 한다는 요구와 맞닿아 있다. 1923년 첫 어린이날 기념행사에서 방정환과 색동회가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하여 주시오”라고 당부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작은 존재가 아니라, 다른 속도로 자라는 한 사람이라는 선언이었다.
이날 청와대 행사에서도 어린이는 행사의 배경이 아니라 질문하는 주체로 등장했다. 이 대통령은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라며 대통령은 국민이 나라를 위해 일할 사람을 선택해 맡기는 자리라고 설명했다. “대통령은 어떤 일을 하나요”라는 질문에는 국민 모두가 더 잘 살 방법을 고민하고, 세금을 어떻게 쓸지 결정하는 사람이라고 답했다. 정치의 언어를 어린이의 눈높이로 낮춘 장면이었다.
정치문화 관점에서 주목할 대목은 ‘대통령이 어린이를 만났다’는 사실보다 ‘어린이가 권력의 공간에서 묻고 답했다’는 점이다. 한국 정치에서 어린이는 오랫동안 보호해야 할 약자, 미래 세대, 저출생 담론 속 숫자로 자주 호출됐다. 그러나 진정한 어린이 정책은 어린이를 미래의 인적 자원으로만 다루지 않는다. 어린이가 지금 누려야 할 시간, 공간, 관계, 질문의 권리를 보장하는 데서 출발한다.
AI 시대의 교육 논의도 여기에서 다시 시작된다. 최근 SXSW EDU 2026에서는 브루스 리드 커먼센스미디어 AI 책임자와 예일대 로리 산토스 교수가 기술 변화와 청소년 정신건강 문제를 논의했다. 이들이 주목한 단어는 ‘마찰’이었다. AI와 디지털 기술은 아이들의 생활을 더 쉽고 빠르게 만든다. 숙제는 챗봇이 도와주고, 지루한 시간은 숏폼 영상이 채운다. 속상한 일은 사람보다 먼저 AI에게 털어놓을 수도 있다.
편리함은 분명한 이익이다. 그러나 모든 불편함이 사라진 환경에서 아이들은 기다림, 지루함, 협상, 실패를 통과할 기회를 잃는다. 감정을 조절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힘은 대개 즉각적인 해답이 없는 시간 속에서 자란다. 아이에게 필요한 마찰은 고통이 아니다. 스스로 부딪히고, 다시 시도하고, 작은 성취를 쌓아가는 발달의 조건이다.
한국 어린이들이 처한 현실은 더 복잡하다. 입시 경쟁과 학원 이동, 성적 압박은 이미 과도한 마찰이다. 반대로 자유롭게 노는 시간, 디지털 기기 없이 머무는 시간, 또래와 규칙을 만들고 갈등을 조정하는 시간은 부족하다. 아이들은 힘들지만 충분히 놀지 못하고, 바쁘지만 스스로 선택할 시간은 적다.
통계도 이런 압박을 보여준다. 2025년 초중고 사교육비 총액은 약 27조5000억 원, 사교육 참여율은 75.7%였다. 참여 학생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60만4000원으로 전년보다 늘었다. OECD 자료 역시 한국 학생들이 학교 밖 추가 학습에 많은 시간을 쓰는 현실을 지적한다. 아동권리보장원의 2025년 조사에서도 아동들은 놀 권리 보장을 위해 가장 필요한 요소로 ‘놀 시간 제공’을 꼽았다.
디지털 환경의 위험 신호도 뚜렷하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2025년 스마트폰 과의존 실태조사에서 전체 위험군 비율은 22.7%였지만, 청소년 위험군은 43.0%로 집계됐다. 숏폼 콘텐츠 확산과 생성형 AI 서비스의 일상화는 아이들의 여가와 관계, 학습 방식까지 바꾸고 있다.
정부와 정책 결정자의 과제는 가정에 “스마트폰을 덜 쓰라”고 권고하는 수준에 머물 수 없다. 아이의 화면 사용 시간은 부모의 생활습관 문제이기도 하지만, 알고리즘 설계와 입시 구조, 돌봄 공백, 도시 공간의 빈곤이 함께 얽힌 문제다. 학교 수업 설계, 방과 후 돌봄, 지역 놀이터와 도서관, 청소년 상담, 플랫폼 규제, AI 리터러시 교육이 하나의 체계 안에서 다뤄져야 한다.
AI가 즉각적인 답을 내놓는 시대일수록 교육은 정답을 빨리 찾는 능력보다 질문을 세우는 힘을 길러야 한다. 실패한 뒤 다시 시도하는 회복탄력성, 타인의 감정과 부딪히며 관계를 조정하는 능력, 몸으로 경험하고 손으로 만드는 감각이 더 중요해진다. 창의력은 무제한의 정보 자극에서 나오지 않는다. 스스로 선택한 놀이, 충분한 빈 시간, 쉽게 해결되지 않는 문제와 마주하는 과정에서 자란다.
어린이를 위한 정치는 하루의 선물보다 생활시간의 보장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평일 오후 아이들이 머무는 공간의 질, 부모 소득과 관계없이 접근할 수 있는 놀이 환경, 디지털 플랫폼으로부터 아동을 보호하는 장치가 함께 마련돼야 한다. 어린이를 ‘존엄과 인격을 지닌 한 사람’으로 존중하겠다는 말이 정책적 실효성을 얻으려면, 아이를 미래의 수단이 아니라 오늘의 시민으로 대하는 행정이 뒤따라야 한다.
2026년 어린이날 청와대는 하루 동안 놀이와 질문의 공간이 됐다. 남은 과제는 그 장면을 학교와 동네의 일상으로 옮기는 일이다. 교육은 어린이에게 건강한 마찰을 되찾아주는 과정이고, 정치는 그 마찰을 안전하게 감당할 시간과 공간을 공적으로 보장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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