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형 AI, 상품기획·수요예측·마케팅·반품 관리로 들어간 패션기업의 새 운영 방식
[KtN 임우경기자]팔리지 않은 옷은 창고에 들어가는 순간 비용이 된다. 원단값과 봉제비, 운송비를 들여 만든 상품이 시즌을 놓치면 정상가 판매 기간은 짧아지고, 할인율은 높아지고, 반품과 보관비는 늘어난다. 2026년 패션기업이 AI를 보는 시선도 여기서 출발한다. 화려한 AI 룩북이나 가상 모델보다 더 급한 변화는 어느 상품을 얼마나 만들고, 어느 지역에 보내고, 어느 시점에 할인할지를 정하는 계산법에서 먼저 일어나고 있다.
글로벌 패션기업의 AI 도입은 이미 일상 업무로 들어왔다. 맥킨지의 ‘The State of Fashion 2026’은 생성형 AI가 온라인 고객서비스, 이미지 제작, 카피라이팅, 소비자 검색, 상품 발견 같은 분야에서 쓰이고 있으며, 패션 경영진의 35% 이상이 일부 기능에서 생성형 AI를 활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2025년 패션 경영진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75%가 수요예측, 재고 최적화, 비용 통제를 위한 AI를 우선순위로 꼽았다.
패션산업에서 AI는 디자인실의 보조 도구로만 머물지 않는다. 생성형 AI는 디자인 옵션을 빠르게 늘리고, 마케팅 캠페인의 이미지와 문안을 지역별·고객별로 바꾸며, 수요예측과 생산계획을 더 촘촘하게 만드는 기술로 확장되고 있다. 맥킨지 대담에서도 AI의 활용 범위는 창작, 마케팅, 수요예측, 계획, 재고, 반품, 물류 효율화까지 이어진다.
패션기업이 수요예측에 매달리는 이유는 산업 구조에 있다. 의류는 SKU가 많고, 색상과 사이즈가 쪼개지며, 시즌이 지나면 상품 가치가 급격히 떨어진다. 같은 재킷이라도 블랙과 베이지의 판매 속도가 다르고, 서울과 뉴욕의 기온 차이, 인플루언서 착용 여부, 온라인 광고 반응, 주말 날씨, 환율과 소비심리까지 판매량에 영향을 준다. 과거 판매량만 보고 다음 시즌 물량을 정하는 방식으로는 오차를 줄이기 어렵다.
AI 수요예측은 판매 데이터 하나만 보지 않는다. 지역별 매출, 검색량, 장바구니 이탈, 리뷰, 반품 사유, 날씨, 행사 일정, SNS 반응, 광고 클릭, 유사 상품의 과거 판매 속도를 함께 읽는다. 예측이 맞으면 품절을 줄이고, 틀린 상품의 생산량을 줄이며, 할인 시점을 더 늦출 수 있다. 패션기업 입장에서는 매출을 늘리는 기술이기 전에 재고 손실을 줄이는 기술이다.
유럽 온라인 패션 플랫폼 잘란도는 AI가 실적 전망에 직접 연결되는 사례로 거론된다. 잘란도는 2026년 조정 영업이익이 2025년보다 12∼25%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고, 가상 착장과 자동 광고 제작 등 AI 활용이 생산성과 반품 감소에 기여했다고 설명했다. 콘텐츠 생산량은 추가 비용 없이 70% 늘었다는 설명도 함께 제시됐다.
AI가 마케팅을 바꾸는 속도도 빠르다. 패션 캠페인은 과거처럼 하나의 큰 이미지를 만들어 전 세계에 뿌리는 방식에서 벗어나고 있다. 같은 원피스라도 중국 소비자에게는 다른 이미지와 문안이 필요하고, 미국 서부 소비자에게는 다른 색감과 상황이 필요하다. 남부 이탈리아의 휴양지 소비자와 서울의 출근길 소비자가 같은 상품을 보는 방식도 다르다. 생성형 AI는 이 차이를 빠르게 나눠 여러 버전의 광고와 상품 설명을 만들 수 있다.
다만 이미지와 문안을 많이 만든다고 브랜드가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AI가 과거 데이터를 학습해 안전한 평균값을 반복하면 브랜드의 개성은 옅어질 수 있다. 맥킨지 대담에서도 AI가 선택지를 늘리는 도구가 될 수 있지만, 브랜드 가치와 맞지 않게 쓰면 차별성이 약해질 위험이 언급됐다. 명품과 디자이너 브랜드일수록 AI가 만든 초안을 사람이 어떻게 걸러내고 브랜드 언어로 바꾸는지가 중요해진다.
디자인 과정에서도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AI는 무드보드, 컬러 조합, 패턴 변형, 제품 이미지, 가상 착장, 샘플 시각화를 빠르게 만든다. 물리적 샘플을 여러 번 만들던 과정을 일부 디지털로 바꾸면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원단을 자르고, 봉제하고, 수정하고, 다시 촬영하는 과정이 줄면 시제품 폐기와 물류 부담도 낮아진다. AI가 디자이너의 감각을 대체한다기보다, 디자이너가 검토할 수 있는 선택지를 더 짧은 시간에 늘리는 방식이다.
