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0일부터 24일까지 Apartamento와 협업 전시
참여자 이름은 공개됐지만 도서 목록과 선정 이유는 나오지 않아
[KtN 임우경기자]질 샌더가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밀라노 쇼룸에서 ‘Reference Library’를 연다. 스페인 인테리어·출판 매체 Apartamento와 함께 마련한 전시다. 질 샌더 측은 건축가, 디자이너, 예술가, 음악가, 영화감독 등 60명이 각자 작업에 영향을 준 책을 한 권씩 골라 서가를 꾸린다고 밝혔다. 공간 설계는 밀라노 건축사무소 studioutte가 맡았다.
패션 브랜드가 의류나 가구 대신 책을 전면에 내세운 전시는 드물다. 질 샌더는 이번 전시를 디지털 환경에서 흩어진 집중을 다시 모으는 자리로 설명했다. 느린 독서와 물성, 오래 머무는 시간을 내세운다. 그러나 바깥으로 나온 정보는 책보다 참여자와 공간 연출, 운영 방식에 더 쏠려 있다.
참여자 명단에는 로낭 부홀렉, 재스퍼 모리슨,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뤼케 리, 셀린 송, 리크리트 티라바니자, 페이 투굿 등이 포함됐다. 이름과 분야는 공개됐지만 정작 60권의 목록은 나오지 않았다. 각 참여자가 어떤 책을 골랐는지, 왜 그 책을 택했는지, 60권을 묶는 기준이 무엇인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Reference Library’라는 이름을 내걸었지만 전시의 중심이 돼야 할 책 정보는 비어 있다.
도서 전시라면 책 제목과 판본, 분야, 배열 방식, 열람 범위 같은 기본 정보가 함께 제시되는 경우가 많다. 이번 전시는 다르다. 어떤 책이 놓이는지보다 누가 참여하는지가 먼저 공개됐다. 서가의 내용보다 참여자 명단이 앞에 섰다. 여러 분야 인사가 각자 한 권씩 골랐다는 설명만으로는 이 전시가 어떤 방향으로 묶였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공간 구성도 비슷하다. 질 샌더 측 설명에 따르면 전시장에는 크롬 렉턴이 놓이고, 각 렉턴 위에는 독서등이 켜진다. 뒷벽은 거울로 마감된다. 책 한 권 한 권을 돋보이게 하는 구성이다. 서가나 열람실보다 설치 작업에 가까운 형식이다. 오래 앉아 페이지를 넘기는 공간이라기보다 책을 진열하고 바라보는 장면을 강조한 구조로 읽힌다.
질 샌더는 이를 가까이 들여다보는 즐거움을 위한 설계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거울과 금속, 조명 중심의 공간은 일반적인 독서 환경과는 거리가 있다. 독서는 보통 반사와 긴장보다 안정된 시선과 머무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번 전시는 독서 환경을 만드는 쪽보다 독서를 상징하는 장면을 만드는 쪽에 더 무게가 실려 있다.
운영 방식도 열람실보다는 전시에 가깝다. 이번 전시는 등록제로 운영된다. 시간당 60개 슬롯이 열린다. 입장객은 현장에서 제공되는 흰 장갑을 끼고 책을 만지게 된다. 질 샌더는 이를 책의 물성과 집중의 시간을 지키기 위한 장치로 설명한다. 그러나 등록제와 장갑은 자유로운 열람보다 제한된 체험의 형식을 강화한다. 오래 머물며 읽는 자리라기보다 정해진 시간 안에 정해진 방식으로 책을 대하는 구조다.
흰 장갑 역시 상징성이 짙다. 종이 자료를 다룰 때 장갑 착용이 언제나 적절한 것은 아니다. 손끝 감각이 둔해지면 얇은 페이지를 넘기기 어렵고, 오히려 종이를 상하게 할 수도 있다. 이번 전시의 장갑은 보존 실무의 표준이라기보다 귀한 책을 다루는 장면을 강조하는 장치에 가깝다. 책 보호의 장치이면서 동시에 책의 권위를 드러내는 장치다.
전시 설명과 실제 공개 정보 사이 간격은 여기서 더 또렷해진다. 질 샌더는 느린 독서와 사유를 말하지만, 바깥으로 먼저 드러난 것은 참여자의 이름, 반사되는 공간, 등록제 운영, 흰 장갑 같은 형식이다. 읽기의 내용보다 읽기의 장면이 먼저 공개됐다.
그렇다고 이번 시도를 한 줄로 밀어붙이기는 어렵다. 밀라노 디자인 위크는 오래전부터 제품보다 태도와 분위기를 앞세우는 무대였다. 패션 하우스들은 쇼룸과 매장을 판매 공간에만 두지 않았다. 가구와 향, 조명과 출판, 설치와 토크를 묶어 브랜드의 성격을 보여주는 장소로 써 왔다. 질 샌더도 그 흐름 안에 있다. 이번 전시 역시 책을 파는 자리가 아니라 책을 매개로 브랜드의 결을 드러내는 자리로 읽힌다.
그만큼 책 정보의 부재는 더 크게 남는다. 일정과 장소, 협업 상대, 참여자 명단, 운영 방식, 공간 구성은 공개됐다. 60권의 목록과 선정 이유, 서가를 묶는 기준은 나오지 않았다. 책을 앞세운 전시인데 책 내용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질 샌더가 밀라노 쇼룸에 세운 것은 60권의 서가다. 다만 개막을 앞두고 먼저 공개된 것은 서가의 내용보다 서가를 둘러싼 형식이다. 참여자 이름이 앞에 섰고, 공간 연출과 운영 방식이 그 뒤를 이었다. 전시가 문을 연 뒤에도 남는 것이 책일지, 책을 둘러싼 이미지일지는 그때 가서 가려질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