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선으로 그린 일상의 얼굴과 은빛 원형 회화, 오래된 의자와 나뭇가지…서로 다른 매체로 이어지는 기억과 감정의 조형적 변화

[KtN 박준식기자]파란 줄무늬 옷을 입은 인물이 둥글게 입을 벌리고 정면을 바라본다. 곁에는 ‘Don't Worry’와 ‘Think Positive’라는 짧은 문구가 놓여 있다. 다른 인물들은 여름 음료와 디저트, 작은 종이배를 들고 있다. 굵은 검은 선과 흰 여백, 선명한 파란색으로 구성된 네 얼굴에는 일상의 익숙한 표정과 감정이 담겨 있다.

검은 천 위에 놓인 오래된 의자에서는 잎이 떨어진 나뭇가지가 뻗어나간다. 의자 뒤편의 커다란 원형 회화에는 검정과 은빛이 맞닿아 있고, 공중에는 검은 깃털과 새장 형태의 금속 오브제가 매달려 있다. 나뭇가지의 그림자는 흰 벽을 따라 퍼지며 실제 사물보다 넓은 영역을 차지한다.

임하나(LIMHANA) 작가의 ‘Hello My Friends’와 ‘Replenish’는 인물 초상과 공간 설치라는 서로 다른 형식으로 기억과 감정, 회복의 문제를 다룬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리는 ‘ARTO Open 2026’에는 ‘Hello My Friends’ 연작이 소개됐고, 10월 21일부터 27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린 제21회 광화문국제아트페스티벌 아시아현대미술청년작가 선정전에서는 ‘Replenish’를 중심으로 한 설치 구성이 선보였다.

‘Hello My Friends’가 평범한 얼굴과 짧은 인사말에 감정을 담았다면, ‘Replenish’에서는 회화와 사물, 직물의 물성을 통해 기억과 관계의 흔적을 풀어냈다. 초상에서는 선과 색채의 선택이 인물의 분위기를 결정하고, 설치에서는 재료의 무게와 형태, 배치와 그림자가 정서적 의미를 만든다.

말레이시아 ‘ARTO Open 2026’에 참여한 임하나 작가의 ‘Hello My Friends’ 연작. 검은 윤곽선과 푸른색을 중심으로 구성된 인물 초상에 일상의 소품과 짧은 문구가 함께 놓였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말레이시아 ‘ARTO Open 2026’에 참여한 임하나 작가의 ‘Hello My Friends’ 연작. 검은 윤곽선과 푸른색을 중심으로 구성된 인물 초상에 일상의 소품과 짧은 문구가 함께 놓였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Hello My Friends’의 인물들은 증명사진을 닮은 사각형 안에 놓여 있다. 작은 검은 점 두 개로 표현한 눈과 둥글게 열린 입, 굵은 곡선으로 정리한 머리카락이 얼굴의 기본 형태를 이룬다. 인물마다 옷차림과 소품은 다르지만 표정은 비슷하게 반복된다.

임하나는 인물의 나이와 성별, 인종이나 국적을 특정하는 외형적 단서를 줄이고 일상의 감정에 집중했다. 서로 다른 사람을 닮은 얼굴들은 구체적인 신분이나 개인사를 드러내기보다 관람자가 자신의 경험을 떠올릴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

초상 옆에 놓인 짧은 문구들도 친숙하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권유, 여름을 맞이하는 인사가 인물의 곁을 채운다. 특별한 사건이나 극적인 감정을 묘사하기보다 일상에서 주고받는 말과 행동을 통해 인물의 내면을 다룬다.

파란색은 초상에 담긴 감정을 구분하는 중요한 요소다. 흰 바탕과 검은 윤곽선이 인물의 형태를 만들고, 블루는 의상과 소품의 일부를 채운다. 선명한 파란색 줄무늬와 짙은 청색의 옷, 작은 파란색 장식이 서로 다른 분위기를 만든다.

임하나는 블루가 지닌 희망과 슬픔의 양면성에 주목했다. 밝고 맑은 인상을 주는 색이면서도 고요함과 그리움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다. 파란색은 인물의 외형을 꾸미는 역할에 머물지 않고, 일상에 남아 있는 여러 감정을 담는 수단으로 사용됐다.

작품에 사용된 색채는 블루에서 모노톤으로 옮겨갔다가 다시 블루로 돌아오는 변화를 거쳤다. 삶의 여러 상황에 반응하며 색을 바꾸었던 임하나는 다시 선택한 푸른색에 어려운 시간을 지나면서도 잃지 않고 싶은 감정을 담았다.

‘Replenish’에서는 인물의 얼굴 대신 원형 회화와 실제 사물이 등장한다. 작품의 뒤편에 놓인 원형 회화에는 짙은 검정과 은빛 마티에르(matière)가 결합돼 있다. 윗부분은 검은색이 넓게 차지하고, 아래에서는 은빛 물질이 층층이 쌓이며 불규칙한 경계를 만든다.

