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붙잡고 유럽은 넓힌 첫 유럽 순방…커진 국가 체급을 국익 협상력으로 바꾸려는 시도

국익을 협상하는 정부, 이재명 외교의 설계도.  사진=대통령실,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익을 협상하는 정부, 이재명 외교의 설계도. 사진=대통령실,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박준식기자]브뤼셀, 로마, 피렌체, 교황청으로 이어진 이재명 대통령의 첫 유럽 순방은 환대와 의전보다 외교 노선의 변화를 더 강하게 드러냈다. EU와는 철강·디지털통상·안보정보 협력을 논의했고, 이탈리아와는 제조업·AI·우주·방산·문화유산 협력을 테이블에 올렸다. 교황청에서는 한반도 평화와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가 함께 거론됐다. 서로 다른 무대에 놓인 의제들은 하나의 방향으로 모였다. 한국 외교가 동맹의 보호를 받는 나라에서 국익의 조건을 직접 흥정하는 나라로 이동하려는 흐름이다.

이재명 정부의 첫 유럽 외교를 ‘탈미’로 읽는 순간 본질은 흐려진다. 이번 순방의 출발점은 한미동맹을 흔드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과의 안보축을 유지하면서도 미국 하나로 한국의 산업, 통상, 안보, 시장 접근권을 모두 지키기 어려운 시대가 왔다는 판단에 가까웠다. 미국 정치의 변동, 보호무역주의 확산, 중국발 공급망 압력, 유럽의 규제 강화, 북한 변수, 중동 리스크가 동시에 움직이는 상황에서 한국 외교가 더 많은 협상 상대와 더 많은 선택지를 확보하려는 시도였다.

이재명 외교의 첫 번째 문법은 균형외교보다 다중협상 외교에 가깝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중간 지대를 찾는 방식만으로는 지금의 국제질서를 설명하기 어렵다. 안보의 기본축은 한미동맹에 두고, 통상과 규제는 EU와 협상하며, 제조업과 방산은 G7 주요국과 연결하고, 한반도 평화 의제는 교황청과 국제사회로 넓히는 구조다. 외교 무대를 늘려 한국이 치러야 할 비용을 낮추고, 한국이 받을 수 있는 대가를 키우려는 접근이다.

브뤼셀에서 열린 한-EU 정상회담은 첫 무대부터 실무적이었다. 공동언론발표에 담긴 의제는 우호와 환대의 언어보다 구체적인 제도에 가까웠다. 한국과 EU는 비밀정보보호협정 체결 협상 개시, 디지털통상협정 서명, 승객 예약자료 전송 협정 타결, AI·양자기술·탄소중립 협력 확대를 제시했다. 첫 유럽 순방의 앞쪽에 정보보호, 데이터, 국경관리, 첨단산업을 배치한 선택은 외교를 의전이나 선언이 아니라 산업과 안보의 협상판으로 쓰겠다는 뜻에 가깝다.

EU는 한국에 큰 시장이면서 까다로운 규칙 제조자다. 한국 기업이 유럽에서 철강을 수출하고, 제품의 탄소 기준을 맞추고, 데이터를 다루고, 디지털 서비스를 제공하려면 EU가 만드는 규정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한국이 EU와 거리를 두면 이미 만들어진 규칙을 뒤늦게 받아들이는 위치에 놓인다. 정상급 협상 채널을 넓히면 규칙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한국 산업의 이해를 넣을 여지가 생긴다.

철강 문제는 이재명 외교의 성격을 가장 냉정하게 드러내는 대목이다. EU의 철강 수입제도 변화는 철강업계만의 부담으로 끝나지 않는다. 자동차, 조선, 건설기계, 에너지 설비, 지역경제와 고용까지 연결된다. 이재명 대통령이 EU 정상들에게 한국 기업이 불합리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고려해달라고 요청한 것은 통상 현안을 실무 협상에만 맡기지 않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정상외교가 의전의 언어를 넘어 제조업 방어선으로 들어간 셈이다.

