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 쿼터·탄소규제·디지털통상·방산 정보보호까지 정상외교 테이블에 올린 제조업 방어선

국익을 협상하는 정부, 이재명 외교의 설계도.  사진=대통령실,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익을 협상하는 정부, 이재명 외교의 설계도. 사진=대통령실,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박준식기자]EU의 새 철강 수입제도는 이재명 정부 외교가 마주한 첫 번째 경제안보 시험대다. EU는 2026년 7월 1일부터 철강 30개 품목의 관세를 50%로 인상하되, 일정 물량에는 무관세 수입을 허용하는 관세할당제도를 운영할 계획이다. 전체 무관세 수입 물량은 기존 세이프가드 체제의 총 수입쿼터 3,382만 톤에서 1,835만 톤으로 줄어든다. 축소 폭은 약 46%다. 유럽 시장에 철강을 수출하는 국가들의 경쟁은 더 거칠어질 수밖에 없다.

한국에 EU 철강 쿼터는 업계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작년 기준 한국의 총 철강 수출 2,825만 톤 가운데 324만 톤이 EU로 향했다. 한국은 EU로부터 약 258만 톤 규모의 국가 무관세 쿼터를 배정받아왔다. 유럽으로 들어가는 한국산 철강은 자동차, 조선, 기계, 에너지 설비와 연결된다. 무관세 물량이 줄고 초과 물량에 높은 관세가 붙으면 철강업체의 수익성뿐 아니라 한국 제조업의 유럽 공급망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브뤼셀 한-EU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철강 문제를 직접 꺼낸 이유도 여기에 있다. 통상 현안을 실무 부처 협상에만 맡기기에는 파급 범위가 크다. 철강은 지역경제와 고용, 협력업체, 자동차·조선·건설기계 산업의 가격 경쟁력까지 물고 들어간다. 정상외교가 의전과 공동성명에 머무르지 않고 제조업 방어선으로 들어간 셈이다.

이재명식 경제안보 외교는 통상을 외교의 하위 분야로 보지 않는다. 관세, 쿼터, 인증, 탄소 기준, 디지털 규범, 수출 승인, 정보보호 체계가 모두 국가 안보의 일부로 들어온다. 과거 통상이 물건을 얼마나 팔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면, 지금의 통상은 누가 규칙을 만들고, 어느 기업이 비용을 부담하며, 어느 나라가 예외와 유예를 얻어내느냐의 문제로 바뀌었다.

EU는 한국에 중요한 시장이면서 동시에 강력한 규제권자다. 철강 수입제도만이 아니다. 탄소국경조정제도, 산업가속화법, 디지털 규범, 개인정보 보호 기준, 공급망 기준은 한국 기업의 유럽 진입 비용을 직접 바꾼다. 한국 기업이 유럽 시장에서 제품을 팔려면 EU가 만든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한국 정부가 EU와 정상급 협상 채널을 넓히려는 이유는 규칙이 완성된 뒤 비용을 떠안는 위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탄소국경조정제도는 이재명 정부 경제안보 외교의 두 번째 압박 지점이다. EU는 기후 대응을 명분으로 탄소 배출이 많은 제품에 비용을 부과하는 제도를 추진하고 있다. 철강, 알루미늄, 시멘트, 비료, 전력, 수소 등 산업 전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규범이다. 한국 제조업은 에너지 다소비 업종 비중이 높고, 수출 중심 구조를 갖고 있다. 탄소 기준이 사실상 무역 장벽으로 작동하면 한국 기업은 생산비와 행정비, 인증비를 동시에 부담하게 된다.

이 대통령이 한-EU 정상회담에서 탄소국경조정제도를 검증하는 기관에 한국 기관도 포함시켜 달라고 요청한 대목은 작지 않다. 검증기관 문제는 기술적인 절차처럼 보이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비용과 시간의 문제다. 유럽 기관만 인정되면 한국 기업은 검증 과정에서 더 많은 행정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한국 기관이 포함되면 국내에서 일정 부분 검증을 진행할 수 있고, 기업 부담도 줄어들 수 있다. 경제안보 외교는 이런 세부 절차에서 실제 효과가 갈린다.

