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 닫혔던 카사 바트요 2층을 갤러리로 전환…원형 문·창은 남기고 녹색 바닥과 반사 천장 삽입
[KtN 임민정기자]높은 목재 문 옆으로 흰 벽이 길게 이어지고, 검은 글자로 ‘Gaudí Miró Gomis Deconstructed’가 적혀 있다. 문짝을 채운 곡선과 오목한 장식, 짙고 옅은 나뭇결은 한 세기 전 건축의 시간을 드러낸다. 전시명과 안내문을 담은 벽은 장식을 걷어낸 채 평평하게 남았다. 바닥에는 옅은 녹색이 끊김 없이 깔렸다. 기존 건축과 새 전시 시설이 서로의 형태를 흉내 내지 않고 맞닿은 입구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카사 바트요 2층은 과거 주거 공간으로 사용됐고, 이후 건물 보존과 유지관리 작업장이 들어섰다. 수십 년간 일반 관람객에게 닫혀 있던 2층은 건축 스튜디오 메수라(Mesura)의 설계를 거쳐 2026년 1월 카사 바트요 컨템퍼러리로 문을 열었다. 기존 목공과 스테인드글라스를 보존하면서 현대미술 전시에 필요한 조명과 진열 시설, 새로운 바닥과 천장을 더한 개조다.
2026년 7월 개막한 ‘가우디-미로-고미스: 디컨스트럭티드(Gaudí-Miró-Gomis: Deconstructed)’는 새 전시장이 서로 다른 매체를 받아들이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호안 미로(Joan Miró)의 종이 작품과 조각, 호아킴 고미스(Joaquim Gomis)의 사진, 투모로 뷰로(Tomorrow Bureau)의 디지털 설치가 밝은 복도와 검은 전시실에 나뉘어 들어갔다. 가우디의 건축을 모든 구역에서 똑같이 강조하지 않고, 작품의 성격에 따라 기존 부재를 드러내거나 뒤로 물린 구성이 사용됐다. 전시는 카사 바트요 컨템퍼러리가 문을 연 뒤 마련한 두 번째 주요 기획이다.
주거 공간에서 정기 전시장으로
카사 바트요는 처음부터 미술관으로 지어진 건물이 아니다. 가우디가 1904년부터 1906년까지 기존 공동주택을 개조한 건축으로, 주거 기능에 맞춰 방과 복도, 문과 창이 구성됐다. 유네스코도 카사 바트요가 공동주택의 원래 설계를 상당 부분 유지하면서 현재 문화·관광 시설을 함께 수용한다고 설명한다.
주거 공간을 전시장으로 바꾸려면 기존 구조를 비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종이 작품을 보호하는 조도, 조각을 지탱하는 전시대, 관람객이 오가는 통로, 영상과 음향을 위한 암실, 전시 교체에 대응하는 조명과 전기 설비가 필요하다. 메수라는 남아 있던 목재 문과 창을 복원하고, 작품을 거는 벽과 진열장, 조명 레일은 현대적인 형태로 구분했다. 원형 부재를 새 마감재로 덮어 하나의 시대처럼 보이게 만들지 않은 방식이다.
카사 바트요 컨템퍼러리는 겨울과 여름에 한 차례씩 연간 두 번 전시를 운영한다. 건물 전체 관람에 포함하거나 전시장만 별도로 관람할 수 있는 운영 구조도 마련했다. 한 번의 기념 전시를 위해 임시로 방을 비운 것이 아니라 작품 교체와 반복 관람을 전제로 한 상설 전시 기반을 넣었다.
세계유산 건축의 적응적 재사용(adaptive reuse)은 과거 공간에 새 기능을 넣되 기존 건축의 물질과 구조를 지우지 않는 작업이다. 카사 바트요 2층에서는 주거 공간의 문과 창, 굴곡진 목공이 남고, 전시를 위해 추가된 부분은 색과 재료를 달리했다. 보존과 새로운 사용을 한쪽으로 통일하지 않고 서로 다른 층으로 드러낸 선택이다.
문과 창은 남기고 전시 가구는 직선으로
밝은 구역의 목재 창은 벽에서 바깥으로 돌출된 곡선형 틀과 아래로 길게 내려오는 세로 장식으로 구성됐다. 창문을 둘러싼 목공은 사각형 벽면과 다른 윤곽을 만들고, 자연광은 반투명한 유리를 거쳐 흰 천장과 벽으로 퍼진다. 복원된 창과 목공은 카사 바트요의 기존 부재다.
창 아래에는 길고 낮은 진열장이 놓였다. 목재 창의 굴곡과 달리 흰 받침대와 유리 덮개는 곧은 선으로 이어진다. 가우디의 곡선을 새 전시 가구에 반복하지 않고, 새로 넣은 시설이라는 사실을 형태로 구분했다. 유리 진열장은 벽과 나란히 뻗으며 좁은 통로의 방향을 정하고, 작은 사진과 문헌을 일정한 간격으로 펼쳐 놓는다.
