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전성진기자]미국 안방 TV 화면이 달라졌다. 넷플릭스와 디즈니+, 맥스만 앞줄에 서던 자리에 플루토TV와 투비, 삼성 TV 플러스 같은 무료 채널이 함께 뜬다. 리모컨을 켜면 어떤 앱이 먼저 보이는지, 어떤 프로그램이 첫 화면을 차지하는지, 어떤 채널이 무료로 흘러나오는지가 시청 시간을 가른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 스트리밍 시장의 승부는 가입자 숫자에서 갈렸다. 지금 미국 미디어 업계가 먼저 보는 숫자는 다르다. 제작비를 얼마나 줄였는지, 광고를 얼마나 더 붙였는지, 이용자를 어느 화면에서 오래 붙잡아 두는지가 앞자리에 올라섰다.
시장이 커진 뒤에야 청구서가 본격적으로 날아들었다. 2020년 전후 디즈니와 워너브러더스디스커버리, NBC유니버설 같은 전통 미디어 회사들은 저마다 자체 스트리밍 서비스를 키우는 데 사활을 걸었다. 새 드라마와 영화를 쏟아냈고, 스포츠와 뉴스, 어린이 채널과 영화 라이브러리까지 끌어모아 구독자를 늘렸다. 화려한 성적표도 나왔다. 디즈니+는 짧은 기간에 대규모 가입자를 모았고, HBO 맥스도 세계 시장으로 보폭을 넓혔다. 문제는 시장점유율을 넓히는 속도만큼 비용도 함께 불어났다는 점이다. 작품 한 편의 흥행이 회사 전체 손익을 떠받치기 어려운 구조에서 콘텐츠 제작비와 마케팅비, 플랫폼 운영비가 한꺼번에 뛰었다. 가입자는 늘었는데 정작 돈은 남지 않는 장면이 반복됐다.
영화와 드라마의 장사는 원래 짧게 달아오르고 빨리 식는다. 작품 공개 직후 며칠, 길어야 몇 주 동안 시청이 몰리고, 뒤로 갈수록 화제는 식는다. 스트리밍 서비스는 이용자를 붙잡기 위해 새 작품을 쉬지 않고 내놓아야 한다. 그러니 제작비는 계속 들어가는데 수익 회수는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 한 작품이 다른 작품 제작비까지 벌어다 주는 구조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 여기에 이용자 확보 비용까지 치솟았다. 초창기에는 싼 가격과 화제작 몇 편으로 가입자를 끌어모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플랫폼마다 대표작을 갖췄고, 소비자들은 두세 개, 많게는 네다섯 개 서비스를 함께 구독한다. 이런 시장에서 가격을 올리면 바로 해지로 이어질 수 있다. 작품을 더 많이 만들어도 신규 가입자가 폭발적으로 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에서 미국 스트리밍 시장을 지켜보는 제작사와 플랫폼 사업자들이 눈여겨볼 대목도 바로 여기다. 한국콘텐츠진흥원 미국 LA비즈니스센터가 4월 2일 낸 ‘미국 스트리밍 산업 재편과 미디어 M&A 동향 분석’ 보고서는 미국 스트리밍 산업이 가입자 확대 중심 성장 국면을 지나 수익성 회복과 구조 재편 단계로 들어섰다고 짚었다. 더는 누가 가입자를 많이 모으느냐가 첫 번째 질문이 아니다. 어떤 사업자가 더 넓은 유통망을 쥐고, 광고와 구독을 함께 굴리며, 작품을 오래 돈으로 바꿀 수 있느냐가 승부를 가른다는 얘기다.
미국 미디어 회사들이 최근 몇 년 동안 몸집을 키우고 사업을 묶는 데 매달리는 까닭도 같은 자리에서 나온다. 스트리밍 사업은 겉으로 보기보다 훨씬 무거운 장사다. 서버와 기술 인프라, 앱 운영, 추천 시스템, 마케팅, 고객 관리, 콘텐츠 제작까지 대부분이 고정비다. 일정 규모에 오르기 전까지는 수익을 내기 어렵고, 규모를 키운 뒤에도 비용을 제대로 묶지 못하면 흑자를 내기 힘들다. 작품 경쟁만으로 버티기 어려워진 시장에서 회사들이 꺼내 든 카드는 통합이다. 스튜디오와 방송, 스트리밍과 광고, 스포츠와 뉴스 사업을 한 회사 안에 묶어 비용을 낮추고 현금 흐름을 넓히려는 시도가 이어지는 이유다.