산업가속화법과 관련한 우려도 같은 흐름이다. 한국은 한-EU FTA 체결국이다. 그런데 EU 내부 산업 육성 규정에서 한국산 제품의 동등 대우가 불명확해지면 한국 기업은 유럽 기업과 같은 시장에서 다른 조건을 적용받을 수 있다. 대통령이 한국도 EU와 반드시 같은 처우를 받게 해달라고 강조한 것은 FTA 체결국의 권리를 정상외교 차원에서 다시 확인한 발언으로 읽힌다.

이재명 정부가 EU를 향해 요구한 것은 특혜가 아니다. 한국 기업이 기존 협정과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걸맞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요구다. 그러나 국제 통상 질서가 급격히 변하는 지금, 권리는 자동으로 보장되지 않는다. 미국, EU, 중국, 영국, 캐나다 등 주요국은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수입 규제와 보조금, 탄소 규범을 강화하고 있다. 한국은 규칙을 받아들이는 데 그치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한국 기업의 비용을 낮추고 시장 접근권을 지키려면 외교가 규칙 형성 과정에 끼어들어야 한다.

디지털통상협정은 이재명식 경제안보 외교의 다른 축이다. 한-EU 정상회담 계기에 서명된 디지털통상협정은 종이 없는 무역, 전자인증·서명, 데이터 비즈니스 환경, 디지털 교역 활성화와 연결된다. 겉으로는 행정 효율과 편익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데이터 흐름과 디지털 시장 접근권을 다루는 규범이다.

국익을 협상하는 정부, 이재명 외교의 설계도.  사진=대통령실,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익을 협상하는 정부, 이재명 외교의 설계도. 사진=대통령실,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디지털 통상은 제조업과 별개가 아니다. 자동차, 조선, 배터리, 반도체, 바이오, 화장품, 식품까지 데이터 기반 물류, 인증, 결제, 소비자 보호, 플랫폼 규칙의 영향을 받는다. 전자인증과 전자서명이 안정적으로 인정되면 기업의 행정 절차는 줄어든다. 종이 없는 무역이 정착되면 통관과 계약, 물류 처리 속도도 빨라질 수 있다. 반대로 디지털 규범이 유럽 중심으로만 굳어지면 한국 기업은 유럽 시장에서 데이터 처리와 인증 비용을 추가로 부담해야 한다.

디지털통상협정이 곧바로 성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기업들이 실제로 어떤 절차를 줄일 수 있는지, 한국 플랫폼과 중소기업이 유럽 시장에서 어떤 접근권을 얻는지, 소비자 보호와 개인정보 기준이 기업 활동을 얼마나 제약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협정의 이름보다 중요한 것은 기업 현장에서 비용과 시간이 줄어드는지다.

비밀정보보호협정 협상 개시는 경제안보와 방위산업이 만나는 지점이다. 한국과 EU가 민감정보를 안전하게 공유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만들면 방산, 우주, 첨단기술, 공동연구 협력의 폭이 넓어질 수 있다. 유럽의 안보 불안이 커지고, 인도태평양 안보와 유럽 안보가 서로 연결되는 상황에서 정보보호 체계는 방산 협력의 기본 조건이 된다.

한국 방산은 가격과 납기, 생산능력에서 강점을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유럽 시장에서 방산 협력이 깊어지려면 단순 구매 계약을 넘어 정보 공유, 공동개발, 공동생산, 수출 승인, 현지 정비·운용 체계까지 들어가야 한다. 비밀정보보호협정은 이런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문이다. 문이 열려야 방산과 우주, AI, 정찰위성, 첨단센서, 통신기술 협력이 실제 프로젝트로 갈 수 있다.