EU와의 협력은 기대만큼 위험도 품고 있다. EU는 파트너이면서 압박자다. 철강 무관세 쿼터, 탄소국경조정제도, 산업가속화법 같은 사안은 한국 기업에 비용으로 돌아올 수 있다. 디지털통상협정이 체결됐다고 해서 한국 기업이 곧장 이익을 얻는 것도 아니다. 비밀정보보호협정 협상 개시도 실제 체결, 정보 공유 절차, 공동연구, 방산 협력까지 이어져야 성과가 된다. 이재명 정부가 유럽에서 얻어야 할 것은 박수와 환대가 아니라 쿼터, 예외, 인증, 공동연구, 투자, 수출 승인이다.

이탈리아 국빈방문은 다중협상 외교의 두 번째 축이었다. 한국과 이탈리아는 관계를 특별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했다. 이탈리아는 초강대국은 아니지만 G7 회원국이자 EU의 핵심국이다. 제조업, 디자인, 패션, 문화유산, 방산, 조선, 에너지, 중소기업 생태계를 동시에 가진 나라다. 한국이 유럽 안에서 산업 협력의 좁은 문을 열려면 이탈리아 같은 국가와의 관계가 필요하다.

 

로마에서 나온 의제는 넓었다. AI, 반도체, 우주, 방산, 재생에너지, 중소기업, 사회연대경제, 개발협력, 문화유산이 정상외교 안으로 들어왔다.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에서는 항공우주, AI, 반도체, 에너지·인프라, 바이오, 뷰티, 푸드 분야 협력 가능성이 논의됐다. 초감가상각제도 개선처럼 정상 간 협의가 기업 애로 해소로 이어진 대목도 있었다. 이재명 정부는 외교를 기업 간담회로 낮추려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시장 접근권을 정상외교의 의제로 끌어올리려 한다.

이탈리아와의 협력도 발표문만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기업인이 참석한 라운드테이블, 양해각서, 전략적 행동계획은 출발선이다. 한국 기업이 실제 수주를 따내는지, 이탈리아 기업과 공동개발을 하는지, 현지 규제와 세제 부담이 낮아지는지, 방산·우주·에너지 협력이 계약으로 이어지는지 확인해야 한다. 외교가 산업정책의 최전선이 되려면 발표보다 후속 집행이 강해야 한다.

피렌체와 우피치 미술관 일정은 문화외교의 방향을 드러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우피치미술관의 양해각서는 전시 교류, 해설과 교육, 소장품 관리, 복원, 출판, 인력 교류로 이어질 수 있는 기반이다. 한국 외교가 K-팝과 드라마의 인기만 말하는 단계에서 박물관, 문화유산, 디지털 콘텐츠, 전통문화까지 협상 자산으로 넓히려는 흐름이다. 문화는 더 이상 순방의 장식이 아니다. 관광, 전시산업, 도시 브랜드, 국가 이미지와 연결되는 실리의 영역이다.

교황청 공식방문은 시장과 산업의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무대였다. 교황청은 군사력이나 경제 규모로 움직이는 상대가 아니다. 그러나 한반도 평화, 세계청년대회, 국제연대, 종교 네트워크를 통해 한국의 평화 의제를 확산할 수 있는 도덕적 플랫폼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성 밖 성 바오로 대성당 특별미사 연설에서 6·15 남북공동선언을 언급하고, 전단 살포와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 흡수통일과 일방적 체제 경쟁 불추구, 군사적 신뢰 회복 의지를 밝혔다.

한반도 평화 의제를 교황청에서 꺼낸 선택은 이재명 외교의 또 다른 계산을 드러낸다. 대북정책을 남북 간 군사 문제로만 두지 않고 국제사회, 종교, 청년, 평화 담론으로 넓히려는 접근이다.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 지원 의지도 같은 맥락이다. 서울에 모일 세계 청년들을 관광객으로만 보지 않고, 한반도 평화와 국제연대의 잠재적 기반으로 삼으려는 구상이다.