미국 시장의 판을 바꾼 또 다른 축은 거실 TV 첫 화면이다. 예전에는 스튜디오가 영화를 만들고 방송사가 편성표를 짜고 케이블 사업자가 채널을 밀어 넣었다. 지금은 로쿠와 아마존 파이어 TV, 구글 안드로이드 TV, 삼성과 LG의 스마트TV 운영체제가 시청자의 첫 선택을 좌우한다. 어떤 앱을 첫 줄에 올릴지, 어떤 드라마를 추천할지, 무료 채널을 어느 자리에 배치할지가 모두 이들 손에 달려 있다. 화면을 켜는 순간 처음 보이는 칸을 누가 차지하느냐가 유통 권력이 된 것이다. 미국 미디어 시장에서 콘텐츠 회사의 힘이 약해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스튜디오가 혼자 시장을 이끌던 시절은 지나가고 있다. 콘텐츠를 담는 그릇과 보여주는 순서, 광고를 붙이는 기술이 함께 움직여야 비로소 매출이 생기는 시장이 됐다.
무료 광고 기반 스트리밍, 이른바 FAST의 성장도 같은 흐름 위에 있다. 플루토TV와 투비, 삼성 TV 플러스는 미국 시장에서 이미 실험 단계를 지난 서비스다. 한때 창고에 쌓여 있던 예능 재방송과 오래된 드라마, 장르 영화 라이브러리가 다시 돈이 되는 이유도 FAST 안에서 찾을 수 있다. 유료 구독을 망설이는 소비자는 무료 채널로 들어오고, 사업자는 광고를 붙여 수익을 만든다. 가입자 수를 부풀리기 위해 무리하게 가격을 낮출 필요도 줄어든다. 스트리밍 시장이 단순한 월정액 장사에서 광고와 무료 시청을 함께 굴리는 시장으로 옮겨갔다는 뜻이다. 미국 시청자의 시간은 이제 유료 서비스와 무료 서비스 사이를 오간다. 중요한 것은 어느 서비스가 이용자를 자기 생태계 안에 오래 붙잡아 두느냐다.
넷플릭스의 최근 행보도 이런 변화와 맞닿아 있다. 미국 시장에서 넷플릭스는 여전히 가장 강한 사업자이지만, 예전처럼 가입자 숫자만 앞세워 평가받지 않는다. 가격 인상 뒤에 따라붙는 물음도 달라졌다. 몇 명이 더 들어왔느냐보다 한 사람에게서 얼마를 더 벌어들이느냐가 먼저 거론된다. 디즈니와 워너브러더스디스커버리, 파라마운트, 컴캐스트 같은 전통 미디어 회사들도 같은 계산을 하고 있다. 작품을 많이 만들어 시장점유율을 넓히는 전략만으로는 주주를 설득하기 어려워졌다. 광고를 붙일 수 있는 요금제, 무료 채널과의 연계, 스포츠와 뉴스 같은 생방송 자산, TV 첫 화면 노출, 추천 알고리즘, 광고 판매망이 함께 돌아가야 손익이 맞는다.
그래서 미국 미디어 업계에서는 이제 “무슨 작품이 뜨느냐”만큼 “누가 화면을 쥐고 있느냐”가 중요해졌다. 작품은 여전히 필요하다. 다만 작품만으로는 부족하다. 큰돈을 들여 만든 오리지널 시리즈가 화제를 모아도 그 성과가 회사 전체 이익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시장은 냉정하다. 반대로 오래된 라이브러리 콘텐츠라도 무료 채널과 광고망, TV 첫 화면 노출을 잘 엮으면 다시 현금 흐름을 만들 수 있다. 스트리밍 서비스의 경쟁 단위가 개별 앱에서 플랫폼 묶음으로 옮겨갔다는 말은 이런 장면을 가리킨다. 콘텐츠 제작, 유통, 광고, 데이터가 한 덩어리로 굴러가야 이익이 나는 시장이 됐다는 뜻이다.
한국 콘텐츠 기업에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지금까지 미국 시장 진출은 넷플릭스나 디즈니+,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같은 대형 플랫폼에 작품을 납품하는 방식이 중심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 길은 중요하다. 다만 거기서 끝나면 수익 구조를 길게 가져가기 어렵다. 앞으로는 작품이 어느 TV 첫 화면에 노출되는지, FAST 채널로 2차 유통이 가능한지, 광고와 데이터 수익을 어떻게 나눌 수 있는지까지 따져야 한다. 미국 시장이 요구하는 능력도 달라지고 있다. 좋은 작품을 만드는 손과 함께, 작품이 어느 경로로 흘러가고 어디서 다시 돈이 되는지 설계하는 머리가 필요해졌다.
미국 스트리밍 시장은 이제 팽창의 시간보다 정리의 시간에 가깝다. 가입자 수를 앞세워 적자를 견디던 시기는 뒤로 밀리고 있다. 남는 사업자는 가입자를 많이 모은 회사가 아니라, 비용을 묶고 광고를 붙이고 여러 화면을 연결해 현금 흐름을 만든 회사일 가능성이 크다. 미국 안방 TV 첫 화면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단순한 편성 경쟁이 아니다. 누가 시청 시간을 붙잡고, 누가 광고를 팔고, 누가 오래된 콘텐츠까지 다시 돈으로 바꿀 수 있느냐를 두고 벌어지는 산업 재편이다. 미국 스트리밍 시장은 이미 가입자 전쟁을 지나, 돈 남기는 구조를 놓고 싸우는 국면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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