임하나의 ‘Replenish’ 설치 작품. 은빛 원형 회화와 오래된 의자, 나뭇가지, 검은 직물과 공중의 오브제를 결합해 기억과 회복의 과정을 공간적으로 구성했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임하나의 ‘Replenish’ 설치 작품. 은빛 원형 회화와 오래된 의자, 나뭇가지, 검은 직물과 공중의 오브제를 결합해 기억과 회복의 과정을 공간적으로 구성했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검정은 ‘Replenish’에서 모든 색을 품는 관용과 포용의 의미를 지닌다. 은빛은 소진된 에너지가 다시 차오르며 균형을 되찾는 과정을 나타낸다. 물질이 겹쳐지는 부분에서는 깊게 패인 굴곡과 두껍게 쌓인 질감이 나타나고, 빛의 방향에 따라 은빛의 명암도 달라진다.

‘Hello My Friends’에서 파란색이 인물의 감정을 전달했다면, ‘Replenish’에서는 검정과 은빛의 관계가 정서적 변화를 담는다. 색채를 사용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 초상에서는 흰 여백 위에 파란색을 제한적으로 배치하고, 원형 회화에서는 검은 바탕과 은빛 물질이 넓은 영역에서 맞닿도록 구성했다.

사각형과 원형이라는 기본 형태의 차이도 두 작업을 구별한다. ‘Hello My Friends’의 사각형은 인물과 문구를 일정한 틀 안에 담는다. 반면 ‘Replenish’의 원형 회화에서는 은빛의 결이 검은 영역으로 올라가며 불규칙한 경계를 이룬다. 초상의 사각형이 인물의 한순간을 붙잡는다면, 원형 회화는 물질이 쌓이고 변화하는 과정을 담는다.

‘Replenish’ 아래 놓인 오래된 의자는 ‘생각의 나무’와 연결된다. 의자의 양옆에서 실제 나뭇가지가 뻗어나가고, 가느다란 가지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라지며 벽에 복잡한 그림자를 남긴다.

의자는 본래 사람이 앉아 쉬는 사물이다. 임하나는 익숙한 가구의 기능을 바꾸고 그 자리를 기억과 사유의 공간으로 옮겼다. 의자의 등받이와 팔걸이는 일정한 구조를 유지하지만, 나뭇가지는 정해진 방향 없이 사방으로 뻗는다. 고정된 가구와 불규칙하게 퍼지는 가지가 함께 놓이면서 사물에 새로운 움직임이 생긴다.

잘려 나온 가지는 더 이상 자라지 않지만 형태는 여전히 바깥으로 뻗어 있다. 임하나는 생장이 멈춘 재료를 통해 기억과 생각이 지속되는 상태를 표현했다. 오래된 의자에 남은 시간과 나뭇가지의 확장하는 형상이 결합하면서 부재와 지속이라는 두 상태가 하나의 설치 안에 놓인다.

‘Hello My Friends’에는 사람의 얼굴이 있지만 구체적인 인물의 사연은 드러나지 않는다. ‘생각의 나무’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지만 누군가 앉았을 법한 의자가 놓여 있다. 얼굴을 통해 내면에 접근하는 초상과 사람이 비운 자리를 통해 기억을 다루는 설치는 서로 다른 방향에서 인간의 경험을 표현한다.

초상 속 인물들은 관람자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작은 눈과 열린 입이 시선을 맞추고, 짧은 문구가 말을 건넨다. ‘생각의 나무’에서는 의자와 가지를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형태가 달라진다. 정면에서는 의자와 원형 회화가 겹쳐지고, 옆으로 이동하면 나뭇가지의 실제 형태와 벽에 드리운 그림자의 차이가 드러난다.

두 작품은 관람자가 마주하는 방식에서도 차이를 만든다. 초상은 인물의 얼굴과 문구를 읽으며 감정을 떠올리도록 하고, 설치는 사물 사이의 거리와 그림자의 깊이를 따라 공간을 살피도록 한다.

임하나의 ‘Replenish’ 설치 전경. 원형 회화 아래 놓인 의자와 나뭇가지, 바닥에 펼쳐진 검은 직물, 벽을 따라 드리운 그림자가 서로 다른 공간적 깊이를 형성한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임하나의 ‘Replenish’ 설치 전경. 원형 회화 아래 놓인 의자와 나뭇가지, 바닥에 펼쳐진 검은 직물, 벽을 따라 드리운 그림자가 서로 다른 공간적 깊이를 형성한다.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바닥에 넓게 펼쳐진 검은 직물은 ‘보이고 싶지 않은, 보일 수밖에 없는’의 정서와 연결된다. 임하나는 빛을 차단하는 암막천과 얇고 투명한 오간자(organza)의 물성 차이를 이용해 감정을 감추려는 마음과 드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다뤘다.

