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명의 조각가가 참여한 전시부터 배창호 감독 인터뷰와 합창 공연까지…서초동 갤러리에서 살펴본 문화공간의 변화와 예술을 경험하는 새로운 방식
[KtN 박준식기자]서울 서초구 구띠갤러리의 흰 벽 앞에 합창단원들이 나란히 섰다. 김준홍 지휘자가 단원들을 마주하고, 관객들은 객석에서 노래를 들었다. 지난 15일 열린 더 콰이어 블루(The Choir Blue) 제4회 정기연주회다. 미술 작품을 감상하던 전시장은 성악과 피아노 연주를 듣는 공연 공간으로 사용됐다. 작품 앞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던 관람객과 정해진 시간 동안 음악을 듣는 관객의 차이는 하나의 문화공간이 여러 예술을 수용할 때 나타나는 변화를 살펴보게 한다.
구띠갤러리에서는 올해 조각과 회화 전시에 이어 영화감독 인터뷰, 합창 공연이 진행됐다. 3월에는 53명의 조각가가 참여한 제41회 이화조각전 '겹쳐진 시간들, 지금 여기'가 열렸고, 8월에는 구승희의 채색화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영화 '고래사냥'과 '기쁜 우리 젊은 날' 등을 연출한 배창호 감독의 심층 인터뷰도 구띠갤러리에서 진행됐다. 미술과 영화, 음악이 각각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과 만난 것이다.
미술관과 갤러리는 작품을 감상하는 장소로 발전해 왔다. 회화와 조각의 재료를 살피고, 작품과 거리를 조절하며 구성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관람객은 자신의 속도로 움직인다. 여러 작품을 순서대로 살펴보다가 관심 있는 작품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작품 앞에 머무는 시간과 관람 순서에 상당한 선택권이 주어지는 것이다.
공연이 시작되면 시간의 주도권은 연주자에게 옮겨간다. 노래가 시작되고 끝나는 순서, 연주자의 호흡과 음악의 진행을 관객이 함께 따라간다. 같은 시간에 같은 곡을 듣더라도 음악을 받아들이는 경험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공연의 진행은 연주자와 관객이 공유한다. 작품을 중심으로 개별적인 감상이 이루어지는 전시와 일정한 시간에 사람들이 모여 음악을 듣는 공연은 공간을 사용하는 방식부터 차이가 있다.
구띠갤러리의 활동은 전시실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문화 활동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현장이다. 벽과 천장, 출입구는 그대로여도 미술 전시에서는 작품 배치와 관람 동선이 중요해지고, 음악회에서는 연주자와 객석의 위치가 우선된다. 영화감독의 인터뷰가 진행될 때에는 취재진과 창작자가 마주 앉아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2026년 3월 21일부터 28일까지 열린 제41회 이화조각전에는 세대와 작업 방식이 서로 다른 조각가 53명이 참여했다. '겹쳐진 시간들, 지금 여기'라는 제목 아래 입체조각부터 사진과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한 작업이 소개됐다. 같은 전시장에서도 재료와 작품의 형식에 따라 관람 방식이 달라졌다.
조각은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형태와 부피가 다르게 인식된다. 작품 주변을 이동하면 정면에서 보이지 않던 구조가 드러나고, 재료가 놓인 높이나 주변 공간과의 관계도 달라진다. 관람객이 작품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거리와 이동할 수 있는 범위는 조각을 이해하는 조건이 된다.
이화조각전에 참여한 김순임의 '보리얼숲에 뜬 달'은 피그먼트 프린트와 11분 9초 길이의 단채널영상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자연의 땅을 어루만져 형상을 만드는 행위와 시간이 사진과 영상에 담겼다. 고정된 입체조각과 달리 작품의 제작 과정을 따라가는 시간도 감상에 포함된다. 회화나 조각을 잠시 바라보는 일과 일정한 길이의 영상을 끝까지 감상하는 일은 관람객에게 서로 다른 시간을 요구한다.
