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콘텐츠는 어떻게 외교의 자산이 되었나

 

[KtN 임우경기자]싱가포르 중심가의 한 건물 안, 현무암과 감물 원단, 소쿠리와 해녀복이 놓인 복도를 지나면 공연형 다이닝 공간이 열린다. 이름은 ‘해녀의 부엌’. 제주의 사계를 무대 삼아 음식과 이야기를 엮는 공간이다. 지난해 12월 이곳이 싱가포르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 3월 2일, 김혜경 여사가 이곳을 찾았다. 국빈방문 일정 가운데 가장 ‘지역적인’ 장면이었다.

외교 일정에서 지역 콘텐츠가 전면에 선 일은 드물다. 정상회담과 공동선언, MOU 체결이 중심을 이루는 자리에서 제주의 해녀 이야기가 호출된 것은 상징적이다. 지역이 곧 국가 브랜드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서울의 빌딩 숲이나 반도체 공장이 아닌, 바다와 바람을 견뎌온 해녀의 삶이 싱가포르 한복판에 올랐다.

‘해녀의 부엌’은 단순한 식당이 아니다. 공연과 음식이 결합된 형식이다. 제주의 봄·여름·가을·겨울을 주제로 감귤과 해조류, 돼지고기와 전통 발효음료 쉰다리가 차례로 나온다. 영상과 배우의 연기가 더해진다. 관객은 손님이자 관람객이다. 음식을 먹는 행위가 서사를 듣는 경험으로 바뀐다. 지역 문화가 상품으로 가공되는 과정이 이 공간에 응축돼 있다.

김혜경 여사는 “싱가포르에서 제주의 돌을 보게 되다니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현지 대표는 제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실감하고 있다고 전했다. 인플루언서와 여행사 관계자, 호텔 지사장, 지방정부 실무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 자리는 격식을 갖춘 환영 행사가 아니라,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 간담회였다.

지역 관광은 오래전부터 과제로 지적돼 왔다. 외국인 방문객의 동선이 수도권에 집중되고, 지방은 체류 시간이 짧다는 분석이 반복됐다. 그러나 해법은 구호로만 남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 일정은 다른 결을 보여줬다. 지역 콘텐츠가 현지에서 직접 소비되는 현장을 확인하고, 그 자리에서 유통과 홍보, 접근성 문제를 함께 짚었다.

싱가포르 인플루언서는 제주를 처음 찾았던 경험을 소개하며, 한국 관광이 자연과 음식, 축제로 확장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 다른 참석자는 교통과 언어 안내의 개선을 제안했다. 여행사 매니저는 대중문화를 통해 한국을 접한 고객의 방한 전환율이 높다고 말했다. 현장의 발언은 정책 문서에서 보기 어려운 구체성을 지녔다.

관광은 콘텐츠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이동과 숙박, 언어 안내, 예약 시스템이 맞물려야 한다. 지역 문화가 아무리 매력적이어도 접근이 불편하면 선택받기 어렵다. 김 여사가 “여행은 전 과정이 유기적으로 이어질 때 완성된다”고 말한 대목은 이 점을 짚는다. 문화는 출발점이지만, 산업은 구조를 요구한다.

이번 방문에서 주목할 점은 지역을 ‘보조적 장식’으로 다루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해녀의 부엌은 국빈방문 일정 속에서 독립된 장면을 차지했다. 제주라는 구체적 지명이 반복됐고, 군산시 실무자가 현지에서 고민을 공유했다. 지역이 국가 전략의 일부로 호명된 셈이다.

한국은 그동안 한류라는 이름으로 대중문화를 세계에 확산시켰다. 음악과 드라마, 음식이 국가 이미지를 끌어올렸다. 이제 과제는 그 이미지를 지역 경제와 연결하는 일이다. 서울과 수도권에 머무는 소비를 지방으로 확장하고, 체류 기간을 늘리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해녀의 부엌은 그 가능성을 시험하는 모델로 읽힌다.

싱가포르는 도시국가다. 국토가 작지만 도시 브랜드를 전략적으로 키워왔다. 한국은 지역이 넓다. 각 지역이 가진 역사와 문화, 자연 자산이 풍부하다. 문제는 이를 하나의 서사로 묶어 해외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방식이다. 공연형 다이닝은 그 서사의 한 형식이다. 지역의 이야기를 감각적 경험으로 바꾸는 실험이다.

김혜경 여사가 꽹과리를 직접 치며 공연에 참여한 장면은 형식적인 방문을 넘어선 참여의 상징이었다. 외교가 멀리 떨어진 회담장이 아니라, 생활문화의 현장으로 내려왔다는 신호다. 이런 장면은 현지 언론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확산된다. 관광은 정책과 동시에 이미지의 산업이기도 하다.

 

정상회담에서 논의된 FTA 개선과 투자 협력, 인공지능과 에너지 안보 문제는 국가 차원의 큰 의제다. 그와 동시에 지역 콘텐츠를 통한 관광 활성화는 국민 생활과 직결된다. 국가의 전략과 지역의 삶이 따로 움직이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문화와 정치가 만나는 지점이다.

해녀는 오랜 시간 바다에 몸을 담가 생계를 이어왔다. 공동체의 규율과 상호 신뢰가 없으면 유지되기 어려운 직업이다. 그 삶의 방식이 싱가포르 한복판에서 이야기로 재구성됐다. 지역의 고유한 문화가 국경을 넘어 소비되는 장면이다.

이번 싱가포르 방문에서 해녀의 부엌은 작은 일정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지역을 세계와 연결하려는 시도가 담겨 있다. 문화가 정치의 상징을 넘어 산업과 정책으로 이어질 때, 외교는 생활과 맞닿는다. 제주 해녀가 싱가포르 무대에 오른 날, 지역 콘텐츠는 외교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