검은 천은 바닥에 여러 겹으로 쌓이면서 깊은 주름을 만든다. 빛을 받는 부분에는 회색에 가까운 명암이 나타나고, 천이 깊게 접힌 부분은 어둡게 가라앉는다. 굵고 불규칙한 주름이 이어지며 감정이 축적되는 모습을 직물의 형태로 표현한다.

나뭇가지는 위로 뻗고 검은 천은 아래로 내려앉는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이어지는 두 재료의 움직임 사이에 오래된 의자가 놓여 있다. 공중에 매달린 깃털과 새장 형태의 금속 오브제는 직물의 무거운 질감과 대비를 이룬다.

벽에 나타나는 그림자도 설치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나뭇가지의 가느다란 선과 금속 오브제의 곡선이 벽 위에서 겹쳐지며 실제 사물과 다른 크기의 형상을 만든다. 눈앞에 놓인 물체와 그 뒤에 남은 그림자가 함께 보이면서 기억의 실체와 잔상을 떠올리게 한다.

‘Hello My Friends’의 인물들도 검은 선과 흰 여백으로 구성돼 있다. 머리카락을 이루는 불규칙한 곡선과 얼굴의 둥근 윤곽은 적은 수의 선으로 완성된다. ‘Replenish’에서는 나뭇가지의 실제 선과 금속 오브제의 곡선, 벽에 드리운 그림자가 비슷한 조형적 역할을 맡는다.

초상 속 선은 인물의 형태를 구분하고, 설치 속 선은 사물의 관계와 공간의 깊이를 만든다. ‘Hello My Friends’에서는 인물을 둘러싼 여백이 얼굴의 형태를 강조한다. ‘Replenish’에서는 의자와 오브제 사이의 빈 공간이 그림자와 빛을 받아들이며 작품의 일부가 된다.

임하나가 지속해 온 음악적 구성도 두 작업을 연결하는 요소다. KLOINM의 ‘SCORE: Caprice & Sonnet’은 소리를 기록하는 악보의 의미를 중심으로 회화와 설치, 음악의 관계를 다룬 작업이다. 임하나는 작곡 과정에서도 독자적인 기보 방식을 사용하며 소리의 흐름과 간격을 시각적인 형태로 옮겨왔다.

임하나(LIMHANA).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임하나(LIMHANA).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Hello My Friends’에서는 비슷한 얼굴이 반복되고 인물마다 색채와 소품이 달라진다. 일정한 사각형 안에서 반복과 변주가 이루지는 구성이다. ‘Replenish’에서는 원형 회화와 의자, 나뭇가지, 직물, 깃털의 위치와 간격이 공간적인 리듬을 만든다.

인물의 얼굴을 구분하는 선과 설치를 이루는 사물의 배치는 매체와 표현 방식이 다르지만 반복과 간격, 여백을 활용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초상에서는 작은 눈과 둥근 입이 일정한 형태로 반복되고, 설치에서는 가지와 금속 오브제의 선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어진다.

‘Hello My Friends’는 오래된 태블릿으로 시작한 초기 디지털 드로잉을 파인아트 프린트로 발전시킨 연작이다. 손으로 그림을 그리기 어려웠던 시기에 디지털 도구의 도움을 받아 작업을 지속했고, 간결한 검은 선과 제한된 색채를 사용한 인물 초상으로 이어졌다.

‘Replenish’에서는 회화의 물질적인 질감과 실제 오브제의 부피, 직물의 무게, 빛과 그림자를 활용했다. 인물의 얼굴을 그리는 작업과 공간에 사물을 배치하는 작업 사이에는 제작 방식의 차이가 있지만, 감정과 기억을 구체적인 조형 요소로 옮기는 관심은 이어진다.

말레이시아 ‘ARTO Open 2026’에서 소개된 ‘Hello My Friends’는 검은 윤곽선과 블루의 색채를 통해 평범한 일상에 남아 있는 희망과 슬픔을 다룬다. 서울 광화문국제아트페스티벌에서 선보인 ‘Replenish’는 검정과 은빛, 나뭇가지와 직물의 물성을 활용해 소모된 감정이 회복되는 과정을 구성했다.

두 작업은 각각 인물과 공간을 다루면서도 기억과 감정의 지속성에 관심을 둔다. ‘Hello My Friends’에서는 일상의 짧은 인사말과 푸른색이 사람의 내면에 접근하는 수단이 되고, ‘Replenish’에서는 오래된 의자와 가지, 검은 천, 은빛 회화가 감정의 변화와 시간의 흔적을 담는다.

네 얼굴에 남아 있는 작은 눈과 열린 입, 오래된 의자 위로 뻗은 가지, 검은 바탕에서 차오르는 은빛의 질감은 임하나가 서로 다른 재료로 다뤄온 기억과 회복의 형상이다. 초상에 머물렀던 감정은 실제 사물과 직물, 빛과 그림자를 통해 공간으로 넓어졌고, 관람자는 인물의 얼굴을 바라보는 경험에서 사물 사이의 관계를 따라가는 경험으로 이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