평화외교는 가장 큰 논란을 부를 수 있는 축이기도 하다. 북한이 호응하지 않으면 긴장 완화 조치는 국내에서 일방적 양보로 공격받을 수 있다. 대북 확성기 중단과 전단 살포 중단은 충돌 위험을 낮추는 조치로 설명할 수 있지만, 북한의 군사 행동이 이어지면 정부 설명은 곧바로 흔들린다. 평화외교가 힘을 가지려면 군사 대비, 한미 공조, 제재 체계, 인도적 협력, 통신 복원, 우발충돌 방지 장치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

이재명 외교의 바탕에는 대한민국의 체급 변화가 놓여 있다. 한국은 더 이상 안보를 제공받고 시장을 따라가는 나라에 머물지 않는다. 반도체, 배터리, 조선, 방산, 자동차, 문화콘텐츠, 디지털 플랫폼, 바이오, K-뷰티, K-푸드까지 여러 분야에서 협상 자산을 갖고 있다. 이재명 정부는 이러한 자산을 동맹 관리, 통상 협상, 산업 협력, 평화 의제, 문화외교에 동시에 투입하려 한다.

국익을 협상하는 정부, 이재명 외교의 설계도.  사진=대통령실,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익을 협상하는 정부, 이재명 외교의 설계도. 사진=대통령실,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지금은 한국에 드문 기회다. 미국 중심 질서는 예전처럼 안정적이지 않고, EU는 새 규칙을 만들고 있으며, 공급망 재편은 한국 제조업에 부담과 기회를 함께 준다. 중견국 외교의 공간도 넓어지고 있다.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압박을 받는 변수로 남을지, 유럽과 G7, 중견국 네트워크를 활용해 별도의 협상력을 가진 국가로 움직일지는 앞으로 몇 년 안에 갈릴 가능성이 크다.

기회가 크다는 말은 위험도 크다는 뜻이다. 다중협상 외교는 여러 무대에 동시에 서는 만큼 여러 방향에서 압박을 받는다. 미국은 한국의 외교 다변화를 불안하게 볼 수 있고, 중국은 한국의 유럽·G7 밀착을 대중국 견제 동참으로 해석할 수 있다. EU는 협력 파트너로 손을 내밀면서 철강과 탄소규제로 한국 기업을 압박할 수 있다. 북한은 평화 메시지를 무시하거나 군사적 긴장을 높여 한국 정부의 구상을 흔들 수 있다.

국내 정치도 피할 수 없는 변수다. 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외교 언어로 쓰는 정부라면 국내 제도 신뢰가 함께 받쳐줘야 한다. 선거관리, 사법 신뢰, 국회 운영, 공공기관 책임성이 흔들리면 가치외교의 설득력도 약해진다. 해외에서 민주주의를 말하는 외교는 국내 제도의 안정성을 필요로 한다. 외교 성과는 해외 회담장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재명 외교는 박수로 평가할 수 없다. 철강 무관세 물량이 얼마나 확보되는지, 탄소국경조정제도의 부담이 얼마나 낮아지는지, 비밀정보보호협정이 언제 체결되는지, 방산·우주·AI 협력이 실제 공동연구와 계약으로 이어지는지, 한반도 평화 의제에 국제적 지지가 얼마나 붙는지가 평가 기준이다. 공동성명과 양해각서는 출발선일 뿐이다.

첫 유럽 순방은 이재명 정부 외교의 완성본이 아니라 견적서에 가깝다. 어떤 비용을 낮추고, 어떤 대가를 치르며, 어느 시장을 지키고, 어떤 협상 상대를 새로 만들 것인지가 드러났다. 미국 중심 동맹을 유지하되 의존을 줄이고, 유럽의 규제권력과 협상하며, G7 주요국과 산업협력을 넓히고, 교황청을 통해 평화 의제를 국제화하려는 구상이다.

대한민국의 커진 경제력과 문화적 영향력, 기술 경쟁력, 민주주의 경험이 실제 협상력으로 바뀐다면 지금의 국제질서 변화는 기회가 된다. 반대로 후속 협상이 느슨해지고, 양해각서가 행사 기록으로 남고, 평화 메시지가 국내 논쟁에 갇히고, EU 규제 대응이 실패하면 다중협상 외교는 비용만 늘리는 외교가 될 수 있다.

이재명 외교의 첫 승부처는 순방장의 환대가 아니다. 순방 이후 이어질 쿼터, 협정, 투자, 공동연구, 평화 채널, 국내 제도 신뢰가 실제로 움직이는지에 있다. 한국 외교가 동맹의 그늘에서 벗어나 협상국가로 서려면, 이제부터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방문이 아니라 더 정확한 계산과 더 집요한 집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