다만 정보보호 협력은 양날의 칼이다. 민감정보를 공유한다는 것은 신뢰를 쌓는 일인 동시에 더 깊은 안보 정렬을 요구받는 일이기도 하다. 한국이 유럽 방산 시장에 깊이 들어갈수록 러시아, 중국, 북한의 반응도 계산해야 한다. 방산 수출은 경제성과 안보 리스크가 함께 움직이는 분야다. 이재명 정부가 방산을 경제외교의 성과로만 다루지 않고 한반도 긴장 관리와 함께 놓아야 하는 이유다.

승객 예약자료 전송 협정 타결은 국민 안전을 경제안보 외교 안으로 끌어들인 대목이다. 항공사 승객 예약자료를 활용하면 세관 당국은 우범여행자를 사전에 선별하고 마약, 총기, 테러 등 초국가범죄 대응 역량을 높일 수 있다. 이동의 자유가 커진 시대에 국경관리는 단순 출입국 행정이 아니라 범죄, 보건, 테러, 물류 안정과 연결되는 안보 영역이 됐다.

이재명 정부의 경제안보 외교는 여기서 범위가 더 넓어진다. 철강은 제조업을 지키는 문제이고, 탄소규제는 수출비용을 좌우하는 문제이며, 디지털통상은 데이터 기반 산업의 시장 접근권 문제다. 비밀정보보호협정은 방산·우주·첨단기술 협력의 제도적 기반이고, 승객 예약자료 협정은 국민 안전과 초국가범죄 대응의 문제다. 외교정책 안에서 산업, 안보, 치안, 기술이 분리되지 않고 한 묶음으로 움직이는 구조다.

국익을 협상하는 정부, 이재명 외교의 설계도.  사진=대통령실,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익을 협상하는 정부, 이재명 외교의 설계도. 사진=대통령실,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로마에서 열린 한-이탈리아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도 같은 흐름 위에 있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네이버, KAI, LS, 효성, LG화학, HD현대건설기계, 삼양식품, 셀트리온, 패션그룹형지, 코스맥스, 큐어버스 등 한국 기업들은 이탈리아와 항공우주, AI, 반도체, 전력인프라, 친환경 에너지, 바이오, 뷰티, 푸드 분야 협력을 논의했다. 이탈리아 기업들도 전동화, 디지털화, 친환경 선박, 방산, 조선, K-뷰티 협력을 언급했다.

이탈리아 초감가상각제도 개선은 경제안보 외교가 기업 현안과 만난 대표적 대목이다. 이탈리아 기업이 신규 설비를 도입할 때 세제 혜택을 주는 제도에서 수혜 대상을 EU산 자산으로 한정하면 한국산 기계·설비를 도입하려는 현지 기업과 한국 수출기업 모두 불리해진다. 정상회담에서 이 문제가 제기됐고, 비EU산 기계 설비도 세제 혜택을 적용받을 수 있도록 제도가 개선됐다. 통상 장벽 하나가 정상 간 협의를 거쳐 기업 애로 해소로 이어진 흐름이다.

이 대목 역시 냉정하게 봐야 한다. 한 건의 제도 개선이 전체 경제안보 외교의 성공을 뜻하지는 않는다. 다만 대통령이 기업의 구체적 애로를 정상외교 의제로 끌어올렸다는 점은 분명한 변화다. 향후 한국 기업들이 EU와 G7 주요국 시장에서 부딪히는 세제, 인증, 보조금, 수출 승인, 현지 조달 규정이 정상외교의 의제로 더 자주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이재명 정부가 준비하는 경제안보 외교의 진짜 승부처는 후속 집행이다. 정상회담에서 “생산적 협의”가 있었다는 문장만으로 기업은 수출을 늘릴 수 없다. 철강 쿼터는 실제 물량으로 확인돼야 하고, 탄소국경조정제도는 검증비용과 행정 부담이 줄어야 하며, 디지털통상협정은 기업의 통관·인증·계약 절차를 줄여야 한다. 비밀정보보호협정은 체결과 실행 절차로 이어져야 하고, 방산·우주·AI 협력은 공동연구 예산과 계약으로 확인돼야 한다.