공급망에서는 AI의 효용이 더 직접적이다. 어떤 상품을 어느 공장에서 만들지, 원단을 언제 발주할지, 어느 항로로 보낼지, 지역별 물량을 어떻게 나눌지에 따라 비용이 크게 달라진다. 관세와 전쟁, 물류 지연이 겹친 2026년에는 공급망의 작은 오차도 재고와 할인으로 돌아온다. AI는 판매예측과 생산계획, 물류 배분을 함께 조정하는 방향으로 쓰일 수 있다.
반품 관리는 패션기업의 또 다른 비용 영역이다. 온라인에서 옷을 산 소비자는 사이즈, 색상, 착용감, 소재감이 기대와 다르면 쉽게 반품한다. 반품된 상품은 검수, 재포장, 재입고, 재판매 또는 폐기 과정을 거친다. AI 기반 사이즈 추천, 가상 착장, 상품 설명 개선, 리뷰 분석은 반품률을 낮추는 데 쓰인다. 반품을 줄이는 일은 물류비 절감이면서 동시에 과잉 생산과 폐기 부담을 줄이는 일이다.
AI 도입이 곧바로 기업 체질 개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맥킨지 대담은 AI 파일럿과 실험은 많지만, 투자수익을 내는 기업 단위 도입은 제한적이라고 지적했다. AI 성공은 기술 배포보다 조직 전환에 가깝고, 기업은 기술 투자보다 채택과 변화 관리에 더 많은 비용을 써야 한다는 진단도 나온다.
패션기업 내부에서는 부서 간 장벽이 먼저 드러난다. 디자인팀은 감각과 브랜드 이미지를 중시하고, 생산팀은 납기와 원가를 본다. 영업팀은 매출 목표를 보고, 물류팀은 재고와 배송비를 본다. 데이터가 각 부서에 흩어져 있으면 AI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판매 데이터와 재고 데이터, 고객 데이터, 반품 데이터, 광고 데이터를 한곳에서 읽을 수 있어야 예측과 실행이 연결된다.
중소 패션 브랜드에는 비용 부담이 더 크다. 대형 브랜드는 데이터 인프라와 전담 인력을 갖추기 쉽지만, 중소 브랜드는 엑셀과 쇼핑몰 관리자 화면, 플랫폼 정산 자료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AI 도구를 도입해도 상품 코드, 사이즈 체계, 재고 위치, 반품 사유가 정리돼 있지 않으면 예측 정확도는 제한된다. AI 활용은 도구 구매보다 데이터 정리에서 시작된다.
한국의 정책 환경은 AI 전환을 밀어주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재명 정부의 2026년 예산안에는 AI 3대 강국 도약을 위한 10조1000억 원이 편성됐고, 산업·생활·공공 전 분야 AI 도입에 2조6000억 원, 인재 양성과 인프라 구축에 7조5000억 원이 배정됐다. 주요 산업 분야의 AI 대전환을 위해 향후 5년간 약 6조 원을 투입하겠다는 계획도 제시됐다.
문화산업 쪽에서도 AI는 전방위로 들어오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26년 문화기술 연구개발 예산을 역대 최대 규모로 편성하고, K-컬처 AI 관련 사업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콘텐츠 제작과 유통, 문화기술 전반의 AI 전환은 K패션에도 간접적인 환경을 만든다. 패션은 콘텐츠, 뷰티, 플랫폼, 관광 소비와 맞물려 해외 소비자에게 도달하는 산업이기 때문이다.
K패션 브랜드가 이 흐름을 활용하려면 AI를 홍보 문구로 쓰는 데서 멈추면 안 된다. 해외 소비자가 어떤 상품을 검색하는지, 어느 국가에서 어떤 사이즈가 많이 팔리는지, 어떤 색상과 소재가 반품으로 돌아오는지, 어느 플랫폼의 광고 효율이 높은지부터 축적해야 한다. 콘텐츠 인지도는 진입의 문을 열 수 있지만, 재고와 물류, 가격과 데이터 관리가 약하면 해외 판매는 곧 비용으로 돌아온다.
AI가 패션 일자리를 모두 대체한다는 식의 전망도 단순하다. 반복적인 상품 설명, 이미지 변형, 고객 응대, 기초 분석 업무는 자동화 압력을 받을 수 있다. 반대로 브랜드 방향을 정하고, 소재와 실루엣을 고르고, AI 결과물을 걸러내고, 고객 경험을 설계하는 역할은 더 중요해진다. 패션 인력에게 필요한 능력은 손작업과 감각만이 아니라 데이터를 읽고 도구를 통제하는 판단력으로 넓어진다.
올해 패션기업이 AI에서 얻으려는 것은 멋진 미래 이미지가 아니다. 팔리지 않을 옷을 덜 만들고, 필요한 상품을 제때 보내고, 고객이 반품하지 않게 설명하고, 광고비를 덜 낭비하는 실질적 개선이다. 디자인보다 재고표가 먼저 바뀌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관세와 전쟁, 소비 위축이 동시에 들어온 시장에서 패션기업의 AI 경쟁력은 더 많은 이미지를 만드는 능력보다 덜 틀리는 운영 능력에서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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