원형 창과 진열장이 가까이 놓여도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의 장식으로 흡수되지는 않는다. 창은 채광과 건축의 흔적을 담당하고, 진열장은 자료를 보호하고 관람 높이를 맞춘다. 기능과 제작 시기가 다른 두 요소가 재료와 형태를 분리한 채 공존한다.
복도 안쪽에도 같은 방식이 반복된다. 목재 부재가 남아 있는 부분과 작품을 위한 흰 벽이 번갈아 나타나고, 액자 주변에는 충분한 여백을 둔다. 흰 벽은 카사 바트요의 장식을 대신하려는 조형물이 아니라 작품을 지지하는 바탕에 가깝다.
벽면을 따라 이어지는 녹색 바닥은 서로 다른 방과 복도를 하나의 동선으로 묶는다. 메수라는 매끄러운 마이크로시멘트 바닥을 새로 넣었으며, 녹색은 카사 바트요 외벽의 모자이크와 자연에서 가져온 색을 참고해 선택됐다. 천장의 굴곡이 적극적으로 빛을 반사하는 것과 달리 바닥은 이음매가 드러나지 않는 낮고 평평한 면으로 처리됐다.
녹색 바닥은 가우디 시대의 재료처럼 보이도록 노화하거나 무늬를 넣지 않았다. 나뭇결과 금속 장식이 남은 문, 흰 벽, 투명 유리와 분명히 다른 현대 마감이다. 기존 부재와 신규 요소를 시각적으로 구분하면서 복도 전체의 연속성을 확보한다.
밝은 복도와 검은 방, 건축의 가시성을 나눈 구획
밝은 전시 구역에서는 카사 바트요의 목재 문과 창, 벽의 굴곡과 통로의 깊이가 계속 드러난다. 미로의 그래픽 작품과 고미스의 사진은 기존 건축과 같은 공간을 나눠 쓴다. 관람객은 작품을 보면서 문틀과 창, 바닥의 방향도 함께 인식한다.
검은 전시실에서는 기존 주거 공간의 흔적이 크게 줄어든다. 벽과 바닥을 어둡게 처리하고, 커튼으로 주변부를 가렸으며, 중앙의 흰 조각 전시대와 디지털 설치에 빛을 집중했다. 가우디 건축을 모든 구간에서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빛과 영상이 필요한 구역에서는 건축을 배경으로 물렸다.
기존 건축을 계속 노출하면 카사 바트요의 장식과 전시 작품이 같은 공간에서 경쟁할 수 있다. 반대로 전시실 전체를 중립적인 흰 벽으로 바꾸면 장소가 가진 구조와 시간은 사라진다. 밝은 복도와 검은 방을 분리한 설계는 두 조건을 구역별로 나눴다. 원형 목공이 남은 통로에서는 건축과 작품을 함께 보게 하고, 조각과 디지털 설치가 들어간 방에서는 전시 장치가 우선하도록 조도를 낮췄다.
검은 방 안에서도 가우디 건축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한쪽 벽에 남은 목재 문은 어두운 마감 사이에서 붉은 갈색으로 드러나고, 천장의 곡면은 디지털 설치의 빛을 받아 형태를 바꾼다. 기존 부재를 없애지 않고 노출 강도를 조절한 방식이다.
물방울의 동심원을 옮긴 금속 천장
어두운 전시실의 가장 큰 건축적 개입은 천장이다. 길게 이어진 금속판에는 물방울이 잔잔한 수면에 떨어질 때 퍼지는 동심원과 물결이 새겨졌다. 금속판은 평평한 마감재로 천장을 덮지 않고 여러 방향으로 굽혀져 있으며, 전시장 길이를 따라 반복된다.
메수라는 로봇 기술을 이용해 물결 형태의 금속 천장을 제작했다. 공식 설명에 따르면 동심원 무늬와 곡면은 새로운 전시장의 시각적 정체성을 만들면서 구조적 기능도 맡는다. 메수라와 제작사 옥시도 스튜디오(Oxido Studio)는 자동차 산업에서 사용하는 금속 성형 방식을 응용해 1.2㎜ 두께의 알루미늄판을 굽혔다. 얇은 금속판에 굴곡을 주면서 강성을 확보해 무거운 보조 골조를 줄이는 방식이다.
천장은 가우디 건축의 곡선을 그대로 복제하지 않는다. 가우디의 목재 문과 창이 수공예적 조각과 나뭇결을 드러낸다면 새 천장은 산업용 금속과 로봇 가공의 흔적을 앞세운다. 자연에서 가져온 곡면과 반복이라는 공통점은 남지만 재료와 제작법은 21세기에 속한다.
어두운 전시에서는 금속의 반사가 더 뚜렷해진다. 디지털 설치에서 나온 푸른빛과 흰 조명이 굴곡을 따라 길게 퍼지고, 관람 위치가 달라질 때마다 밝은 부분도 이동한다. 천장은 고정된 장식이라기보다 전시마다 달라지는 조명을 받아들이는 반사면으로 작동한다.