2024년 구띠갤러리에서 열린 미국 작가 엔리코 엠브롤리(Enrico Embroli)의 전시는 색채와 재료를 활용한 추상회화를 소개했다. 물감이 쌓인 두께와 긁힌 흔적, 색면의 굴곡은 작품을 가까이에서 살필 때와 거리를 두고 바라볼 때 서로 다른 인상을 남긴다. 그림을 구성하는 요소가 특정한 인물이나 풍경보다 색채와 재료의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8월 구승희 작가의 채색화에서는 노란 곱슬머리 인물과 꽃, 새, 가족 등 친숙한 형상이 등장했다. 인물과 사물 사이의 관계를 따라가면서 작품에 담긴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 구성이다. 추상회화의 재료와 형태를 살피는 경험, 구상회화에서 인물과 주변 사물의 관계를 읽는 경험은 같은 미술 감상 안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서로 다른 미술 작품을 수용하는 전시장에서는 작품의 크기와 재료, 설치 방식에 따라 관람 환경을 조정해야 한다. 규모가 큰 작품에는 충분한 감상 거리가 필요하고, 영상 작품에서는 빛과 소리, 상영 시간이 관람에 영향을 준다. 소형 회화는 작품 가까이에서 세부 표현을 살펴볼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다. 전시 공간의 역할은 작품을 걸어두는 장소를 마련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작품의 성격에 맞게 관람 환경을 구성하는 일까지 포함한다.
미술 전시가 작품과 관람객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면, 영화감독의 인터뷰는 창작자와 취재진의 대화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배창호 감독은 1982년 '꼬방동네 사람들'로 데뷔한 뒤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 '기쁜 우리 젊은 날' 등 한국 영화사의 주요 작품을 연출했다. 1980년대 한국영화의 제작 환경과 대중문화의 변화, 작품 속 인물과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는 영화인이다.
구띠갤러리에서 진행된 배창호 감독의 심층 인터뷰 'Clair de lune'에는 어린 시절 영화와 만난 기억부터 감독의 길을 선택한 과정, 작품을 제작하며 겪은 경험까지 한국영화의 여러 시간이 담겼다. 취재에는 본지 박준식·임우경 기자가 참여했고 구띠갤러리 이재원 회장도 특별게스트로 함께했다.
완성된 영화를 관람하는 일과 감독에게 제작 당시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다르다. 영화관에서는 배우의 연기와 촬영, 편집, 음악이 결합한 작품을 만난다. 인터뷰에서는 영화를 만든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언어로 설명한다. 작품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했던 창작 과정과 시대적 환경이 감독의 증언을 통해 구체적인 기록으로 남게 된다.
배창호 감독과의 인터뷰가 미술 갤러리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문화공간의 사용 범위를 살펴볼 만한 대목이다. 미술 작품을 전시하는 장소가 영화인의 경험을 기록하는 취재 공간으로 활용된 것이다. 영화인 인터뷰가 반드시 영화관이나 영화제에서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며, 문화적 대화를 기록하기 위한 장소도 다양하게 선택될 수 있다.
인터뷰는 영상과 기사로 옮겨질 때 현장에서 이루어진 대화의 시간과 다른 생명력을 갖는다. 기록된 발언은 이후에도 다시 확인하고 인용할 수 있다. 작품을 제작하던 당시의 경험이 오늘의 언어로 정리되고, 기록을 접하는 독자는 다른 시기에 같은 이야기를 만난다.
영화는 영상으로 감상하고, 감독의 발언은 인터뷰로 읽거나 들을 수 있다. 구띠갤러리에서 진행된 배창호 감독과의 대화는 한 문화공간이 예술 작품의 전시뿐 아니라 창작자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데에도 사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전시와 구별된다. 영화인의 작품 세계와 한국영화의 역사를 다루는 깊이 있는 대화가 이루어질 때 공간은 작품을 보는 장소에서 창작 경험을 기록하는 장소로 쓰임이 바뀐다.