경제안보 외교가 커질수록 국내 산업정책의 정교함도 필요하다. 유럽 규제에 대응하려면 정부만 움직여서는 부족하다. 철강, 자동차, 조선, 배터리, 반도체, 에너지, 플랫폼 기업이 함께 대응해야 한다. 산업별 데이터를 모으고, EU 규정의 세부 문안을 분석하고, 기업별 비용을 산정하며, 협상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외교 현장에서 얻어낸 문구가 국내 기업의 실제 부담 완화로 이어지려면 부처 간 조율과 업계 협력이 뒤따라야 한다.

이재명식 경제안보 외교는 기회와 부담을 동시에 안고 있다. 한국은 반도체, 배터리, 조선, 방산, 자동차, 디지털 플랫폼, 바이오, K-뷰티, K-푸드까지 협상 자산을 넓혀왔다. 그러나 협상 자산이 많아졌다는 이유만으로 유리한 위치에 서는 것은 아니다. 미국과 EU는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 중국은 공급망 영향력을 유지하려 하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불안은 에너지와 해운 비용을 흔든다. 한국은 여러 시장에 깊이 연결된 만큼 외부 충격도 크게 받는다.

국익을 협상하는 정부, 이재명 외교의 설계도.  사진=대통령실,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익을 협상하는 정부, 이재명 외교의 설계도. 사진=대통령실,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이재명 정부가 경제안보를 외교정책의 중심에 놓은 이유는 여기 있다. 안보는 군사만의 문제가 아니고, 통상은 관세만의 문제가 아니며, 산업정책은 국내 보조금만의 문제가 아니다. 철강 쿼터 하나가 자동차와 조선의 가격 경쟁력으로 이어지고, 탄소 검증기관 하나가 기업 비용을 바꾸며, 정보보호협정 하나가 방산·우주 협력의 문을 열 수 있다. 외교가 곧 산업의 조건을 만드는 시대다.

성과는 숫자와 제도로 남아야 한다. 한국산 철강 무관세 물량, CBAM 검증기관 인정 여부, 산업가속화법에서 한국산 제품의 동등 대우, 디지털통상협정의 기업 체감 효과, 비밀정보보호협정 체결 일정, 방산·우주·AI 공동연구 예산, 이탈리아 세제 개선의 실제 적용 범위가 평가 기준이다. 순방장의 발언보다 기업 장부와 계약서, 인증 절차, 수출 물량이 더 정확한 결과표다.

이재명 외교의 2편은 경제안보에서 갈린다. 한국이 EU와 G7 주요국의 규칙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나라로 남을지, 아니면 규칙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들어가 비용을 낮추고 시장을 지키는 나라가 될지가 걸려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거창한 경제외교 구호가 아니라 쿼터를 따내고, 예외를 확보하고, 인증 비용을 줄이고, 공동연구를 계약으로 바꾸는 집요한 협상이다.

철강, 탄소, 디지털, 방산, 우주, 치안 협력이 한꺼번에 정상외교 테이블에 오른 것은 한국 외교의 무게중심이 달라지고 있음을 말한다. 경제안보 외교는 기업을 도와주는 부수적 일정이 아니다. 제조업 국가 한국이 국제질서의 새 규칙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어선이다. 이재명 정부가 이 방어선을 실제 성과로 만들지 못하면 첫 유럽 순방의 경제외교는 발표문에 머문다. 반대로 쿼터, 협정, 인증, 투자, 공동연구가 움직이면 이재명식 외교는 통상을 안보로 끌어올린 첫 실험으로 기록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