조각 전시대의 직선과 천장의 굴곡도 뚜렷하게 갈린다. 바닥 가까이에서는 흰 전시대가 작품을 일렬로 정리하고, 위쪽에서는 물결 형태가 불규칙한 반사를 만든다. 전시대는 작품의 위치를 고정하지만 천장은 빛을 분산하며 공간의 범위를 넓힌다.
반사 천장이 강한 존재감을 갖는 만큼 전시 작품과의 관계는 고정되지 않는다. 빛을 많이 사용하는 설치에서는 천장의 굴곡이 전시 효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종이 작품이나 낮은 조도의 전시에서는 금속 표면이 상대적으로 뒤로 물러날 수 있다. 특정 전시 한 번에 맞춘 배경보다 조명 조건에 따라 인상이 달라지는 장기 시설에 가깝다.
가우디를 모방하지 않은 전시 장치
카사 바트요처럼 건축 자체가 널리 알려진 장소에 새 시설을 넣을 때 가우디의 곡선과 장식을 반복하는 선택은 쉽게 과잉으로 이어질 수 있다. 메수라는 유리 진열장과 흰 좌대, 조명 레일, 커튼을 단순한 형태로 정리했다. 기존 목공의 곡선과 장식을 새 가구에 옮기지 않고 기능이 먼저 읽히도록 했다.
투명한 유리 구조물은 조각을 보호하면서 전시장 깊이를 가리지 않는다. 가는 금속 프레임과 유리판 너머로 목재 문과 다른 조각, 디지털 설치가 이어진다. 새로운 전시 장치가 벽을 하나 더 세워 기존 건축을 차단하는 대신 여러 요소가 겹쳐 보이는 여지를 남긴다.
흰 좌대는 녹색 바닥과 검은 바닥 위에서 분명한 경계를 만들지만 장식은 없다. 작품마다 형태가 다른 받침대를 설계하기보다 동일한 수평면 위에 조각을 배열했다. 새 시설이 가우디의 건축적 표현을 대신하지 않고 작품의 위치와 안전, 관람 높이를 담당한다.
조명도 원형 천장에 숨기기보다 레일과 원통형 기구를 노출했다. 기존 건축에 속하지 않는 설비임을 감추지 않은 처리다. 전시 교체에 따라 조사 방향과 위치를 조정해야 하는 갤러리의 운영 조건이 형태에 반영됐다.
기존 건축과 새 시설을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다. 흰 벽에 걸린 미로 작품 옆으로 목재 문이 들어오고, 금속 천장의 반사에는 조각과 관람객, 디지털 설치의 빛이 함께 섞인다. 서로 다른 시대의 요소가 같은 공간에서 겹치되 어느 한쪽을 가우디 양식으로 통일하지 않은 점이 2층 개조의 기준을 만든다.
보존 대상에서 전시 생산 기반으로
카사 바트요의 문화적 활용은 새 전시장 이전에도 이어졌다. 건물 내부 관람과 복원 프로그램, 외벽을 이용한 미디어 파사드가 운영됐다. 카사 바트요 컨템퍼러리는 외부에서 일회적으로 선보이던 디지털 작업을 넘어 건물 안에서 정기적으로 전시를 제작할 수 있는 기반을 추가했다. 2층 전시장은 예술·건축·기술을 연결하는 장소 특정적 프로젝트와 매체 융합 작업을 연 두 차례 선보이는 프로그램으로 운영된다.
유네스코는 카사 바트요가 공동주택의 원래 설계를 대체로 유지하면서 문화·관광 기능을 결합하고 있으며, 보존 상태와 문화적 이용을 높이기 위한 복원이 진행돼 왔다고 평가한다. 새 갤러리는 기존 용도를 그대로 재현하는 복원보다 남아 있는 부재를 보존한 채 다른 사용을 넣는 방향에 속한다.
정기 전시가 들어오면서 건축은 관람 대상인 동시에 작품을 생산하고 보여주는 시설이 됐다. 목재 문과 창은 건축의 원형을 전달하고, 흰 벽과 진열장은 원작을 보호하며, 검은 방과 금속 천장은 영상과 음향을 수용한다. 하나의 공간이 모든 역할을 맡기보다 기능을 나누고 서로 다른 재료로 표시했다.
카사 바트요 2층에서 가우디의 목공은 출입과 공간 경계의 기준으로 남았다. 녹색 바닥과 금속 천장, 유리 진열장과 조명 레일은 전시가 바뀌어도 계속 사용되는 새로운 기반을 이룬다. 한 세기 전 주거 공간과 21세기 전시 시설은 같은 양식으로 합쳐지지 않았다. 각자의 재료와 제작 방식을 드러낸 채 서로 다른 작품을 받아들이는 구조로 재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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