10월 15일 더 콰이어 블루의 제4회 정기연주회에서는 또 다른 문화 활동이 이어졌다. 김준홍 지휘자와 권혜경 피아니스트가 참여한 가운데 한국 가곡과 해외 성악곡, 뮤지컬 음악 등이 연주됐다.
2020년 6월 창단한 더 콰이어 블루는 박희열 회장을 중심으로 정기연주회와 작은 음악회 등을 이어온 아마추어 합창단이다. 박 회장은 테너 단원으로도 참여하며 이정선 사무총장은 알토 성부를 맡는다. 여러 성부의 단원들이 함께 연습한 음악을 관객 앞에서 연주하는 활동은 작품을 감상하는 문화와 함께 직접 음악에 참여하는 생활예술의 한 영역을 이룬다.
합창 공연을 위해서는 여러 성부의 소리가 서로 어우러질 수 있는 배치가 필요하다. 지휘자는 단원들의 호흡과 박자를 조율하고, 피아노 반주는 노래의 진행을 뒷받침한다. 객석과 연주자 사이의 거리, 천장과 벽면의 구조도 소리가 전달되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
미술 전시에서는 작품을 보호하고 관람객이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야 하지만, 합창 공연에서는 연주자들이 함께 설 자리와 악보를 사용할 공간, 객석을 마련해야 한다. 같은 장소를 사용해도 준비 과정과 공간을 활용하는 기준이 달라지는 것이다.
공연장으로 설계된 공간은 객석 규모와 음향, 무대 설비를 고려해 만들어진다. 갤러리는 전시 작품의 설치와 관람에 적합한 조건을 우선한다. 전시실에서 음악회를 열 때에는 기존 공간의 크기와 구조에 맞춰 연주자와 객석의 위치를 조정해야 한다. 음악의 편성과 공연 규모에 따라 적합한 장소가 달라질 수 있는 이유다.
구띠갤러리의 전시와 합창 공연은 문화공간의 복합적인 사용과 예술 장르의 융합을 구별해 생각하게 한다. 전시된 미술 작품과 음악이 서로 영향을 주며 하나의 예술적 구성을 만드는 공연도 있지만, 전시와 공연이 서로 다른 일정에 따라 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방식도 있다. 구띠갤러리에서는 미술 전시와 영화 인터뷰, 합창 공연이 각각의 성격에 맞춰 진행됐다.
문화공간에서 프로그램의 종류가 늘어나는 일은 방문 목적을 다양하게 만든다. 미술을 보기 위해 찾았던 장소에서 음악회를 접할 수 있고, 영화인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가 마련될 수도 있다. 같은 공간을 이용하더라도 참여하는 사람과 머무는 시간, 활동의 방식은 행사마다 다르다.
그만큼 개별 프로그램에 맞는 관람 환경을 마련하는 일도 중요해진다. 전시에서는 작품 앞에 충분히 머물 수 있는 동선이 필요하고, 인터뷰에서는 발언과 대화가 또렷하게 전달될 수 있어야 한다. 공연에서는 연주자와 관객의 위치, 소리의 전달, 공연 중 이동 동선과 안전이 고려돼야 한다.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운영하는 일과 각 예술 활동의 특성을 유지하는 일은 함께 다뤄져야 한다.
국내 문화예술 향유 방식도 변화를 겪고 있다. 2025년 국민문화예술활동조사에서 문화예술행사 직접 관람률은 60.2%로 전년보다 2.8%포인트 낮아졌다. 반면 스마트기기 등 매체를 통한 간접 관람률은 72.0%로 0.4%포인트 상승했다. 같은 기간 미술 분야 직접 관람률은 7.7%로 전년보다 2.1%포인트 높아졌다.
영화관과 공연장, 미술관을 직접 찾는 활동과 온라인 영상, 디지털 매체를 통한 감상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문화예술을 접하는 통로가 늘어난 가운데 현장 방문에 들이는 시간과 비용, 장소의 접근성도 관람을 결정하는 조건이 된다. 관람객은 개별 작품뿐 아니라 그 작품을 경험하기 위해 찾아가는 장소와 관람 방식까지 선택하게 된다.
