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아파렐리 전시가 남긴 옷의 형상과 이미지
[KtN 임우경기자]런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V&A)에서 열린 ‘스키아파렐리: 패션, 예술이 되다’는 한 메종의 역사를 정리하는 전시에 그치지 않았다. 이 전시는 옷이 어디까지 예술과 닿을 수 있는지, 그리고 예술적 형상이 몸 위에 올라가는 순간 무엇으로 바뀌는지를 함께 보여줬다. 엘사 스키아파렐리의 1920~30년대 작업부터 다니엘 로즈베리의 최근 쿠튀르까지 한자리에 놓고 보면, 결국 남는 것은 한 가지다. 미학은 무엇인가. 스키아파렐리의 경우 그 답은 개념보다 먼저 형상으로 나온다. 선과 표면, 장식과 색, 낯선 이미지의 반복이 그것이다.
엘사 스키아파렐리의 시작은 작은 착시에서 출발했다. 1927년 트롱프뢰유 보타이 니트는 리본을 달지 않고도 리본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 옷이었다. 이 작업은 옷이 단순한 복식이 아니라 시각적 장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스키아파렐리의 미학은 여기서 이미 분명했다. 몸을 덮는 기능보다 먼저 눈을 흔들고, 익숙한 것을 약간 비틀어 낯선 인상을 만드는 것. 장식은 사치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였다.
달리와 장 콕토를 만난 뒤 그 감각은 더 선명한 형태를 얻었다. 랍스터 드레스, 스켈레톤 드레스, 티어스 드레스는 패션사의 대표작이기 전에 초현실주의가 의복 위에서 작동한 방식의 기록이다. 랍스터는 식탁의 사물이면서 동시에 불안한 상징이 되고, 해골은 몸 안의 구조를 몸 바깥으로 끌어낸다. 찢긴 천의 프린트는 완결된 아름다움보다 균열과 파손의 이미지를 남긴다. 스키아파렐리의 옷은 미술을 흉내 낸 패션이 아니었다. 회화와 시, 조각에서 다루던 상징과 전복의 감각을 몸 위에 직접 옮긴 또 다른 장르에 가까웠다.
중요한 점은 스키아파렐리의 미학이 상징과 충격에만 머물지 않았다는 데 있다. 런던 메이페어 살롱과 할리우드 시기로 넘어가면 옷은 더 분명하게 사회와 시장 안으로 들어간다. 마를렌 디트리히를 위한 테일러링, 메 웨스트와 연결된 향수병, 쇼윈도 디스플레이와 영화 의상은 같은 사실을 말한다. 미학은 고립된 취향이 아니라 유통되고 소비되는 형식이라는 점이다. 옷은 박물관 안에서만 완성되지 않는다. 도시의 거리, 영화의 화면, 스타의 몸 위에서 비로소 한 시대의 이미지가 된다.
단추와 자수, 브로치와 향수병 같은 작은 물건들 역시 스키아파렐리 미학의 핵심이었다. 단추는 여밈을 위한 부속품이 아니라 곤충과 입술, 자물쇠 같은 형상으로 바뀌었고, 자수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별자리와 눈, 손 같은 기호를 옷 표면에 새겼다. 향수병조차 제품 용기를 넘어 하나의 조형물처럼 설계됐다. 스키아파렐리의 옷은 큰 실루엣만으로 완성되지 않았다. 작은 반복과 축적이 하우스의 얼굴을 만들었다.
실루엣도 빼놓을 수 없다. 1930년대 재킷과 코트에서 보이는 강한 어깨선과 또렷한 허리선은 여성복이 부드러움과 장식에만 머물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스키아파렐리는 몸을 따라 흐르는 옷만 만든 디자이너가 아니었다. 몸 바깥에 구조를 세우고, 여성복 안에 긴장과 권위의 인상을 넣었다. 장식과 초현실주의 이미지가 이런 구조적인 테일러링과 함께 나왔다는 점에서 스키아파렐리의 옷은 더 복합적이다. 우아함과 낯섦, 현실성과 연극성이 한 벌 안에 같이 들어 있다.
이 지점에서 미학은 아름다움의 문제가 아니라 질서의 문제가 된다. 무엇을 아름답다고 볼 것인가보다,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비틀며 어떤 형상을 반복할 것인가가 더 중요해진다. 스키아파렐리의 미학은 조화와 안정의 미학이라기보다 어긋남과 충돌의 미학에 가깝다. 랍스터를 드레스 위에 올리고, 해골을 저녁 드레스 표면에 부풀리고, 신체 일부를 황금 장식으로 확대하는 방식은 아름다움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움의 기준을 넓히기 위해 나온다.
다니엘 로즈베리의 작업은 그 오래된 언어를 오늘의 환경 안에 다시 세운다. 2019년 이후 스키아파렐리는 레드카펫과 SNS, 시상식과 온라인 이미지 시장 안에서 다시 강한 존재감을 얻었다. 아리아나 그란데의 드레스, 두아 리파의 현대판 스켈레톤 드레스, 로봇 베이비 같은 최근 작업은 초현실주의를 복원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오늘의 시각 환경이 가장 빠르게 반응하는 형식으로 바꿔낸다. 엘사가 랍스터와 해골, 쇼킹 핑크로 당대의 시선을 흔들었다면, 로즈베리는 금빛 장식과 신체 오브제, 과장된 표면으로 같은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 전시를 보고 남는 결론은 단순하지 않다. “패션은 예술이다”라는 문장만으로는 부족하다. 더 정확한 말은 따로 있다. 패션은 예술의 아래에도 위에도 있지 않다. 둘은 같은 시대 감각이 서로 다른 표면에 나타난 결과에 가깝다. 한쪽은 벽에 걸리고, 다른 한쪽은 몸 위에 올라간다. 그러나 둘 다 결국 눈을 흔들고 인식을 바꾸는 일에 닿아 있다.
예술과 패션의 사이에서 미학은 결국 태도의 문제로 남는다. 익숙한 것을 그대로 두지 않는 태도, 장식을 부속으로 취급하지 않는 태도, 몸을 감추는 대신 다시 보이게 만드는 태도, 아름다움을 안정된 조화가 아니라 낯섦과 긴장의 상태로 받아들이는 태도다. 스키아파렐리의 옷이 지금도 박물관 안에서 낡지 않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유행은 지나갔어도, 무엇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할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힘은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