2025년 조사에서는 문화예술행사에 직접 참여한 비율도 5.8%로 전년보다 1.1%포인트 상승했다. 작품을 감상하는 활동 외에 시민이 직접 발표회와 전시회, 창작활동에 참여하는 문화도 이어지고 있다. 관람과 참여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민간 문화공간의 활동 역시 전시 관람에 한정되지 않고 공연과 대화, 문화 참여로 넓어질 수 있다.
구띠갤러리에서 열린 더 콰이어 블루의 연주회는 시민이 직접 음악을 연주하는 활동이 미술 전시 공간과 만난 경우다. 배창호 감독 인터뷰에서는 창작자의 경험이 기록으로 남았고, 이화조각전에서는 작가들이 여러 재료와 매체로 제작한 작품을 관람객에게 선보였다. 예술을 만드는 사람과 감상하는 사람, 이야기를 기록하는 사람이 각각 다른 방식으로 공간을 이용했다.
서초동 구띠갤러리는 인사동 공평갤러리와 용산 삼각지 시기를 거쳐 2022년 현재의 공간을 마련한 이력을 갖고 있다. 갤러리라는 기본 성격을 유지하면서 전시와 문화행사를 운영해 왔다. 여러 장소를 거쳐 이어진 미술 전시 활동이 서초동에서 영화 인터뷰와 음악 공연 등 다른 문화 활동과 만나고 있다.
문화예술의 공간적 경계가 달라지는 흐름은 특정 장르를 위한 전용시설이 가진 가치와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술관은 작품의 보존과 전시, 공연장은 음악과 무대예술의 전문적인 연출, 영화관은 영상을 감상하기 위한 환경을 제공한다. 반면 여러 활동을 수용하는 문화공간은 각 프로그램에 따라 장소를 조정하며 사용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문화시설의 성격에 따라 관람 환경과 운영 조건이 달라지는 것이다.
전시와 공연, 인터뷰의 경험을 한곳에서 제공한다고 해서 모든 방문객이 같은 문화적 만족을 얻는 것은 아니다. 미술 작품을 천천히 감상하려는 사람과 음악회를 위해 방문한 사람, 영화감독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에게 필요한 환경은 서로 다르다. 한 공간에서 제공하는 문화 프로그램이 많아질수록 각 활동에 맞는 관람 조건을 세밀하게 마련해야 할 이유도 커진다.
구띠갤러리의 올해 활동은 문화공간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위치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구체적으로 남겼다. 3월 이화조각전에서는 입체 작품과 영상 사이를 이동하는 관람 방식이 중요했고, 8월 구승희의 채색화 전시에서는 인물과 색채, 사물의 구성을 살피는 감상이 이루어졌다. 배창호 감독과의 인터뷰에서는 창작자의 경험을 말로 듣고 기록하는 활동이 진행됐으며, 10월 더 콰이어 블루의 연주회에서는 객석에 앉은 관객들이 합창을 들었다.
같은 장소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같은 방식으로 예술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그림과 조각을 볼 때에는 작품 앞에 머무는 거리와 시간을 선택하고, 감독과의 대화에서는 언어를 통해 창작 경험을 접하며, 공연에서는 연주자와 음악의 흐름을 공유한다. 구띠갤러리에서 진행된 전시와 영화 인터뷰, 합창 공연은 한 장소가 다양한 문화 활동을 수용하면서 관람객과 예술의 관계도 서로 다른 모습으로 형성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서초동 구띠갤러리에서는 올해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시간과 영화인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시간, 합창단의 노래를 듣는 시간이 이어졌다. 문화공간의 역할은 프로그램의 종류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작품을 가까이에서 살피고, 창작자의 이야기를 듣고, 연주자와 같은 공간에서 음악을 경험할 수 있는 관람 환경이 각각 갖춰질 때 서로 다른 문화 활동은 자신의 성격을 유지할 수 있다. 구띠갤러리에서 열린 전시와 공연, 인터뷰의 기록은 오늘날 예술 공간을 이용하는 방식이 다양해지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